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대집성 (문단 편집) == 개요 == [[고려시대]]의 무장. 태집성(太集成)이라고도 불렸다. 고려에 귀부한 옛 [[발해]] [[왕족]]의 후손으로 [[대(성씨)|협계 대씨]]의 시조다.[* 족보에서는 [[대도수]]의 6대손이라고 한다.] 고려 [[고종(고려)|고종]] 때 낭장(郞將)을 지내고 1218년에 차장군(借將軍), 1228년에 대장군(大將軍) 겸 서북면병마사(西北面兵馬使)를 지내기도 했다. 후에 정승의 반열에 올라갈 수 있는 수사공(守司空)까지 올랐다고 한다. 조상인 [[대조영]]은 [[고구려부흥운동]]을 일으켜 [[발해]]를 세운 지대한 역할을 했다. 또 다른 조상인 [[대도수]]는 [[여요전쟁#s-3|1차 여요전쟁]] 때 승전보를 울리며 [[서희]]의 외교에 보이지 않는 공을 세웠으며 [[여요전쟁#s-4|2차 여요전쟁]] 때는 패배하긴 했으나 고군분투하며 잘 싸웠다. 그러나 대집성은 [[무신정권]] 당시 아첨하고 무능한 전형적인 소인배였다. <[[고려사]]>에 남아있는 기록을 보게 되면 [[인맥]]을 믿고 날뛰다 자기 말 안 들으면 일단 없애고 보는 전형적인 [[간신배]]. 다만, <[[고려사]]>에선 [[최우]]가 그 막장성을 가볍게 뛰어넘은 탓에 대집성이 병풍 처리된 감이 있고 간신 열전에 실리지 않은 것도 그 때문이다. 최우를 미화시키는데 일조한 박훤[* 본관은 공주 박씨이며 초명은 박문수(朴文秀). [[최우]]의 가신이 된 이후 사관(史官)이 되었던 그는 최우를 미화시킨 책을 편찬해 많은 논란을 낳기도 했다. 이후 [[최항]]과 관련된 발언을 하다 미움을 사 [[흑산도]]로 유배를 갔고 이후 [[최우]]가 다시 올라오라 명하자 당시 박훤을 증오하고 보기만 해도 찢어죽이고 싶어하는 최항이 자객을 보내 그를 무참하게 죽였다.]이 오히려 간신 열전에 오른 덕택에 대집성이 묻힌 것이다. [[안북성 전투]] 때의 일이나 이후 일을 보면 사실 열전에 올리기엔 민망할 지경이긴 한데, 어쨌든 간신 열전과 폐행 열전에 올리지 않은 건 그래도 최우와 달리 나가서 몽골 군대와 싸웠다는 것이 덕택이고, 안북성 전투를 두고 대집성 능력 탓만 하기엔 몽골군이 원체 강하기도 했으며, 박훤이 최우를 미화하는데 신나게 열을 올린 것과 달리 대집성은 그래도 그런 짓까진 하지 않았다. 직설적으로 말해서 [[간신]] 축에도 낄 정도는 아니었던 셈. 음험성도 그닥이었고 아부를 시전하긴 했지만 눈치도 없었고, [[최씨 정권]]에 갈굼만 당하고 이후 유배 크리까지 먹었으니 굳이 찾자면 폐행 정도에 어울리는 인물이다. 반대로 박훤, 송길유, 김준은 되려 최씨 정권을 연장시켰고, 김준도 붕괴시킴과 동시에 최씨 정권을 연장시켰기에 그들의 장기 집권을 간접적으로 도왔다. 사실 이들도 대집성처럼 눈치도 없고 겁쟁이로 전락하는 순간 최씨 정권의 수명은 길어봐야 최우로 끝났다고 봐야 할 것이다. 그 뒤 수사공(守司空)으로 있다가 1236년 5월 17일 [[http://db.history.go.kr/id/kr_023r_0060_0040_0010|사망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