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덕종(고려) (문단 편집) ==== 대 [[거란]] 강경 외교 ==== 덕종 즉위 초인 1031년 요나라에서는 거란 역사상 최고의 명군이었던 [[성종(요)|성종 아율문수노]]가 붕어하고, [[흥종(요)|흥종 야율지골]]이 즉위했다. 요 성종의 장례식 준비 기간 동안 거란은 [[압록강]] 유역에 부교와 여러 보루를 쌓아두고 있었다. 같은 해 10월 조정에서는 이를 무너뜨리는 것과 거란과의 전쟁 때 포로가 된 고려인들의 송환을 요구했는데 거란이 이를 거부하자 당대의 중신이었던 [[서눌]][* [[서희]]의 아들.]과 [[왕가도]][* 개경 [[나성]]의 건축자. 원명은 이자림. 김훈•최질의 난의 진압자였다.]는 "이놈들이 우리 말을 쌩까니 어이없네요. 그냥 사신을 끊죠"라고 진언해 왕이 이를 받아들여 11월에 거란으로의 사신 파견을 중단하는 한편 흥종에게 사대하지 않겠다는 의미로 전황제 [[성종]]의 [[연호]]인 '태평'(太平)을 계속 사용하는 등 강경 일변도를 유지했다. 거란 흥종이 사용한 연호는 '경복'(景福)과 '중희'(重熙)였는데 이 해의 연호는 '경복'이었다. 1032년 1월 또 다시 거란이 사신을 보냈지만 그냥 무시했다. 한편 거란에서 [[후궁]]이던 흥종의 생모가 선제 성종의 [[황후]]로부터 [[태후]] 자리를 빼앗고, 그들을 살해하는 [[정변]]이 일어나 이 여파로 1031년부터 옛 발해인 고진상, 왕광록이 투항했고, 1032년 3월 고선성, 고진성, 최운부, 이운형 등 20명에 달하는 거란의 중앙 관료 출신 귀족들이 대거 고려로 망명했으며, 4월에는 고위 관료 해가, 내을고 등 30명이 귀순했고, 6월에는 우응, 약기 등 50명이 망명했다. 덕종은 이들을 모두 받아들였고, 같은 해 거란의 군인 7명을 체포했다. 이런 긴장 관계 속에서 끝내 1033년 10월 거란군이 정주에 침입해오자 맞서서 격퇴하기도 했다.[* 《고려사》 <유소 열전>] 거란이 갑자기 침입한 것은 덕종이 수축하기 시작한 고려 북계의 '''[[천리장성]]'''의 공사를 저지하기 위한 목적에서였다. >命平章事柳韶, 創置北境關城. >평장사 [[유소(고려)|유소]]를 시켜 북쪽 국경에 관성을 축조하도록 했다. >---- > - 《[[고려사]]》 <덕종 세가> 1033년 8월 중. 당시 거란은 명군 성종의 붕어 전후로 나라가 극도의 혼란에 빠지고, 지도층은 분열하여 국력이 심하게 기울어 가던 상태였다. 이런 거란의 재침입에 대비하여 덕종은 영인진(寧仁鎭), 삭주(朔州), 파천현(派川縣) 등 북방의 요새를 축성하여 강경한 입장을 견지했다. 《고려사》 <[[왕가도]] 열전>에는 왕가도, 유소, 이단 등 조정의 중신들이 덕종에게 거란을 침공하자고 강하게 건의했지만 반대 여론이 만만치 않았고, 덕종은 [[태묘]]에 들어가 점을 쳐보고는 결국 포기했다고 기록했다. 이미 아버지 현종 대에 [[흥료국]]을 지원하기 위해 거란을 공격했지만 큰 성과를 못본 것 역시 큰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현종 원문대왕의 신하 [[곽원]]의 출정이다. 곽원은 압록강 이북을 차지하자며 군대를 끌고 갔지만 역사에 기록될만한 성과는 얻지 못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