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대한불교보문종 (문단 편집) == 상세 == 불교 최초의 여성 출가자인 마하파자파티(大愛道. [[석가모니]]의 이모이자 양모)를 종조로, [[신라]] 시대의 비구니였다는 법류(法流)를 중흥조로 받들지만 실제 개조(開祖)는 [[일제강점기]]에 보문사를 중창한 비구니 긍탄(亘坦: 1885~1980)과 그 제자 보암당 은영(恩榮: 1910~1981)이다. 은영은 해방 직후인 [[1945년]]부터 보문사에 주석했다. [[1962년]] 3월 25일에 [[대한불교조계종]] 중심 통합종단이 공식 출범하면서 통합종단을 놓고 비구 측과 대처승 측의 대립이 격화되어 불교계는 매우 혼란스러웠다. 긍탄이나 은영은 비구 혹은 대처승 어느 쪽에도 가담하기를 거부하고 [[여승]]의 중립적 권리와 능력을 인정받을 수 있는 방안을 강구, 1971년 재단법인 대한불교보문원을 설립하고 '비구니와 여성의 권익과 위상을 높여 사회발전에 공여한다'는 목적으로 [[1972년]] 3월 비구니들만으로 구성된 종단을 세웠다. 은영은 [[1971년]]에 오갈 데 없는 여신도들을 위하여 시자원(施慈院)이라는 양로원을 만들었는데, 여기서 [[순정효황후]]와 황후를 모셨던 마지막 [[궁녀]]들이 여생을 보냈다.[[http://www.ibulgyo.com/news/articleView.html?idxno=142446|#]] 다만 만년은 좋지 못했다. 사세 확장에 지나치게 몰두한 나머지 사찰 경내에 이런저런 건물, 그 중에서도 특히 경주 [[석굴암]]을 본뜬 소형 석굴암을 사찰 안에 짓느라 당시 [[조흥은행]]은 물론 신도나 일반인들로부터 10억 원이나 되는 빚을 졌다. 빚 독촉을 감당하지 못하여 은영과 종무 계월, 행자 공순 등 세 비구니가 음독자살하는 일이 생기기도 했다.[* 출처: 《[[경향신문]]》 1981년 10월 9일.] 이후 3차례에 걸쳐 변제하여 빚은 어찌어찌 갚았다는 모양. 현재 보문종 종단 소속 사찰은 40여 곳, 소속 [[비구니]]는 약 200여 명이다. [[미국]]과 [[일본]] 등 해외에도 국제포교를 위해 사찰 6곳을 운영한다. 월간 《보문》을 발행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