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덕종(고려) (문단 편집) === 즉위 전 === || '''{{{#670000 봉호}}}''' ||연경군(延慶君) ||[[연경궁]](延慶宮)의 가신 || || '''{{{#670000 훈위}}}''' ||상주국 ||가장 높은 훈위 || || '''{{{#670000 공신호}}}''' ||숭인광효보운공신 || || || '''{{{#670000 문산계 품계}}}''' ||개부의동삼사 ||종 1품 품계로 가장 높은 품계 || || '''{{{#670000 수직}}}''' ||수사도 ||수직은 자신의 품계보다 높은 품계의 직위를 받을 때 붙힌다. || || '''{{{#670000 겸교직}}}''' ||검교태사 ||검교는 직위에 이름만 올렸다는 뜻으로 명예직이다. || || '''{{{#670000 직위}}}''' ||내사령 ||내사령은 내사성[* 고려 최상위 정부기관으로 조직명은 내의성 → 내사성 → [[중서문하성]] 순으로 바뀌었다.]의 명목상 장관[* 실권을 가진 실제 장관은 [[문하시중]]이다.]으로 명예직이며 실권은 없다. || 1016년 5월 2일 거란의 침입을 막아낸 [[현종(고려)|현종]]과 [[원성왕후]] 김씨 사이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명군이었던 부왕을 빼닮았는지 어린 시절부터 결단력이 뛰어났다고 전한다. 1020년에 연경군(延慶君)에 봉해졌고, 1022년에 태자에 책봉된 후 1031년에 부왕 현종이 붕어하자 중광전[* 重光殿, 고려 [[만월대|본궐]]에서 가장 크게 활용된 편전.]에서 즉위했다. 그는 아버지가 붕어하자 방에서 하루종일 울며 슬퍼했다.[* 《고려사》 원문 기록: '태자가 즉위하여 익실(翼室)에 거처하면서 조석으로 애림(哀臨)하였다.'] 아버지가 붕어하자 16세의 어린 나이로 즉위하여 선정을 펼쳤다. 덕종은 현종의 공인된 후계자로서 왕태자(王太子)에 봉해졌다. 덕종 이전에는 공인 후계자의 작위를 '정윤'(正胤)[* 혜종, 경종, 성종.], '태자'(太子)[* 혜종, 경종.], '개령군'(開寧君)[* 제7대 목종. 선왕인 성종의 '개령군' 봉호를 물려받는 방식으로 후계자에 공인됐다.]으로 불렀는데 덕종부터 태자로 고정되어 봉해졌고, 충렬왕이 마지막 태자가 되었다.[* 원 간섭기부터는 '왕세자'(王世子)에 봉해졌다.] 또한 고려의 임금 중 마지막으로 [[고려의 궁원|궁원(宮院)]]에 봉해진 군(君)이다. 덕종은 아버지 현종이 대량원(大良院)에 봉해진 것처럼 연경원[* 당시에는 '원'이었다. 동생 정종이 태어나고 나서 '궁'으로 승격된 것.]에 봉해졌고, 덕종이 마지막 사례가 되었다. 이후의 군주들은 태자로서 국왕이 되거나 옛 국가나 영지를 하사받은 제후 상태에서 즉위했다.[* 원 간섭기 이전까지.]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