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대학별고사 (문단 편집) ==== 1981년 ~ 1993년: [[대학입학 학력고사]] 세대 ==== 1980년에는 전두환 정권이 들어서면서 민심 달래기의 일환으로 교육개혁 조치를 단행하여 1981학년도부터 고액과외의 원인이었던 '''본고사를 일괄적으로 폐지'''하고, 1969학년도부터 시행해오던 예비고사의 점수와 고교내신만으로 전형을 실시하도록 했다.[* 학력고사항목의 "유래와 역사"참조] 1982학년도[* 따라서 학력고사세대는 엄밀히 말하면 82학번부터다. 그러나 통상 81학번을 포함한다.]에는 예비고사의 이름이 [[대학입학 학력고사]]로 변경되었고 국가 총정원의 1.x배수를 컷트하는 제도를 폐지했다. 처음 학력고사는 암기 중심에 과목도 고교 거의 전과목(15과목)을 다루는 시험이어서 그럭 저럭 난이도에 불만은 없었다. 이 때 서울대 최상위학과 커트라인이 310점대, 연세대 경영학과 등이 290점대. 그러나 차츰 암기 위주의 시험에 대한 비판이 있자 1980년대 후반에는 '''본고사 못지 않게 변별력이 쩔어주는 시험'''으로 바뀐다.[* 모든 과목이 그런 것은 아니고 주로 국영수, 특히 수학이 그랬다.] 아주 어려운 1989~1991학년도의 경우 340점 만점[* 필기고사 320점+체력장 20점]에 300~310점을 넘으면 전국 100등 이내의 등수가 나왔고[* 그 당시 340점 만점에 300점 이상 받은 학생수가 1989년 900명대, 90~91년에는 1000명을 약간 넘는 정도였다. 참고로 당시 학력고사 응시자수는 98~99만명. 즉 300점 이상자의 수는 전체 응시자 수의 0.1% 정도라고 보면 된다.], 280 ~ 290점을 넘으면 서울대 법대와 [[물리학과]][* 당시 문과, 이과의 최상위 학과. 1990년대 중반까지 예비/학력고사 수석은 거의 이 두 학과에서 배출했다.]를 그냥 합격할 수 있을 정도로 어려웠다. 그래서 이때까지만 해도 대학들은 학력고사가 본고사를 대체할 만큼 확실하게 변별력을 가지기에 교육부에 별 불만을 가지지 않았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최상위권(최소 7% 이내)의 이야기였다. 중위권 학생들 중에서는 학력고사는 너무 어려워서 도저히 못 풀겠다는 학생들이 속출했고, 모르는 문제는 아예 찍어야 했기 때문에 중하위권에게 있어 학력고사는 오히려 변별력이 떨어졌다.[* 1987년 이전의 학력고사는 위에 언급한 시기보다 쉬운 편이였고 또한 고교 전과목(15과목)이 학력고사 과목이였으니 큰 문제는 안 되었다. 위에서 언급한 본고사 수준의 어려운 학력고사는 1989~1991년 3년간이라고 보면 된다. ~~하지만 그때 인구가 끝내주게 많은 [[1970년]], [[1971년]], [[1972년]]생들이 시험을 쳤다는 것..~~ ~~[[정준하]]도 이 덕분에 4수~~][* 어려운 대학입학 학력고사 때문에 일부 상위권을 포함한 중위권 이하에서 불만이 커졌고 그에 대한 반발로 1992, 1993년 학력고사는 상대적으로 쉽게 출제되었다. 그 결과 1993년 학력고사에서 300점 이상자의 수는 약 3만명. 1989~1991년 시기 1천명 전후에서 왔다 갔다 한 것에 비하면 얼마나 시험이 쉬워졌는지를 알 수 있다. ~~그정도로 난이도가 널뛰기하면 지금같으면 난리날 듯.~~] 또한 과외, 교습 금지령으로 인해 교육상품은 오히려 음지에서 몰래 프리미엄이 붙어 거래되고 있었다. 이 시기 '한 대학생의 행동이 수상해서 [[간첩]]이나 [[주체사상파]]인줄 알고 뒤를 따라가봤더니 올빼미 과외더라' 식의 [[도시전설]]이 유행하기도 했다. 1990년대에 접어들면서부터는 '학력고사는 대학에서 공부할 수 있는 역량을 알아보는 시험이 아니라 단순 지식의 암기량 테스트가 아니냐'는 비판에 거세게 부딪히게 된다. 이에 1994년부터는 이 제도를 갈음하는 [[대학수학능력시험]]을 실시하게 되었다. 아울러 학력고사 시절부터 점수대별 대학교 서열이 어렴풋하게 잡히기 시작한다. 그러나 이때도 학교별 편차가 심해 후대와 같은 일률적인 서열정리는 어려운 시기라 할 수 있다.[* 1980년대 초중반 대학입시 커트라인 자료를 보면 알겠지만 서울대와 상위 사립대 사이의 점수차가 사립대끼리의 점수차이에 비해 매우 큰 편이였다. 사립대끼리는 학과에 따른 특이성도 있었던 시기였고. 따라서 일률적인 서열정리는 어려웠다. 참고로 1980년대 후반 선지원 후시험으로 바뀐 이후에는 대학들의 커트라인 비공개로 정확한 점수는 알기 어렵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