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대종교 (문단 편집) === [[일제강점기]] === 창교 이듬해에는 교세가 2만 명으로 크게 늘었고 1910(융희 4)년 8월 1일 단군교에서 대종교로 이름을 바꿨다.[* <<황성신문>> 1910년 9월 8일자, <광고>.] 이 과정에서 정훈모(鄭薰模)를 중심으로 한 일부 신도가 단군교 교명의 고수를 명분으로 삼아 분립하였다. 정훈모는 이 '단군교'의 교주가 되었는데 단군교는 우여곡절 끝에 대종교와 다른 행보를 걷다가 1936년 일제에 의해 강제 해산되었다.[* <<근대 단군 운동의 재발견>>, 아라, 2016, 41쪽] 일제는 1911년 「[[조선총독부]] 시정연보(施政年報)」치안(治安) 부분에 '종교 취체항'[* 취체(取締)는 일본에서 사용하는 표현으로, 단속이라는 뜻이다. 즉, '종교 단속에 관한 항목']을 설정하여 종교단체의 활동을 법률적으로 통제하고 간섭할 구실을 만든 뒤 민족종교를 탄압하기 시작했다. 이에 같은 해 [[서일]]·[[채오]]·[[계화]] 등이 [[만주]]로 망명하여 [[길림성]] [[왕청현|왕청설치국]](汪淸設治局)[* 현 [[중국|중화인민공화국]] [[길림성]] [[연변 조선족 자치주]] [[왕청현]]. 1912년에 왕청현으로 승격되었다.]에 비밀결사 중광단(重光團)을 설립했다. 대종교 교단 지도부는 국내에서의 활동이 어렵다고 판단하여 1914년 아예 길림성 [[화룡시|화룡현]](和龍縣) 청호촌(淸湖村)[* 현 [[중국|중화인민공화국]] 길림성 연변 조선족 자치주 화룡시 용성진(龍城鎭) 청호촌(淸湖村)]으로 총본사를 옮겼다. 1916년 음력 8월 15일(양력 9월 12일)에 교주 나철이 자결하고 [[김교헌]]이 2대 교주가 되었다. 김교헌 시기에 대종교는 종교조직으로서 체계를 갖추기 시작했다. 1919년 [[3.1 운동]]은 [[개신교]]와 [[천도교]] 세력이 주축이긴 했지만 대종교도 함께 운동을 지원했다. 1919년 4월에는 중광단을 조직했던 서일이 다른 종교계 인사들과 함께 대한정의단(大韓正義團)을 발족했고 이 대한정의단과 [[신민회]] 계열이 합작하여 대한군정회를 조직했으며 다시 대한정의단과 대한군정회가 통합하여 대한군정부를 조직하였다. 이런 일련의 과정에서 보이듯이 대종교의 가장 중요한 업적은 항일 무장투쟁으로 1920년 [[청산리 대첩]]에 가담했던 북로군정서군이 바로 대종교가 양성한 조직이다. 위에 언급한 대한군정부의 [[이명]]이 바로 북로군정서다.[* 당시 이미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인정하는 서로군정서군이 서간도에 존재했기 때문에 그에 상대되는 의미로 북간도의 북로군정서라는 명칭이 붙었다.] 가담한 주요 인물로는 서일, [[현천묵]], [[김좌진]], [[이범석]] 등이 있다. 특히 서일은 대종교 3대 교주(당시 호칭은 도사교)가 될 사람으로 공인받았다. 이 북로군정서는 훗날 대한독립군 등 10여개의 다른 무장투쟁세력과 연대하여 [[연해주]]로 건너가 대한독립군단으로 재편성되었지만 [[러시아 내전]]에서 편을 들어준 [[소련]]에 의해 [[토사구팽]]당해 1921년 [[자유시 참변]]을 당해 사실상 해체되었으며 서일은 자유시 참변에 이어 그해 9월 27일 [[소련군]]의 후원을 받은 토비(土匪)들의 습격을 받아 휘하 병사들이 궤멸되자 이에 책임감을 느껴 대종교 도사교 직위를 계승하기 전에 자결하였다. 이후 대종교 교단에서는 서일을 추존하여 도사교라고 부른다. 한편 대종교의 총본사는 일제의 지속적인 추적으로 1920년 [[간도 참변]] 직전에 기존의 길림성 화룡현 청호촌에서 길림성 밀산현(密山縣) 삼사통(三梭通)[* 현 [[중화인민공화국]] [[헤이룽장성]] [[지시시]] 당비진(當壁鎭).]으로 옮겨졌다가 서일이 자결한 뒤 1922년 총본사는 다시 연길도(延吉道) 영안현(寧安縣) 남관(南關)[* 현 [[중국|중화인민공화국]] [[헤이룽장성]] [[무단장시]] 닝안시(寧安市) 난관다오촌(南關道村).]으로 옮겨졌다. 총본사는 1928년 다시 밀산현 제6보(第六保) 삼사통으로 옮겨졌으며 1934년에는 영안현 발해보(渤海保) 동대와자(東大洼子)[* 현 [[중국|중화인민공화국]] [[헤이룽장성]] [[무단장시]] 닝안시(寧安市) 보하이진(渤海鎭).]으로 옮겨졌다.[[http://www.okpedia.kr/Contents/ContentsView?localCode=krcn&contentsId=GC05312000|#]] 이러한 투쟁과 함께 대종교는 만주 곳곳으로 세를 뻗어나가기도 했는데 심지어 멀리 [[중국 대륙]] 본토에까지 전파되었다. 그러나 3대 교주[* 엄밀하게 대종교식으로 표현하자면 도사교(都司敎)] [[윤세복]] 시기에 대종교 사상 최악의 위기가 닥쳤는데 1932년 본거지인 만주에 일제의 괴뢰정권인 [[만주국]]이 성립되어버렸다. 이 시기 수많은 대종교인이 [[살해]], 구금당했고 대종교 자체도 [[비밀결사]]화했다. 특히 1937년부터 대종교 총본사에서는 영안현 동경성구(東京城區) 8가(八街) 부근에 있던 [[상경용천부]] 터에 [[단군]]을 모시는 천진전(天眞殿)의 건립을 추진하고 있었는데 1942년 [[조선어학회]] 소속의 국어학자 [[이극로]]가 천진전 건립 관계로 당시 교주인 [[윤세복]]에게 「널리 펴는 말」이라는 원고를 보낸 바 있었다. 이때 일본 경찰은 미리 교단 내부에 심어 놓은 [[밀정]]을 통해 이를 압수하여 원고의 제목을 '조선독립선언서'로 바꾸고 그 내용 중 "일어나라, 움직이라"는 부분을 '봉기하자, 폭동하자.'는 뜻의 일본어로 번역했으며 "대종교는 조선 고유의 신도(神道)를 중심으로 단군 문화를 다시 발전시킨다는 기치 아래, 조선 민중에게 조선정신을 배양하고 [[민족자결주의|민족자결의식]]을 선전하는 교화단체이니만큼 조선독립이 그 최후목적이다."라는 죄목 하에 [[조선어학회 사건]]과 때를 같이하여 1942년 11월 19일 교주 윤세복 이하 25명을 동시에 검거했는데 이 사건을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47564|임오교변]](壬午敎變)이라고 한다. 당시 투옥된 간부 중 초대 교주 [[나철]]의 두 아들인 [[나정련]]과 [[나정문]] 형제를 비롯해 [[권상익]]·[[https://e-gonghun.mpva.go.kr/user/ContribuReportDetail.do?goTocode=20001&pageTitle=Report&mngNo=8881|이정]](李楨)·[[안희제]]·[[https://e-gonghun.mpva.go.kr/user/ContribuReportDetail.do?goTocode=20001&pageTitle=Report&mngNo=8170|김서종]](金書鍾)·[[강철구(독립운동가)|강철구]]·[[오근태]]·[[https://e-gonghun.mpva.go.kr/user/ContribuReportDetail.do?goTocode=20001&pageTitle=Report&mngNo=72416|이창언]](李昌彦)·[[https://e-gonghun.mpva.go.kr/user/ContribuReportDetail.do?goTocode=20001&pageTitle=Report&mngNo=72342|이재유]](李在囿) 등 10명이 고문의 여독으로 옥사 순국했고 그 밖의 간부들은 [[무기징역]]을 선고받은 윤세복을 비롯해 최소 7년, 최대 15년의 형을 선고받고 복역하다가 옥중에서 [[8.15 광복]]을 맞았다. 이렇듯 만주에서 활동하던 대종교 교단은 만주국 성립에서 일본 패망에 이르기까지의 기간 동안 마치 [[카타콤]] 시절의 초기 기독교처럼 수난과 박해의 대상이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