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대한민국/외교 (문단 편집) === 근대 이전 === [include(틀:상세 내용, 문서명=조선/외교)] 인구와 토지가 곧 국력이던 전근대 사회에서, [[중국 대륙]]은 언제나 세계 경제력의 3~40% 가량을 차지하는 문명의 요람지였다. 그러나 중국 대륙은 분열기를 거치면서도 유럽과는 달리 통일된 정체성을 형성하였으며, 한반도의 인구 부양력이나 생산력만으로는 단독으로 통일된 중원 왕조에 맞서기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때문에 역사 속 [[한반도]] 국가의 최우선 외교 과제는 바로 '''막대한 인구 부양력과 생산력을 갖춘 중국 대륙의 위협을 관리하는 것'''이었다. [[한나라]]가 [[고조선]]을 멸망시키고 [[한사군]]을 설치한 이후, 한민족의 삼국(三國)은 약 한 세기 가까운 투쟁을 거쳐 한나라의 영향권에서 벗어나는 데 성공한다. 반면 [[중국]]은 고대 [[후한]]의 멸망 이후 오랜 분열기를 겪었으며, 따라서 동 시기의 [[고구려]], [[발해]] 등은 중원의 혼란을 틈타 [[만주]]를 장악하여 어느 정도 독자적으로 중국과의 세력 균형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고구려]]가 [[당나라]]에게, [[발해]]가 [[요나라]]에게 각기 멸망하고, [[고구려]]의 계승을 주장하며 북진을 노렸던 [[고려]]마저 [[몽골]] 앞에 무너지고 이후 조선이 세워지면서 조선의 국력은 크게 쇠퇴해서 조선은 대(對)중국 견제책은 독자적인 국력신장 대신 역내 외교에 의존하는 노선으로 전환된다. 개중 고려는 전기에는 [[거란]], [[여진]] 등 북방 이민족들과 [[송나라]] 사이에서, 후기에는 [[원나라]] 내부의 알력 다툼을 바탕으로 적당한 줄타기를 하면서 외교적 이익을 챙겼다. 반면 [[조선]]은 [[만주]] 진출을 포기하는 대신 [[명나라]]와 우호적인 관계를 맺으면서 안보를 보장받았고, 이는 [[일본]]이라는 새로운 세력이 등장했던 [[임진왜란]]에서 조선의 구명줄이 되기도 했다. 그러나 [[조선]] 중기 이후 사대외교는 점차 실리적인 본질을 잃은 채 중화 문명에 맹종하는 형태로 변질되어갔고, [[북벌론]] 등 정치적 자주성을 회복하려는 시도들 역시 이를 뒷받침할 만한 사회·군사적 개혁을 이루는 데 실패하면서 무위로 돌아갔다.[* 사실 [[병자호란]] 이후 북벌을 시도했다 한들, 당대 청나라의 황제가 [[강희제]] 같은 중국사 최고의 명군이었음을 감안하면 더 잔혹한 결과로 되돌아왔을 가능성이 높았다. 후대의 [[일본 제국]]은 사회가 뒤집어질 정도의 개혁을 통해 선진 군사기술을 획득했기 때문에 [[청일전쟁]]에서 이길 수 있었던 것이며, 그나마도 일본 열도는 한반도보다 본질적으로 약 1.5~2배 가량의 동원력·생산력을 가졌던 데다, 당시 청나라는 [[국가 멸망 테크]]를 타던 와중이었다. 냉정하게 말해 한반도 국가가 [[만주]] 지역의 자원·생산력·동원력(전근대의 기병대는 현대전의 전차와 같은 위치였고 유목민족은 기마에 익숙했다)을 상실한 시점에서 중국 대륙과 전면 적대하는 것은 만용에 불과하며, 중국이 내란에 빠질 때를 노려 북방 지역을 조금씩 수복하고 오랜 기간에 걸쳐 굳히기를 반복하는 편이 현실주의의 관점에서 보다 합리적인 전략이었을 것이다. 당장 만주 기반의 청나라가 중원을 장악했던 과정이 그러했고, 원-명 교체기를 노렸던 [[요동 정벌]]의 논지가 그러했으며, 후대 [[중화민국]]의 분열을 이용하여 대륙으로 진출했던 일제 또한 이런 전략을 채택했었다. 물론 그 모든 시도들은 [[위화도 회군|궁극적으로]] [[멸만흥한|무위로]] [[중일전쟁|돌아]][[무조건 항복|갔고]], 이에 따라 오늘날에도 아시아 국가들이 중국에 세력균형을 이루기란 쉽지 않은 것이 현실이다.] 근대에 이르러 한중일 3국은 각기 서구 열강의 개화압력을 받게 되나, [[청나라]]가 부패한 관료들과 [[아편전쟁]]의 여파로, [[조선]]이 시대착오적인 [[소중화]]사상과 [[쇄국정책]]으로 각기 자멸하는 사이, [[일본 제국]]만이 빠른 근대화에 성공하며 동북아시아의 새로운 열강으로 도약하게 된다. 일본 제국은 적극적으로 선진 문물을 수용함으로써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에서 국가 규모의 차이를 뒤엎으며 화려하게 국제 무대에 데뷔하였고, 초창기에는 조선과 중국에서도 상당수의 개화파들이 그들에게 우호적인 입장을 취하며 롤모델로 삼고자 하였다. 그러나 일제가 선전했던 [[아시아주의]]란 결국 주어만 바뀐 [[제국주의]]의 다른 버전이었음이 곧 드러났고, 한민족은 급변하는 정세 속에서 [[사대주의|잘못된]] [[쇄국정책|판단을]] [[친일|내렸던]] 결과 [[일제강점기]]라는 고난의 시기를 겪게 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