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대푸가 (문단 편집) == 개요 == >'''시대를 앞서간, 영원히 현대적인 곡.''' >---- >이고르 스트라빈스키 [[루트비히 판 베토벤|베토벤]]의 [[현악 4중주]] 작품으로, 제목 그대로 [[크고 아름다운]] [[푸가]] 작품이다.~~베토벤이 작곡한 헤비메탈~~다만 이 곡이 단독 구상된 적은 없었고, 사실 현악 4중주 13번(작품번호 130)의 마지막 악장으로 계획되었던 것이 시대적 한계 및 금전적인 이유 등 이런저런 이유로 따로 떨어져 출판된 것이 지금까지 내려오고 있다.[* 이와 비슷한 경우는 피아노 소나타 21번 발트슈타인의 안단테 파보리(Andante favori), 원래는 2악장에 넣으려고 했으나 소나타가 너무 길어져서 지루해질 수 있다는 친구들의 의견을 참고하여, 이 곡은 단일곡으로 편성되었고 2악장은 짧은 서주가 있는 소나타 형식으로 대체되었다.] 이 곡은 [[카핑 베토벤]]이라는 영화의 오프닝 곡으로 쓰이기도 했다. [[교향곡 제9번(베토벤)|교향곡 9번]]을 완성한 뒤 베토벤은 말년에 주로 현악 4중주의 작곡에 매달렸는데, 물론 현실적으로는 [[러시아 제국]]의 부유한 [[귀족]]이었던 니콜라이 갈리친 공작이 베토벤에게 의뢰해 왔다는 점도 있었지만 이 분야에서 자신의 마지막 걸작들을 남기겠다는 의지도 강하게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갈리친 공작을 위해 작곡한 현악 4중주는 12번과 15번, 그리고 13번 세 곡이었는데, 첫 12번은 전통적인 4악장제였지만 15번에서 5악장, 13번에서 6악장 식으로 점차 규모가 확대되도록 구성되었다. 특히 13번의 경우 마지막에 15~18분이나 걸리는 대규모 푸가 악장을 넣어서 전체 연주 시간이 40~50분에 이르는 엄청난 규모의 작품이 되었다. 하지만 이 거대한 4중주가 1826년 3월에 슈판치히 4중주단에 의해 초연되었을 때는 간주곡 격인 독일 춤곡 풍의 4악장과 느리고 감동적인 카바티나인 5악장 정도만이 대중적으로 호평을 받았고, 특히 6악장으로 설정된 이 푸가의 경우에는 당대 비평가를 비롯해 모두가 이해할 수 없는(...) [[괴작]] 취급을 받았다. 베토벤 자신도 이런 여론을 매우 못마땅하게 여긴 것 같은데, 초연 후 베토벤을 찾아온 슈판치히 4중주단의 제2바이올린 주자 칼 홀츠가 4~5악장이 앙코르를 받았다고 하자 "왜 푸가는 앙코르가 안 됐는데?! 그게 됐어야지! 바보 같은 놈들 같으니!!"라고 불평했다고.[* 실제로 베토벤은 [[월광 소나타]]를 평가 절하하고 Op.78을 높이 평하는 등 청중들의 인식과는 괴리가 먼 인물이었다. --그런데 음악을 배우는 사람들은 점점 베토벤의 인식과 같아지게 된다.--] 여하튼 이 곡의 난이도와 난해함에도 불구하고 이 곡을 출판하겠다고 나선 이가 악보 출판업자였던 마티아스 아르타리아였는데, 다만 아르타리아도 그 당시 대다수의 사람들처럼 푸가 악장이 너무 복잡기괴해서 그대로 출판하면 안 팔릴 것 같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르타리아는 이 늙고 괴팍한 작곡가한테 자기 의도를 그대로 털어놓으면 야단만 맞을 것 같아서였는지(...), 1826년 4월에 '[[여러분 이거 다 거짓말인 거 아시죠|푸가가 점차 인기를 얻고 있으며]], [[피아노]] 연탄용 편곡의 의뢰가 들어 왔으니 푸가만 출판할 수 있게 해달라'고 간보기식의 요청을 했다. 베토벤은 이 제안에 응해 마지막 현악 4중주를 작곡하면서 동시에 푸가 악장을 직접 편곡했고, 이 편곡판은 작품 번호 134번을 부여받고 따로 출판되었다. 하지만 아르타리아는 아직까지 현악 4중주를 원본 그대로 출판하기를 꺼리고 있었고, 결국 자신보다는 베토벤과 훨씬 면식이 있던 홀츠에게 '님 베토벤 횽한테 이야기 잘 좀 해주셈'하고 부탁해야 했다. 물론 홀츠도 베토벤의 기분이 상할까 봐, 가능한 한 외교적으로 돌려서 말했는데, 특히 새 악장을 써준다면 그건 그거대로 아르타리아가 작곡료를 지불할 것이고 푸가와 4중주의 악보에 별도 인세가 매겨지므로 [[저작권]] 수입이 늘 것이라고 설득했다고 한다. 자존심이 센 베토벤은 딱 하루를 고민하고 이 제안에 응했다고 알려지는데 아마도 조카 칼의 양육비 문제 때문에 금전적으로 어려움이 있었다고 알려지고 있다. 1826년 10~11월에 조카 칼을 데리고 그나이센도르프에 있는 동생 요한의 집으로 가서 요양하면서 새롭고 좀 더 평이한 6악장을 작곡해 아르타리아에게 보냈는데, 그로부터 몇 개월 후 베토벤이 세상을 떠났으므로 이 푸가 대신 새로 쓰여진 작품 번호 130의 6악장은 사실상 베토벤이 최후에 작곡한 곡이 되었다. 아르타리아는 계약대로 베토벤이 죽은 지 두 달 뒤에 새 6악장을 덧붙인 4중주와 푸가의 악보를 따로 출판했는데, 이 과정에서 푸가는 그 규모에 걸맞게 '대(大)'라는 수식어가 붙어 제목으로 고정되었으며, 작품 번호 130에서 독립하여 작품 번호 133을 별도로 받게 되었다. 베토벤은 Op.81a, Op.106 등 수많은 명곡을 헌사했던 루돌프 대공에게 이 곡을 헌정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