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대정봉환 (문단 편집) === [[토사 번]]의 대정봉환 건의 === 유신지사의 입장에서 공무합체를 구상하던 [[사쓰마]] 번은 웅번들의 정치 참가제도였던 참예회의(参預会議)(1864년)가 붕괴하여 막부의 내각과 충돌하고, 또 정치의 주도권을 막부의 요시노부에게서 웅번들의 연합체가 빼앗을려고 꾀했던 사후회의(四侯会議)(1867년)도 [[도쿠가와 요시노부]]의 정치력으로 무력화됐기 때문에, 제후회의 노선을 포기한 [[초슈]] 번과 함께 막부를 무력 타도하려는 노선으로 돌아서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토사]] 번의 [[https://ko.wikipedia.org/wiki/%EA%B3%A0%ED%86%A0_%EC%87%BC%EC%A7%80%EB%A1%9C|고토 쇼지로]]는 게이오 3년(1867년) [[사카모토 료마]]로부터 대정봉환론을 듣고 감명을 받는다. 사카모토의 선중팔책에도 영향을 받은 그는, 토사 번 간부인 테라무라 미츠나리, 마나베 마사무네, 후쿠오카 다카치카 등에게 대정봉환론의 채용을 주장했다. 이에 [[사쓰마]] 번의 가로(家老) [[코마츠 타테와키|고마쓰 키요카도]] 등도 동의하여 6월 22일 삿토 맹약(薩土盟約)이 체결되었다. 이는 막부가 조정에 대정봉환하고 권력을 일원화하는 동시에 새 조정에 의사당을 설치하고 국사를 결정하자는 것으로, 의사당의 의원은 공가에서 제후·대신·서민에 이르기까지 보통 선거로 뽑자는 것으로 알려졌다. 대정봉환론은 이른바 평화적으로 정체 변혁을 이루는 구상이었는데 [[사쓰마]] 번이 이에 동의한 것은 요시노부가 대정 봉환을 거부하는 것을 상정하고 이를 막부를 토벌함의 빌미로 삼는 것에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맹약에는 토사 번 상경 출병, 장군직의 폐지를 건의서에 명기하는 것이 약속되었다. [[https://ko.wikipedia.org/wiki/%EA%B3%A0%ED%86%A0_%EC%87%BC%EC%A7%80%EB%A1%9C|고토 쇼지로]]는 곧바로 귀번하여 토사 번병을 인솔할 예정이었지만, 토사의 대체적인 여론은 대정봉환에는 동의하나, 상경 출병에는 반대하고 장군직 폐지 조항 또한 삭제하기를 바랬다. 결국 이러한 입장차이로 9월 7일 삿토맹약은 유명무실해진다. 10월 3일, [[토사 번]]은 단독으로 대정봉환의 의견 상서를 [[도쿠가와 요시노부]]에 제출하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