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덩샤오핑 (문단 편집) === [[근대화]] 추진 === 또한 이 때부터 [[실용주의]] 노선에 입각하여 과감한 개혁 조치들을 단행하였다. 중국 정계의 최고 실권자로서 [[1978년]] '4대 [[근대화]]'(농업의 근대화, 공업의 근대화, 과학 기술의 근대화, 국방의 근대화)로 대표되는 개혁과 개방 정책을 발표, 추진하여 기업가와 농민의 이윤 보장, 지방 분권적 경제 운영, [[엘리트]] 양성, 외국인 투자 허용 등으로 중국 경제가 크게 성장하는 단초를 마련하였다.[* 본래 중국의 4대 현대화는 1964년 [[저우언라이]] 국무원 총리가 제2기 전국 인민대표대회 제1차 회의에서 처음 제시한 것이었는데, 2년 후 시작된 문화 대혁명의 혼란으로 덩샤오핑의 집권기에 본격화될 수 있었다. 결국 오늘날 중국 4대 현대화는 덩샤오핑의 업적으로 기억되고 있다.] 덩샤오핑이 자신의 권력을 확고히 다지던 무렵, 중국의 가장 큰 문제는 농업 부문의 전근대화 및 [[문화대혁명]]과 하방정책의 부작용으로 인한 농촌지역 인력과잉이었고, 생산성 또한 저조해서 상당수의 식량을 외국에서 수입해야했으며 배급제로 운영되었다. 배급제 특성상 식량이 풍족하게 배급되었던것은 아니라서 불편한 점이 이만저만이 아닌데다가 또한 당시 중국의 인구증가속도를 생각하면 생산성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더 많은 식량을 수입해야했기때문에 이로 인한 외화낭비도 목과할수 없는 문제였는데 1980년대 초반에 농업개혁을 시행해서 결국 수년 내에 식량의 자급 자족을 이루어내는 데 성공한다. 중국은 광활한 영토를 가지고 있지만, 사막과 산악 지대 등 사람이 살 수 없는 지역이 많고 도시화가 진행된 2020년과는 다르게 개혁개방이 막 시작되었을 당시에는 중국인구의 대부분이 농촌에서 주거했기때문에 실제 1인당 경지 면적은 그리 높은 편이 아니었다. 이 과정에서 그는 [[중국 공산당]]의 상징적 성과물인 중국 농업 인민 공사(줄여서 인민 공사라고 부른다.)에 의한 중앙 통제적 농업을 과감히 버리고, 가구별 의사 결정에 따른 자율적 농업 및 잉여 농산물의 시장 판매를 허용하였다. 이는 그를 반대하는 강경파 [[공산주의자]]들의 반대에 부딪혔으나, 카리스마와 그가 계획적으로 양성한 정치적 친위부대의 지원을 통해 이를 극복하였다. 시범 지역이었던 [[안후이성]]의 농업 생산은 3년 만에 3배가 된 곳도 있었으며, 1981년에는 식량의 자급 자족에 성공했다. 이를 통해 안후이성을 시찰한 중국 지도부가 "드디어 인민이 진심으로 행복해하고 있다."고 확신을 가지고 전국적으로 정책을 확대할 정도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