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대정익찬회 (문단 편집) == 상세 == [[내각총리대신]] 취임 전까지만 해도 열정적으로 개혁을 외치던 [[고노에 후미마로]]는 [[1937년]] 총리 취임 후 무기력한 모습을 보여주다가 [[1939년]] 돌연 [[내각총사퇴]]를 선언했고, 뒤이은 [[히라누마 기이치로]]는 대외 정책의 실패로 사임했다. 뒤이은 [[아베 노부유키]] 내각과 [[요나이 미쓰마사]] 내각은 고노에를 어떻게든 다시 앉히고자 했던 [[일본군|군부]], 특히 [[일본 제국 육군|육군]]의 농간으로 연이어 무너졌다. 특히 인기가 많은 고노에가 혁신세력을 모아 기성 정당들을 선거에서 찍어누를 대안 정당을 만들 것이란 소문이 파다하게 퍼지면서 창당도 안되었는데도 벌써부터 '고노에 신당'이라는 이름까지 붙고는 등 이미 고노에의 총리 복귀가 기정사실화되었으니, 결국 [[1940년]] 7월 군부의 의도대로 고노에는 총리에 재취임하기에 이르렀다. 그런데 본디 군부의 시나리오는 고노에의 이름을 팔아서 정국을 통제하고 [[전체주의]] [[군국주의]] 고도국방국가라는 일본 육군 [[통제파]]의 꿈(?)을 이룩하는 것이었으나, 고노에는 이번만큼은 군부의 [[꼭두각시]] 노릇은 안하겠다며 단단히 결심한 상태였고, 이 고노에 신당을 크게 확대시켜서 모든 권력을 철저하게 총리, 즉 자신에게 몰아주게 한다는 이른바 '신체제운동'을 발족시켰다. 고노에의 신체제운동은 권력이 골고루 분산되다 못해 산만할 지경이었던 [[메이지 유신]] 체제의 대안으로서, 사회 각계 각층을 총망라하는 강력한 대중조직의 건설을 제시했다. 고노에의 신체제에서 외면당할까 두려웠던 기성정당들[* [[입헌정우회]], [[입헌민정당]]]은 고노에 본인이 시키지도 않았건만 제 스스로 당을 해산하고 신체제운동 합류를 선언하였고, [[1940년]] 10월 '대정익찬회'라는 이름으로 결실이 맺어졌다. 이 거대한 정치조직은 마치 [[공산당]]처럼 지방 말단 촌락에서부터 세포조직을 건설하여 그 위로 쌓아올리는 일종의 피라미드식 조직으로 건설되어, 그 최상부에는 총리를 앉히고 사회 전체에 뻗어나간 조직력을 통해서 강력한 정책추진력을 쥐어줄 예정이었는데 결국 몽상으로 끝나고야 말았으니, 가장 큰 원인은 당장 그 누구도 총리에게 권력이 집중되는 걸 보고만 있을 생각이 없었기 때문이다. 당장 사실상 고노에에게 정권을 떠넘겨준 군부는 정국의 주도권을 고노에에게 넘길 생각이 전혀 없었다. 또한 히라누마 기이치로 전 총리를 위시로 하는 관념우파는 [[파시즘]]도 서구사상이므로 배격하자던 양반들이었으므로 [[천황]] 뺨치는 권력이 총리에게 집중되는 꼴을 보고 [[막부]]의 재림이라며 손가락질을 해댔고, 기성 정치인들은 이런 초헌법적 기관이 생기면 [[대일본제국 헌법|메이지 헌법]]은 뭐가 되느냐며 난리법석을 쳤다. 이렇게 반발이 거세지자 결국 [[내각]]에서 대정익찬회는 정치결사가 아니라 공공결사라는 해석을 내놓으면서 대정익찬회는 공식적으로 [[정당]]도 아니게 되어 일종의 국민운동본부로 바뀌었고, [[일본 파시즘]]은 실질적으로 끝이 나고 말았다. 정치운동으로 기획되었지만 정당이 되질 못했고, 권력기반으로 설계되었지만 그 어떤 권력도 창출할 수 없었으며, [[전체주의]]를 표방했지만 대중조직은 될 수 없었던, 그야말로 되다만 [[파시즘]], 미완의 파시즘을 상징하는 기구라고 볼 수 있다.[* 구 [[일본 제국]]과 천황제를 파시즘으로 볼 수 있냐는 문제는 지금도 학계의 논쟁거리이다. [[천황제 파시즘]] 항목 참조. [[일본사]]에서 [[파시즘]]이라고 하면 대정익찬회가 아닌 [[일본군]]을 가리키는 것이 보통이다.] 결론적으로 군부가 쥔 권력을 조금도 가져오지 못한 허울뿐인 단체라는 것이 역사학계의 중론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