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대전광역시/역사 (문단 편집) == [[일제강점기]] == [Include(틀:일제강점기의 부)] 대전의 역사를 바꾸어놓은 것은 1900년에 확정된 [[경부선]] 철도 노선이었다. 1904년 공주군 산내면 대전리[* 지금의 동구 정동]에 [[대전역]]이 설치[* 흔히 '공주에 지으려 했으나 지역 유지의 반대로 대전에 지었다'라고 하지만, 전국에 퍼져있는 [[한국 철도의 유생 반대설|지역 유지 반대설]]이 그렇듯이 사실이 아니다. 일본은 양반들도 강제 노역에 동참시킬 정도로 양반들을 그렇게 대단하게 보지 않았다. 어지간한 경우가 아니면 양반일지라도 양민들과 같이 노역하던 시절이다. 공주의 몰락은 일제의 모략이 아닌 그냥 땅이 좁아서이다. 또한 공주로 지나가게 하려면 '''차령'''도 넘어야 한다. 굳이 이런 공주보다는 대전으로 길을 파는게 더 효율적이었다. 그리고 공주에 철도를 놓아도 공주는 주변 산을 다 밀어야 도시를 넓힐 수 있다.]된 이후 인구가 유입되고 도시화가 시작되었다. 1906년 산내면이 회덕군에 편입됨과 동시에 회덕군청 역시 기존 회덕읍내에서 대전시가지로 이전하였다. [[파일:attachment/대전광역시/역사/daej1914.jpg|width=500]] 1914년 회덕군과 진잠군, 공주군 현내면(유성면)을 통합하여 출범한 대전군의 행정구역 상황. 1914년 [[조선총독부]]의 조선 행정구역 대개편 당시 기존의 회덕군과 진잠군, 공주군 유성면을 통합하여 '''대전군'''(大田郡)이라 명명하였다. 만약 회덕군을 그대로 사용했으면 오늘날 '회덕광역시'라 불렸을 것이다. 단순히 기차역이 있던 동네 이름인 '대전'이 기존 고을 이름인 '회덕'을 대신해 새로운 고을 이름으로 채택된 것이다. 이때 [[대전역]] 일대의 시가지([[중구(대전)|중구]] 은행동, [[동구(대전)|동구]] 정동, 중동, 원동, 인동)를 '대전면'으로, 그 외곽지역을 '외남면'으로 대전면을 둘러싸는 [[도넛]] 모양으로 편제했다.[* 이처럼 [[청주시]]의 전신인 청주군도 이 때 읍성이 있던 시가지를 청주면, 그 외곽지역을 사주면으로 도넛 모양으로 편제했다. 이후 외남면이 대전부에 편입되듯이 사주면이 청주시에 편입되는 것도 마찬가지. [[청주시/역사]] 문서 참조.] 1917년 내남면이 회덕면으로 개칭되었다. 대전은 계속 성장하여 충청권의 중심 도시가 되었고, 1931년 대전군 대전면이 대전읍으로 승격되었다. 1932년에는 공주에 있던 [[충청남도청]]이 대전으로 이전되었다. 1935년 대전군 대전읍이 '''대전부'''(大田府)로 승격되며 본격적인 도시로서 역사가 시작되었다. 이 때 대전군의 잔여 지역은 '''[[대덕군]]'''(大德郡)으로 개칭되었다. '대'전과 회'덕'에서 한 글자씩 따서 지은 것. 1940년 대덕군의 외남면[* 이 지역은 대전이 부로 승격되기 전인 1926년과 1932년에 이미 일부가 편입된 상황이었으며, 이 시기 편입되지 않은 외남면의 잔여지역(삼정리, 가오리, 호동리, 옥계리, 대성리)은 산내면에 이관되었다. 1940년에 편입된 곳은 홍도리, 가양리, 소제리(소제동, 자양동), 연효리(삼성동, 성남동), 산소리(판암동), 용방리(용운동), 석교리, 중촌리.]과 유천면 일부[* 유천리, 과례리(문화동), 당대리(산성동), 평리(태평동), 용두리 일부(용두동).]를 대전부에 편입하였다. 대전역 서편에 남북 방향으로 뻗어있는 도로[* 현재 [[옛신탄진로]]이다.]는 혼마치라고 불렀다. 또한 대전역부터 구 충청남도청까지의 동서 방향의 [[중앙로(대전)|중앙로]]를 춘일정통(春日町通, 가스가초 거리)라고 불렸으며 대전역에서 목척교 일대가 춘일정일정목(春日町一丁目), 은행동이 춘일정이정목(春日町二丁目), 선화동이 춘일정삼정목(春日町三丁目)이라고 불렸다. 구 충청남도청이 완성되자, 이정목과 삼정목의 땅값이 급격히 오르며 고급주택가가 형성되었다고 한다. [[https://commons.wikimedia.org/wiki/File:Kasuga-Cho_in_Taiden.JPG?uselang=ko|당시 춘일정의 사진]] 또한 대전천의 지류인 대동천 유역이 정비되며, 당시 대전역 동측에 있었던 호수인 소제호는 매립되었다[* 백 여년이 지난 지금 소제동에는 소제중앙공원이 조성될 준비를 하고 있어서, 어쩌면 소제호가 부활할 지도 모른다.]. 당시 시대가 시대인지라 [[대흥동(대전)|대흥동]]에는 대전신사가 자리하고 있었으며, 이 시기 즈음부터 '대전부사'(오타후지)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된다. [[유성온천]]을 거쳐 공주에 이르는 공주가도[* 이 시기에는 서대전네거리가 아직 삼거리였다. 그리고 이 길은 현재 [[계룡로(대전)|계룡로]]이다]와 [[대전천]], [[유등천]], [[갑천]]을 넘는 교량인 목척교(대전교), 수침교, 만년교가 이때 닦인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