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덴마크/역사 (문단 편집) === 프레데리크 7세 시대와 제1차 슐레스비히 전쟁 === 1848년 1월 크리스티안 8세가 사망하자 그의 아들인 프레데리크 7세가 새로운 덴마크 왕으로 즉위하게 되었다. 프레데리크 7세는 즉위 직후 1848년을 휩쓴 유럽의 자유주의 혁명 물결 속에서 자유주의 내각을 지명하고 1849년 6월 양원제 의회를 규정한 새로운 헌법을 비준하면서 절대왕정의 덴마크를 입헌군주제 국가로 탈바꿈시켰다. 한편 프레데리크 7세는 2번의 이혼 이후 1850년 8월에는 평민 출신의 발레 무용수 루이제 크리스티네 라스무센과 3번째 결혼을 강행하며 귀족들의 거센 반발을 사기도 했지만 여전히 왕위를 이어받을 자식은 태어나지 않았다. 한편 유틀란트 반도의 아이다 강 북부의 슐레스비히 공국은 1157년 슐레스비히 공작 발데미르 1세가 덴마크 왕위에 오른 이후부터 덴마크와 동군연합 상태가 되어 있었다. 그리고 1459년 슐레스비히 남쪽의 홀슈타인 공국도 신성로마제국의 봉토로 남겨둔다는 조건 아래 덴마크 왕실의 소유가 됐다. 이후부터 슐레스비히 공국과 홀슈타인 공국인 하나의 공동체가 되면서 슐레스비히-홀슈타인 공국으로 통칭되기 시작했고 1544년 덴마크 왕실의 올덴부르크 가문(House of Oldenburg)과 그 방계인 홀슈타인-고토르프 가문(House of Holstein-Gottorp)이 슐레스비히-홀슈타인 공국을 공동 통치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제2차 북방 전쟁(Second Northern War, 1655년 ~ 1660년)을 통해 체결된 1658년의 '로스킬레 조약(Treaty of Roskilde)'과 '코펜하겐 조약(Treaty of Copenhagen)'을 통해서 홀슈타인-고토르프 공국이 덴마크로부터 분리되었다. 이후 홀슈타인-고토르프 가문이 유명의 명문 가문이 되었고 외가 혈통을 통해 1751년에는 스웨덴 왕인 아돌프 프레드리크를, 1762년에는 러시아의 차르인 표트르 3세를 각각 배출하기도 했다. 특히 홀슈타인-고토르프 가문의 직계 혈통인 표트르 3세가 러시아 차르가 되면서 러시아와 홀슈타인-고토르프 공국의 동군연합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1773년 러시아와 덴마크 사이에 체결된 '차르스코예 셀로 조약(Treaty of Tsarskoye Selo)'을 통해서 덴마크는 왕실 가문의 발상지인 올덴부르크 백작령에 대한 권리를 포기하는 대신에 슐레스비히-홀슈타인 공국에 대한 온전한 권리를 획득하였다. 그리고 슐레스비히-홀슈타인 공국은 1815년 덴마크가 빈 조약으로 획득한 작센-라우엔부르크 공국과 함께 추가적으로 하나의 공동체를 형성했다. 그렇지만 슐레스비히 공국과 홀슈타인 공국, 작센-라우엔부르크 공국은 지리적으로나 역사적으로 차이점이 많았다. 본래 신성로마제국의 봉토였던 홀슈타인 공국과 작센-라우엔부르크 공국은 나폴레옹 전쟁 동안 해체된 신성로마제국을 대신하여 1815년 빈 체제로 성립된 '독일 연방(독일어 Deutscher Bund)'에 가입했지만 신성로마제국이 봉토가 아니었던 슐레스비히 공국은 독일 연방에 소속되지는 않았다. 그러나 슐레스비히 공국과 홀슈타인 공국은 오랫동안 단일 공국처럼 생활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나폴레옹 전쟁의 영향으로 민족주의 사상이 전파되자 슐레스비히 공국에 살던 사람 중 덴마크인들은 슐레스비히 공국을 분리시켜 덴마크에 아예 합병시키자고 주장했고 독일인들은 슐레스비히 공국마저 독일 연방에 소속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던 중 1848년 1월 프레데리크 7세가 새로운 덴마크 왕으로 즉위하자 슐레스비히-홀슈타인 공국에서 대표단을 파견하여 슐레스비히 공국도 독일 연방에 속하게 해달라고 청원하였으나 거절당했다. 그러자 슐레스비히 공국 안의 독일인들이 반발하며 봉기를 일으켰고 렌츠부르크를 점령한 후 킬에서 임시정부를 구성했다. 그리고 덴마크로부터 독립하여 독일 연방에 가입할 것을 결정하고 독일 연방에게 지원을 요청했다. 그러자 독일 연방의 의회가 군대 파견을 결정하였고 특히 빈 회의 당시부터 슐레스비히를 탐냈던 프로이센이 가장 적극적으로 가담하면서 제1차 슐레스비히 전쟁(First Schleswig War)이 시작되었다. 1848년 3월 31일 프로이센을 비롯한 독일 연방에서 파견한 군대가 도착하기 이전에 이들을 지원하기 위해서 7,000명의 슐레스비히-홀슈타인 병사들이 먼저 플렌스보리(독일명 [[플렌스부르크]])를 점령했으나 뒤이어 덴마크 군 7,000명이 나타나자 4월 9일 바우 전투(Battle of Bov)에서 덴마크 군이 승리하였다. 하지만 증원군으로 프리드리히 하인리히 에른스트 폰 브랑겔이 이끄는 프로이센 군 12,000명이 나타나자 4월 23일 슐레스비히 전투(Battle of Schleswig)에서 패배하고 말았다. 이제 덴마크는 이제 단순히 슐레스비히를 내주는 것을 넘어서 유틀란트 반도까지 프로이센 군에게 위협을 당하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다만 프로이센과 독일 연방의 덴마크 공격은 국제적인 지원없이 이루어졌다는 점이 덴마크에게 유일한 희망이었다. 당시 빈 체제는 나폴레옹 전쟁을 통해서 퍼져나간 프랑스 혁명의 자유주의 사상과 나폴레옹 1세의 지배에 맞서기 위해 자연 발생한 민족주의를 억압하는 것을 대원칙으로 하고 있었다. 이 때문에 유럽의 주요 강대국들은 자유주의와 민족주의를 바탕으로 한 슐레스비히의 분리 독립을 원하지 않았다. 이에 독일 연방의 소속임에도 불구하고 오스트리아가 지원을 거절했고 러시아도 프로이센에게 병력을 철수하지 않으면 동맹을 파기하겠다고 외교적 압박을 가했으며 영국도 자신의 중재 제의를 덴마크에게 거절당하기는 했지만 함대를 파견하여 프로이센에 대한 무력시위에 들어갔다. 심지어 덴마크의 오랜 앙숙인 스웨덴조차 덴마크를 지원하기 위해 병력을 파견하기도 했다. 그 사이 독일에서도 1848년 '3월 혁명(독일어 Märzrevolution)'이 일어나면서 빈 체제를 주도했던 오스트리아의 총리인 클레멘스 벤첼 로타어 폰 메테르니히-비네부르크가 실각했고 프로이센에서도 자유주의 내각이 들어섰다. 그리고 5월에는 독일의 통일을 위한 '프랑크푸르트 국민회의(독일어 Frankfurter Nationalversammlung)'가 결성되어 제1차 슐레스비히 전쟁을 적극적으로 지원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정작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도 자유주의와 민족주의에 대한 반감이 심했기 때문에 프로이센의 자유주의 내각과 프랑크푸르트 국민회의에 대한 불만이 많아 제1차 슐레스비히 전쟁에서 이탈하고자 했다. 다만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의 철수 명령에도 불구하고 프리드리히 하인리히 에른스트 폰 브랑겔은 독일 연방의 의회의 명령을 따르겠다며 항명하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