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대정봉환 (문단 편집) == 대정봉환의 국가 구상과 의의 == 대정봉환에 따른 공무합체파의 정부 구성은 영국식 의회제도가 적절히 가미되어 있었다. [[동양]] 최초의 민주적 정부 구상이라고 생각될 수도 있으나, 한계는 명확했다. [[도쿠가와]] 가문 중심의 체계임이 명확했기 때문이다. [[서구권]]의 관제를 본떠 [[삼권분립]]이 형식적으로는 존재하였다. 행정권을 공부(公府)가 가져가고(잠정적으로 사법권을 겸임), 입법권을 각 번 [[다이묘]] 및 제후들에 속하는 [[사무라이]]로 구성된 의정원이 가져가도록 하고 있으며, [[천황]]은 상징적 지위에 머물렀다. 공부(公府)의 원수는 '[[타이쿤|대군]](大君)'으로 불리며 [[도쿠가와]]가 당주(즉 [[도쿠가와 요시노부|요시노부]])가 취임하면서 [[상원]] 의장을 겸하며 [[하원]] 해산권을 가지는 것으로 알려졌다. 군사(軍事)에 대해서는 당분간 각 번의 사병을 인정하지만, 몇 년 후에는 중앙 정부에 통합하기로 결정했다. 또한 [[https://ko.wikipedia.org/wiki/%EA%B3%A0%ED%86%A0_%EC%87%BC%EC%A7%80%EB%A1%9C|고토 쇼지로]]는 요시노부에게 장차 [[군현제]]를 시행하라는 구상을 전했다. 오늘날 대정봉환은 평화로운 정권이양이라는 측면에서 많은 주목을 받으나, 사실상 [[도쿠가와 요시노부]]의 [[큰 그림|커다란 정치쇼]]라는 것이 당대 그리고 역사가들의 판단이다. [[동양]] 최초의 민주적인 정부 구상이었으나, 그것은 각 번 세력의 판도에 따른 나눠먹기에 지나지 않았다. 대정봉환을 통하여 [[사쓰마]]는 [[도쿠가와 요시노부|요시노부]]가 그냥 정치판에서 아예 배제되기를 바라고 있었다. 물론 요시노부는 조용히 그 안건은 빼고 대정을 천황에게 반환하였다. 이러한 작태는 당연히 유신지사들의 야마가 돌게 만들었음이 자명했다. 어쩌면 결국에는 무력적인 충돌은 당연했을지도 모른다. 정부가 하나였던 [[서구권]]에서는 이러한 상황을 신기하게 보고 있었다고 알려진다. 즉, 대정봉환은 '''조정과 막부라는 이원 정부의 한계점'''이 당대의 혼란에 휩싸이면서 표출된 것이다. 잠시 그 폭발을 늦춰보려는 [[도쿠가와 요시노부]]의 발버둥이 있었으나 종국에는 실패에 다다른다. [[사카모토 료마]]가 대정봉환을 적극적으로 구상한 것으로 유명하나, 실상 그가 처음으로 고안한 것은 아니고 [[오쿠보 도시미치]]와 [[카츠 카이슈]] 등의 공무합체 핵심 이론들을 적절히 끌어모아 정리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럼에도 그가 이 일련의 정치적인 사건에서 높은 중요도를 차지하는 이유는, [[사쓰마]]와 [[초슈]] 혹은 [[토사]] 극단파와는 다르게, 일단 [[도쿠가와 요시노부]] 중심의 공무합체 신 정부를 구상하고 이를 통해 향후 일본의 거취를 생각해보고자 하는 자세가 있었기 때문이다. 사카모토 료마는 흔히 알려진 바대로 일본 내부의 정치적인 투쟁을 극도록 혐오했으며 일본이 진정한 '하나의 일본'이 되기를 원했다. 료마의 바람대로 대정봉환을 통한 공무합체는 이루어졌지만, 결국 [[보신 전쟁]]이 벌어졌다는 점에서 료마는 아쉬워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대정봉환이 일어나고 1달 뒤에 [[오미야 사건]]으로 인하여 암살당했으니, 그의 꿈이 깨어지지 않았을 때 세상을 떠난 셈이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