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대전신학대학교 (문단 편집) == 일화 == [[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sejulblog&logNo=220160930206|대전신학대학교와 이자익 목사]] 초대 교장 이자익 목사는 김제 최고 갑부 조덕삼 장로의 머슴이었다. 그들의 일화는 한국교회가 나아가야 할 미덕을 잘 보여준다. 전라도 지역에 선교하던 최의덕 선교사(L.B.Tate)는 김제지역의 거부 조덕삼을 만나 전도한다. 조덕삼은 자기 집에서 머슴살이하던 이자익을 전도하여 함께 신앙생활을 한다. 두 사람은 1905년 함께 세례를 받고 곧 이어 함께 집사가 되고 영수가 되었다. 1907년 금산교회에 장로 선거가 있었다. 조덕삼은 김제의 최고 갑부였고, 교회를 지을 땅을 헌물하였고, 교회 재정의 대부분을 담당하고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동네 많은 사람이 조덕삼의 머슴이었다. 나이도 조덕삼이 15살 많았다. 그뿐만 아니라 이자익은 경상도 마산 출신으로 외지인이었다. 조덕삼(1867~1919)은 41살이었고, 그의 집 머슴인 이자익(1879~1958)은 26살이었다. 17살 때부터 조덕삼의 집에서 머슴살이하던 이자익은 조덕삼의 선처로 결혼도 하고 함께 신앙생활도 하였다. 공교롭게도 둘은 장로 후보에 나서게 되었다. 모든 사람은 조덕삼이 장로가 될 것으로 생각하였다. 그러나 투표결과는 의외였다. 이자익이 장로가 된 것이다. 말이 안 되는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신분을 뛰어넘고, 지역 차별을 뛰어넘는 일이었다. 모두 당황하여 술렁거리기 시작할 때 조덕삼 영수는 일어나서 이렇게 말하였다. >“우리 금산교회는 참으로 훌륭한 일을 해냈습니다. 저희 집에서 일하고 있는 이자익 영수는 저보다 신앙의 열의가 대단합니다. 참으로 감사합니다. 나는 하나님의 뜻을 겸허히 받아들여 이자익 장로를 잘 받들고 더욱 교회를 잘 섬기겠습니다." 그건 그냥 인사치레의 말이 아니었다. 조덕삼은 죽을 때까지 이자익 장로를 지지하고 후원해주었다. 1909년 장로가 된 조덕삼은 이자익이 평양신학교에 입학하여 공부할 때(1910~1915)도 모든 학자금과 생활비 일체를 다 지원하였다. 조덕삼 장로는 이자익 목사를 금산교회 담임목사로 청빙하여 잘 받들어 섬겼다. 조덕삼 장로의 가정은 지금 삼대째 금산교회를 섬기고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