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대장정 (문단 편집) === 지하투쟁과 소비에트의 건설 === 국공분열 이후 중국공산당은 [[천두슈]]의 지휘 아래에 난창 폭동 등을 감행하면서 노동자들의 힘을 빌어 소비에트를 건설하려 했지만 국민당에게 번번이 진압될 따름이었다. 이 때문에 천두슈가 물러나고 [[취추바이]]([[구추백]]) 노선이 등장하였으나 역시나 폭동에 매달리는 정통 노선을 버리지 못하고 실패했다. 이 때문에 취추바이도 물러나고 총서기 샹중파(향충발), 조직부장 [[저우언라이]], 선전부장 [[리리싼]](이립삼)을 중심으로 하는 새 노선이 등장하여 당의 역량 확보에 주력했으나 [[대공황]]에 고무된 [[리리싼]]이 독단적으로 1930년 6월 여러차례 폭동과 무장봉기를 지시했다가 역시나 처참하게 실패했다. 이 때문에 코민테른 고문 파벨 미프가 개입하여 리리싼, 취추바이 등을 숙청하면서 중국공산당을 정리했고 이로 인해 샹중파가 물러나고 진소우가 총서기에 올랐으며 왕밍이 당권을 잡았다. 이때부터 공산당은 무모한 무장봉기를 포기하고 지하활동과 지방 소비에트 건설에 주력했다. 이때 두각을 드러낸 것이 [[정강산 투쟁|정강산에서 시작]]하여 장시성 전체에 이르는 거대한 [[소비에트 지구]]를 확보한 [[마오쩌둥]]과 [[주더]]였다. 여기서부터 홍군이 시작되었고 이 외에 [[독안룡]] 류보청, 산적 출신 허룽[* 다른 공산군 지도자인 예팅(1896~1946)과 함께 1927년 8월 1일에 난창에서 공산 봉기(난창기의)를 일으킨 뒤 징강산의 공산 세력과 합류했고 중국이 공산화된 후 8월 1일은 건군기념일로 제정된다. 인민해방군의 군기와 표식에 적힌 八一도 이를 기리기 위한 것이다.]을 위시해 이후 홍군의 주요한 지휘관들도 곳곳에 소비에트 지구를 건설하였다. 일찍이 마오쩌둥은 당중앙에서 지시하는 폭동이 무모한 것이니 실패할 것이라고 지적하면서 농민들을 중심으로 하는 비정통 혁명 이론을 내세우고 있었다. 당중앙이 내세우던 연속혁명론, 무장봉기론은 계속 실패했지만 마오쩌둥의 소비에트 지구는 날이 갈수록 확장되었다. 결국 마오쩌둥의 장시성 소비에트는 중앙 소비에트로 지칭되기에 이르렀으며, 1931년 11월에는 인구 250만 명의 장시성 [[루이진]](瑞金) 지역에서 정부 주석 마오쩌둥, 부주석 [[장궈타오]], 군사위원회 주석 [[주더]]를 선출하면서 [[중화소비에트공화국]] 임시 정부 성립을 선언한다. [[중화소비에트공화국]]은 장시 성, 푸젠 성을 거점으로 이외에도 후난성, 광시성, 안휘성을 위시해 [[장강|양쯔강]] 이남 주요 지역에 소비에트 특구를 수립하고 홍군을 양성하여 세력을 키워가고 있었다. [[루이진]](瑞金)을 수도로 해서 각지의 해방구를 모두 합치면 그 인구가 1,000만 명 이상이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