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이동문서 삭제토론 데므치그돈로브 (문단 편집) === 일본과 협력 === 한편 일본 제국은 데므치그돈로브의 영향력이 계속 강화되자 그를 포섭대상으로 삼아 접근했다. 일본은 선령협회이사장, 만주국의 몽골인 장교들을 통해 데므치그돈로브에게 줄을 대는 한편 내몽골의 청년들을 일본으로 유학시키고 데므치그돈로브에게 뇌물과 무기를 제공하며 그의 환심을 사려 했다. 또한 일본군 특무기관과 전신국을 내몽골에 건설하였다. 데므치그돈로브는 일본의 도움이 필요한 것이라 여겨서 이런 지원을 받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다. 급기야 1934년 8월, 데므치그돈로브의 측근인 한펑린(韓風林, 한풍림)이 베이핑에서 국민혁명군 헌병대에게 체포되어 일본군 특무대원으로 데므치그돈로브를 유인해 일본에 투항시키려 했다는 죄목으로 처형당하는 사건이 발생하면서 데므치그돈로브는 격분하였다. 데므치그돈로브는 이를 두고 한풍림이 내몽골의 황포군관학교 출신자들의 견제와 계영청으로부터 [[남의사]]에 들어오라는 제안을 거부한 것 때문에 국민당 고위층의 미움을 사서 죽은 것이라고 주장했다. 결국 한펑린 사건 이후 데므치그돈로브는 1935년 10월, 관동군 참모부장 [[이타가키 세이시로]]와 특무부대장 다나카 류키치의 사주로 몽정회에서 전격 탈퇴해버렸으며 데므치그돈로브의 부하 이수신은 차하얼성에서 일련의 군사활동을 전개하였다. 당황한 국민정부는 1936년 3월, 수원성 정무위원회를 설치하였으나 데므치그돈로브는 이를 묵살하고 일본이 설립한 내몽골 정부 주석에 취임하여 2만명의 병력을 거느렸다. 이 기세를 몰아 데므치그돈로브는 [[내몽골]]에 몽골인의 독립 정권을 세우려는 의도를 가지고, 1936년 [[수동사변]]을 일으켰으며 1937년에 [[루거우차오 사건]]이 일어나자 [[일본 제국|일본]]의 개입을 받아 내몽골 지역에서 중국의 [[국민혁명군]]을 쫓아버리고 독립을 선언해 '''몽골연맹자치정부'''를 세웠다. 데므치그돈로브는 [[칭기즈 칸]]의 30대 손임을 내세우며 [[소련]]의 위성국으로 [[소련군]]이 주둔한 [[몽골 인민 공화국]]에 대항하는 정통 [[몽골]] 정부임을 내세웠다. 데므치그돈로브는 나아가 독립국임을 선언하려고 했지만, [[외몽골]] 및 [[부랴티아]]까지 집어 먹자면서 대몽골의 통일을 내세운 데므치그돈로브의 주장을 [[관동군]]은 [[내몽골]] 동부를 차지하는 [[만주국]]의 불안정과 [[소련]]과의 충돌을 우려해 반대했다. 결국 '''[[몽강연합자치정부]]'''로 타협을 보고 1939년 정식 수립했으나, 관동군의 농간으로 산서성 북부와 하북성 북부의 [[한족]] 거주지역까지 대거 포함시키는 바람에 인구의 95%가 [[한족]]이 되어 버렸다. 게다가 실권은 모두 [[일본인]]이 쥐고 있었다. 한편 일본이 몽강연합자치정부를 [[왕징웨이 정권]]에 편입시키려고 하자, 분노한 데므치그돈로브는 [[장제스]]와 내통한다. 결국 이것은 관동군에 발각되었지만 일본 입장에서도 데므치그돈로브를 대신할 만한 지도자가 없어서 그를 그대로 내버려두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