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덕혜옹주(영화) (문단 편집) == 고증 오류 == * 한일 강제 병합 후 궁궐 내 남자 직원([[내시]], 대령숙수 등)은 모두 쫓겨나고 [[궁녀]]들만 남았다. 따라서 [[덕혜옹주]]가 일본으로 강제 유학을 떠나는 날 그 앞에서 우는 내시들은 고증 오류다. * 영화 내에서 [[일본어]]로 옹주를 부를 때도 옹주의 일본식 발음으로 부르지만, 실제론 덕혜의 일본어 발음을 더해 '도쿠에 히메(德惠姬)'라 불렸다. 올케 [[이방자]]의 회고록을 봐도 알 수 있다. (히메는 신분 높은 사람의 딸을 호칭) * 극 중 직접 출연하지는 않았지만, 남자 주인공 김장한의 아버지의 이름이 김황악이라고 언급되었는데 실제 김장한의 아버지 이름은 김정진(金珽鎭)으로 김황진의 동생이다. 김황진 - 김정진 형제는 신 [[안동 김씨]]로 26세 '진(鎭)'자 돌림을 쓴다. 제작진이 이런 점까지는 파악하지 못하고 김장한 아버지의 이름을 김황진의 황을 따서 가상으로 지은 듯하다. * [[고종(대한제국)|고종]]이 어린 장한을 밤늦게 따로 불러 얘기할 때 자신의 딸을 덕혜라고 부르지만, 실제로 고종은 덕혜옹주가 덕혜라는 이름을 얻게 되는지도 몰랐다. '덕혜(德惠)'는 고종 사후 2년 뒤인 1921년 5월 4일에 이복오빠 [[순종황제]]가 내려준 봉호이기 때문이다. 원래대로라면 고종은 덕혜를 '아기'라고 부르는 게 맞겠지만, 극 중 진행 상 아무래도 그냥 "아기야"라고 부르긴 무리였던듯 하다. 실제로 여러 회고록 등을 보면 어린 시절의 덕혜옹주는 그저 '복녕당[* 어머니 [[귀인 양씨]]의 당호] 애기씨'로 통칭된다. * 덕혜옹주가 조선인 노무자들 앞에서 자신을 조선의 옹주 이덕혜라고 소개하는 장면이 있다. 이를 고증 오류로 생각할 수 있으나 [[일제강점기]]에 나온 몇몇 자료들에 덕혜옹주를 이덕혜로 부른 용례가 보인다.[[http://www.kobay.kr/kobay/item/itemLifeView.do?itemseq=1210LK187UE|#]] 다만, '덕혜(德惠)'는 위에서 언급했다시피 본명이 아니라 순종이 내린 작호였고, 1931년 [[소 다케유키]](宗 武志)와 결혼하면서 남편의 성에 작호를 붙여 '소 도쿠에(종 덕혜, 宗 德惠)'로 불리운 것을 시작으로,[* 그 전까지는 별다른 본명 없이 살았다고 보면 된다. 본래부터 왕족들의 이름은 필요할 때가 아니면 부르지도 않고 쓰지도 않는 것이 법도였고, 원래 작호가 본명 내지는 이름 역할을 하기 위해 있던 것이다. 덕혜옹주 이전의 조선 왕조 왕자녀들도 본명은 있지만 생전엔 작호로 불렸다. 어차피 본명이 있어봤자 살아생전 불릴 일도 거의 없기 때문에 이름이 없어도 크게 문제되지 않았다.] 1956년 이혼하고 나서 어머니 귀인 양씨의 성을 따라 양덕혜(梁德惠)로[* 이때 '이덕혜'가 아니라 '양덕혜'로 불리운 이유로 여러가지 설이 있었는데, 그 중에 친가인 전주 이씨 가문(대동종약원)에서 덕혜옹주를 이혼녀라고 거부했다는 설이 가장 유력하다. 그래서 외가의 성씨인 '양'을 사용한 것이라 한다. 일리가 있는 추론인 것이, 종묘/사직대제부터 조선/대한의 모든 제례를 위탁 주관하는 전주이씨대동종약원이 유독 덕혜옹주의 제사 만큼은 2010년대에 이르기까지 '출가외인'이라는 명분으로 못 본 척했었기 때문.] 바꾸고 1962년 국적을 회복하여 귀국하고 나서야 이덕혜(李德惠)라는 이름이 공식적으로 널리 쓰였다. 즉, 이덕혜가 틀린 건 아니다만, 차라리 그냥 덕혜라고만 하는 게 더 자연스러웠다. * 일제강점기라서 예법을 엄격히 따지지 않아 덕혜옹주가 용보 당의를 입은 것으로 생각할 수 있으나, 1897년 고종이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황제가 되면서 궁중 예법은 황실의 격에 맞게 한층 상승되었다. 왕은 황제가 되었고, 황제의 자식들은 왕이 되었다. 기본적으로 옹주라 해도 왕의 반열에 있기에 덕혜옹주가 용보 당의를 입는 건 황실 예법에 따른 것이다. * 영화 초반부, 덕혜옹주가 [[기모노]]를 바꿔치기 했을 때, 한택수가 [[높으신 분들]]에게 까이는 장면이 있다. 그 때 '[[내선일체]]를 홍보할 수 있다면서 큰소리 쳐놓고 뒤통수를 맞다니'라는 대사를 하는데, 내선일체라는 용어가 제대로 반열에 오른 시기는 1937년부터였다. 덕혜옹주가 유학을 가던 시기는 1925년인데, 이 장면에 나오던 시기도 대략 1925년이라고 추측할 수 있다. 이렇게 된다면 '내선일체'라는 용어가 무려 12년 전에 나온 셈이 된다. * 마지막에 덕혜옹주가 귀국하는 길 탑승한 비행기가 무려 제트기에 이코노미 3-3-3배열 [[광동체]]기다. 애초에 광동체기 자체가 [[1969년]]에 [[보잉 747|데뷔한 물건이며]], 3-3-3배열이 최초로 적용된 물건도 1995년 나온 [[보잉 777]]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