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대학입시 (문단 편집) ==== 1969~1980학년도 ==== ||대학입학 예비고사 + 대학별고사(본고사)|| 과잉된 대학 입시 경쟁을 해소하고 대학 운영 폐단을 시정하며 대학생을 질적 향상을 목적으로 1968년 '대학입학예비고사령'이 공포, 1969학년도부터 예체능을 제외한 모든 학과 지망자는 예비고사를 거치게 되었다. 예비고사는 선택형 필기고사로 거의 전과목에 걸쳐 출제되었다. 문과계는 국어1·2, 수학1, 영어, 사회A(일반사회, 국민윤리, 정치, 경제, 국사, 세계사, 지리1·2), 이과계는 국어1, 수학2, 영어, 사회B(사회A에서 정치, 경제 제외), 과학B(물리2, 화학2, 생물1·2, 지학)가 필수 과목이었고 제2외국어가 필수 선택이었다. 1969~1972학년도까지 예비고사는 통과하면 본고사 응시 자격이 주어지는 자격시험이었으나 1973학년도부터는 예비고사 성적을 20% 이상, 체력검사 성적을 10% 이상 의무적으로 반영토록 하였고, 예체능 지원자도 예비고사를 치르게 되었다. 예비고사가 변별력을 갖춤에 따라 오히려 본고사보다 당락에 더 큰 영향을 미치기 시작했다. 이는 아이러니하게도 예비고사가 본고사보다 훨씬 쉬웠기 때문인데, 예비고사가 비록 쉽긴 해도 고교 전과정이 출제범위여서 자연스레 고른 점수 분포가 형성되게 되었다. 반면 본고사는 너무나 어렵게 출제된 나머지 평균점수가 과목별로 20점대에 머물렀기 때문에 오히려 변별력이 떨어지게 되었다. 이렇다 보니 1974~1975년부터는 예비고사 점수가 본고사 점수보다 당락에 더 큰 영향을 미치게 되었고, 이때부터 많은 학생들이 본고사보다 예비고사에 주력하기 시작했다. 1970년대 후반으로 갈수록 예비고사의 난이도가 상승하였고, 그에 따라 당락에 더 큰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예비고사가 본격 시행되면서 1950~60년대 끊임없이 사회문제가 되었던 명문대의 입시 부정 논란이 많이 수그러드는 계기가 되었다. 하지만 여전히 본고사가 남아있었기 때문에 여전히 상류층 및 교수 자녀들을 중심으로 한 입시 비리는 완전히 근절되지는 못했다. 다만 1950~60년대처럼 완전히 무학력자가 부정하게 명문대에 들어가던 행태는 예비고사로 1차 걸러지기 때문에 어느정도 차단할 수 있게 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