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대집성 (문단 편집) == 일화 == * 1218년 4월, 최충헌이 무인들에게 인심을 사기 위해 벼슬을 뿌렸고 이 덕에 낭장이었던 대집성이 차장군(借將軍)에 임명되었다.[* 앞에 借(빌릴 차)가 붙는 건 지금으로 따지면 비정규직 자리다. 윗사람이 그냥 포상용(떡밥)으로 던져주는 상징적인 직책. 직책명부터가 "장군이라는 직책을 잠깐 빌려준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실질적으로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자기가 이끌수 있는 병력이 없는 것도 당연하지만 우둔하고 눈치없는 이 멍청이는 그걸 몰랐던 거다.] 기분이 한껏 좋아진 대집성이었지만 곧 자기 휘하에 이끌 수 있는 부대가 없다는 걸 알자 '''승려와 노비를 안 가리고 자기 부대로 무조건 모두 징발하는 바람에 노비가 없어진 개경에 나무를 자르거나 짐승 기르는 사람까지 없어져 개판이 되어버렸다.''' 그 소식을 들은 [[최충헌]]이 "[[답이 없다|이 자는 답이 없다]]"며 바로 칼같이 잘라버렸다. * 1228년 8월, 중이 자혜원(慈惠院)을 지으려고 강음현[* 江陰縣, 현재의 황해북도 금천군]에서 나무를 베었는데 강음현 감무(監務) 박봉시(朴奉時)가 이를 금지하고 그 베어버린 나무를 관가에 바치게 했다. 그래서 화가 난 중이 대집성에게 아부를 하며 "박봉시가 나무를 빼앗아갔는데 돌려달라고 말해주시면 안되겠느냐"고 부탁했고 [[기분업업↑↑|기분이 한껏 좋아진]] 우리의 대집성은 박봉서에게 "그러지 말고 돌려달라"는 서신을 보냈지만 박봉시는 이를 개무시했다. 이 소식을 들은 대집성이 자신을 무시했다며 분노, [[최우]]에게 서신을 요청하니 최우가 교정소(敎定所)의 서신을 보냈다. 하지만 이도 무시하자 '''대집성이 최우에게 박봉시를 유배 보내야 한다고 말해 결국 박봉시는 유배형에 처해졌다.''' 이를 보고 사람들이 대집성을 맹비난했다. * 1231년 [[안북성 전투]] 대패의 일등공신인[* 성 밖에서 야전을 벌여야 한다고 했고 결국 고려군이 성 밖으로 나갔으나, 대패했다.] 대집성이었지만 '''이전에 과부가 된 그의 딸이 최우와 재혼하면서 [[최우]]의 장인이라 처벌을 받지 않았다.'''고 한다. [* 갓 과부가 된 대집성의 딸이 예쁘다는 말을 들은 최우가 그 딸을 데려다가 후처로 삼았다. 당시 대집성은 후군(後軍)의 지휘관으로 있으면서 비록 전투에서 패배하는 일이 있더라도 최우(빽)를 믿고 전혀 겁을 내지 않았다. - 《[[고려사]]》 최이 열전.] * 1231년 [[제1차 자모산성 전투]](자주성)에서 [[최춘명]]이 항복을 거부하자 '''[[최우]]에게 "최춘명을 죽여야 몽고가 우릴 해치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해 나라를 지킨 충신을 죽일 뻔 했다'''. 그런데 마침 [[지나가던]] 몽고 관리[* 원나라로부터 고려에 파견된 다루가치]가 '''"이 사람이 우리에게는 비록 명령을 어긴 사람이나 너희로 보아서는 충신이니 나는 죽이지 않을 것이다. 그대들이 이미 우리와 화친을 약속하였으니 성을 지킨 충신을 죽이는 것이 옳겠는가?"'''라며 '''끈질기게 뜯어말려서''' 살았다. 불행 중 다행으로 최춘명은 이후 전공을 논할 때 첫 번째로 거론되었고, 이후 종3품 추밀원부사로 발탁되었다. 그의 아들 최념도 관직이 위위경에 이르렀다. * [[여몽전쟁|몽고의 2차 침입]] 당시 [[최우]]가 강화도로 천도하려고 재상들을 자신의 집으로 소환했다. 모든 이들이 그의 비위를 맞추느라 반대하지 않았는데 오직 야별초지휘(夜別抄指揮) [[김세충]](金世冲)만이 "개경은 태조대왕 이래로 200년 넘게 우리의 수도이며 성도 튼튼하고 식량도 많은데 왜 막을 생각 않느냐고 엎드리며 반대를 했다. 이에 최우가 "그럼 방어할 방법이 있느냐?"고 묻자, 김세충이 우물쭈물 했다. 이 모습을 본 대집성은 '''"국가의 중대한 문제에 대해서 대책없이 말하는 저런 자가 더이상 나오지 않도록 죽여버립시다."라며 최우에게 아부를 떨었다.''' 옆에 있던 김현보(金鉉甫)도 대집성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같은 발언을 했고 결국 '''김세충은 그 자리에서 끌려나와 처형당하고 저잣거리에 효수되었다.'''[* 비록 본인들의 안위를 위해서 마음대로 처리한 것이지만, 원칙적으로 이 자리는 '''고려의 최고집정자'''인 최우가 '''정3품 이상의 고위직인 재상들'''을 불러다가 국가의 중대사를 의논한 것이였다. 그런데 야별초지휘{혹은 夜別抄指諭}라는 직은 指諭라는 명칭에서 보다시피 가장 높아봐야 정5품 중랑장급 정도이고, 야별초라는 부대는 최우가 자신의 사적인 경비를 위해서 조직한 군사조직이였다.(물론 경찰업무도 담당하였다.) 특별한 대책을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닌 이상 함부로 이야기해도 될 위치가 아니였다.] * 대집성 사후 대집성의 딸 대씨가 [[김약선]]의 아들 [[김미]]를 후계자로 밀면서 [[최항]]과 갈등을 빚는데 대집성이 죽고나서 그의 딸은 독살되고 대씨와 전 남편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인 [[오승적]](吳承績)도 같이 죽었다. 여기까진 괜찮은데 오승적의 친척 중에 김약선의 동생이자 [[귀주성 전투]]와 나주 [[이연년 형제의 난]]을 진압한 영웅인 [[김경손]]이 연루되어 덩달아 [[김경손]]도 살해당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