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덴마크/역사 (문단 편집) == 중, 근세 == 덴마크는 오랫동안 여러 개의 부족 단위로 분열되어 있었으나 노르웨이 같은 험준한 산맥과 스웨덴 같은 빽빽한 산림도 없었기 때문에 통일 국가의 형성을 방해할 만한 지리적인 요인은 적은 편이었다. 936년 옐링 지역의 군주가 된 고름이 대대적인 정복 활동을 벌이며 덴마크의 통일 사업을 시작하여 덴마크 서부를 지배하던 울라프 가문의 시그트리그 그누파손을 물리치고 유틀란트 반도를 통일하였다. 고름은 인근 노르웨이 통일 왕국의 초대 왕 하랄 1세의 아들 에리크 1세와 자신의 딸인 건힐다를 결혼시키며 친선 관계를 유지하였다. 그리고 고름의 아내인 티레가 덴마크와 독일의 국경인 다네비르케 방어벽을 세우며 국경선을 확정지었다고 한다. 다만 다네비르케 장벽은 오늘날 남아있지는 않다. 한편 비록 티레가 그리스도교에 상당한 호감을 가지고 있었고 고름 역시 티레를 상당히 아껴 그녀가 죽자 그녀를 기리는 룬문자 비석을 세울 정도였지만 고름 스스로는 전통적인 북유럽 신화의 열렬한 숭배자였다. 이에 947년 독일의 작센 북부 지역에서 신성 로마 제국의 지배에 항거하는 이교도 슬라브족의 반란이 일어났을 때 아들인 하랄 고름손 블로탄을 보내 이들을 지원하였다. 이 반란은 3년이나 이어졌으나 950년 신성로마황제 오토 1세의 대대적인 반격을 받으면서 진압당하고 말았다. 덴마크 군도 유틀란트 반도로 쫓겨갔고 [[오토 1세]]의 공격을 피하기 위해 신성로마제국의 종주권을 인정하고 매년 공물을 바치는 굴욕적인 조건으로 강화조약을 체결해야만 했다. 덴마크에서는 958년 고름이 사망하고 그의 아들인 하랄 고름손이 왕위를 이어받았다. 하랄 고름손은 '푸른 이빨'이라는 뜻의 '블로탄(blatǫnn)'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었는데 전투 중에 부러진 이빨 대신 파란색 의치를 넣었기 때문이라는 설과 블루베리를 너무 좋아하여 항상 이빨이 파랗게 물들었기 때문이라는 설이 있다. 하랄 고름손 블로탄은 아버지가 완료하지 못한 덴마크 통일 사업이 완수하여 최초의 통일 덴마크의 왕인 하랄 1세로 즉위하였다. 또한 하랄 1세 블로탄은 아버지와 달리 그의 어머니인 티레의 영향으로 그리스도교에 대한 상당한 호감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960년경 직접 세례를 받고 그리스도교로 개종한 후 그리스도교를 덴마크의 국교로 선포하였다. [[하랄 1세 블로탄]]은 덴마크의 전통 신앙에 따라 이교도식으로 매장된 부모의 무덤 사이에 옐링 교회를 세우고 부모의 시신을 이장하였다. 그리고 부모인 고름과 티레 부부를 추모하기 위해 룬문자 비석을 세우게 되었다. 이는 아버지 고름이 티레를 추모하기 위해 세운 비석과 함께 '옐링 비석'이라고 불리며 1994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특히 고름이 세운 비석과 달리 하랄 1세 블로탄이 세운 비석에는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 그리스도가 새겨져 있어 하랄 1세 블로탄의 시대에 덴마크가 그리스도교 국가가 되었음을 알려주는 증거가 되었다. 덴마크를 통일하고 그리스도교화를 통해 국가 체제도 정비한 하랄 1세 블로탄은 이웃한 노르웨이로 영토를 확대하고자 했다. 당시 하랄 1세 블로탄의 누이인 건힐다와 결혼하였던 노르웨이 왕 에리크 1세가 그의 동생인 호콘 1세에게 축출당하고 954년 사망하면서 건힐다가 다섯 아들과 함께 친정인 덴마크에 와 있던 상황이었다. 하랄 1세 블로탄은 조카의 왕위를 되찾아 준다는 명분을 내세워 에리크 1세의 아들인 하랄 에리크손의 형제들을 앞세우고 노르웨이를 침공하였다. 전쟁 초기에는 노르웨이의 호콘 1세의 강력한 저항에 부딪쳤고 심지어는 호콘 1세가 일시적으로 유틀란트 반도로 반격을 해오기도 했으나 결국 961년 노르웨이의 남서쪽에 있는 피티아르 섬에서 싸우다 전사하면서 하랄 1세 블로탄의 최종적인 승리로 끝났다. 이후 하랄 1세 블로탄은 에리크 1세의 아들 중 장남인 하랄 에리크손을 노르웨이 왕 하랄 2세로 즉위시키고 노르웨이를 덴마크의 속국으로 삼았다. 그러나 노르웨이의 왕이 된 하랄 2세의 실질적인 통치력은 노르웨이의 서부 지역 일대에만 머물러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하랄 2세는 자신의 권력을 강화시키기 위해 오슬로의 지방 영주인 트뤼그비 울라프손과 구드라드 비아른손, 그리고 라데 백작(Jarl of Lade)인 시구르드 호콘손을 살해하였고 전통 신앙 숭배도 금지시켰다. 이에 따라 노르웨이에서 하랄 2세에 대한 반감이 퍼져 나갔고 덴마크 왕 하랄 1세 블로탄 역시 하랄 2세가 덴마크의 종주권에서 벗어나려는 것은 아닌 지 의심하기 시작했다. 이때 하랄 2세에게 살해당한 시구르드 호콘손의 아들인 새로운 라데 백작 호콘 시구르드손이 970년 하랄 1세 블로탄의 묵인을 얻어 하랄 2세를 암살하는 일이 벌어졌다. 이후 노르웨이에서는 덴마크의 지원을 받은 라데 백작 호콘과 하랄 2세의 형제들 사이에 내전이 벌어졌으나 덴마크의 하랄 1세 블로탄의 지원을 받은 라데 백작 호콘이 최종적으로 승리하였다. 그리고 하랄 1세 블로탄은 노르웨이의 남동부를 덴마크의 영토로 합병하며 직접 통치하였으나 노르웨이 서부 지역은 라데 백작 호콘을 봉신으로 임명하여 간접적으로 통치하였다. 이렇게 하여 하랄 1세 블로탄이 덴마크와 노르웨이를 아우르는 제국을 건설하였고 그의 별명인 '블로탄(푸른 이빨)'은 오늘날 근거리 무선 기술 표준인 '블루투스(Bluetooth)'의 어원이 되었다. 노르웨이의 왕위까지 차지한 하랄 1세 블로탄은 이제 신성 로마 제국의 종주권에서 벗어나고자 하였고 973년 신성로마황제 오토 1세가 사망하고 그의 아들인 오토 2세가 즉위하자 이듬해인 974년 신성 로마 제국에 대한 반란을 일으켰다. 비록 하랄 1세 블로탄은 노르웨이의 호콘의 지원까지 받아 호기롭게 독일 국경 너머로 침공하였지만 다네비르케 전투에서 패배하고 말았다. 이 때문에 하랄 1세 블로탄은 유틀란트 반도를 상실한 채 덴마크령 노르웨이로 도망쳐야 했고 노르웨이 서부 지역에 대한 통제권도 상실하여 라데 백작 호콘이 실질적인 노르웨이의 군주가 되었다. 비록 하랄 1세 블로탄은 983년 훗날 메클렌부르크를 지배하게 되는 북방 슬라브족인 오보트리테와 동맹을 맺고 신성 로마 제국 세력을 몰아내며 유틀란트 반도를 되찾는 데 성공하지만 이듬해 아들인 스벤 1세의 반란으로 인해 살해당하고 만다. [[스벤 트베스케그|스벤 1세]]가 덴마크 왕이 되었을 때 잉글랜드에 대한 바이킹 일파인 데인족의 침공이 대대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었는데 그 중에서 노르웨이 출신인 울라프 트뤼그비손이 두각을 나타내었다. 울라프 트뤼그비손은 노르웨이의 왕 하랄 2세에게 살해당했던 트뤼그비 울라프손의 아들로 전설에 따르면 아버지가 죽은 이후 어머니 아스트리드와 함께 러시아의 키예프 대공인 블라디미르 1세의 궁정에서 바이킹의 전사로 자라났다고 한다. 이후 울라프 1세는 바이킹의 수장이 되어 프랑스와 아일랜드, 잉글랜드의 해안 일대를 습격하며 공포의 대상으로 군림하였다. 스벤 1세는 994년 울라프 트뤼그비손과 함께 잉글랜드의 노섬브리아를 침공하여 잉글랜드 왕 애설레드 2세로부터 매년 막대한 공물을 제공받는 조건으로 강화 조약을 체결하였다. 그리고 울라프 트뤼그비손은 애설레드 2세와 함께 잉글랜드의 앤도버에서 그리스도교의 견진성사를 받고 애설레드 2세의 대부가 되었다. 한편 덴마크의 하랄 1세 볼로탄 시절에 독립하였던 노르웨이는 통치권을 장악한 라데 백작 호콘이 점차 오만하게 굴면서 각지에서 반란이 들끓었고 결국 995년에 호콘이 부하들에게 암살당하고 말았다. 그리고 노르웨이가 반란으로 혼란스러워졌다는 소식을 들은 울라프 트뤼그비손은 노르웨이로 귀국하였고 라데 백작 호콘이 암살당하자 자신의 지지자들을 규합하여 노르웨이의 왕위를 차지하고 울라프 1세로 즉위했다. 그리고 열렬히 그리스도교 포교에 나서 노르웨이 서부 해안 지방과 인근 섬인 페로 제도, 셰틀랜드 제도, 오크니 제도 및 아이슬란드와 그린란드에 그리스도교를 전파하였으나 앞선 노르웨이 왕들과 마찬가지로 울라프 1세도 노르웨이 내륙 지방에 대해서는 거의 통치력을 행사하지 못했고 그리스도교도 전파하지 못했다. 무엇보다 울라프 1세의 가장 큰 위협은 덴마크의 스벤 1세였다. 스벤 1세는 부왕인 하랄 1세 볼로탄 시절의 노르웨이 통치권을 되찾고자 하였고 이를 위해 스웨덴 왕 울라프 3세 쇠트코눙 및 호콘의 아들인 라데 백작 에리크 호코나르손과 동맹을 맺었다. 995년 [[에이리크 6세]]가 사망하면서 스웨덴의 울로프 3세 쇠트코눙이 [[스웨덴 국왕]]으로 즉위했다. 초기 북유럽 역사를 기록한 브레멘 주교의 아담에 의하면 에이리크 6세가 994년 덴마크 국왕 스벤 1세를 잉글랜드로 내쫓고 995년 사망할 때까지 덴마크를 지배했지만 에이리크 6세가 사망하자 스벤 1세에게 덴마크를 빼앗겼다고 한다. 그리고 이제 울로프 3세 쇠트코눙이 덴마크 왕위를 두고 다투게 되었지만 울로프 3세 쇠트코눙의 어머니이자 에이리크 6세의 미망인인 시그리드가 스벤 1세와 재혼하면서 화해하였다고 기록했다. 그러나 에이리크 6세가 덴마크를 지배했다고 한 시기에 스벤 1세는 잉글랜드로 쫓겨난 것이 아니라 잉글랜드를 공격하고 있었기 때문에 브레멘 주교 아담의 기록은 그 사실성을 의심받고 있다. 어쨌든 울로프 3세 쇠트코눙와 덴마크의 스벤 1세의 동맹은 사실로 보이는데 실제로 스벤 1세가 노르웨이의 올라프 1세 트뤼그비손을 몰락시키는 데 동참했다. 1000년 노르웨이의 올라프 1세가 벤드족의 땅인 [[포메른]]을 습격하고 노르웨이로 되돌아가는 것을 노려 덴마크의 스벤 1세는 스웨덴의 울로프 3세 쇠트코눙 및 라데 백작 에리크 호코나르손과 연합하여 공격을 개시했다. 이렇게 벌어진 스볼데르 전투에서 올라프 1세는 11척으로 총 70척을 상대해야 하는 절망적인 상황에 놓였고 결국 라데 백작 에리크에게 생포되어 바다에 던져졌다. 이후 비록 라데 백작 에리크가 노르웨이의 통치를 위임받았고 겉으로는 종주권을 덴마크와 스웨덴이 양분했고 울로프 3세 쇠트코눙이 노르웨이의 트뢰넬라그를 획득하는 대신에 덴마크의 스벤 1세가 노르웨이의 실질적인 지배자가 되었다. 이후 스벤 1세는 다시 잉글랜드로 관심을 돌렸다. 그러던 중 잉글랜드에서 덴마크에 보내야 하는 막대한 공물 때문에 데인세라는 이름으로 중과세가 시행되고 이에 신음하던 잉글랜드인의 불만이 팽배해지자 1002년 111월 13일 성 브리아스 축일을 기해 잉글랜드 왕 애설레드 2세가 데인족에 대한 대학살을 명령했다. 이 학살에 자신의 누이가 포함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스벤 1세는 격분하여 잉글랜드에 대한 대대적인 공격을 감행하였다. 그리고 비록 1003년과 1004년 잉글랜드를 대대적으로 침공했으나 정복에 실패한 후 한동안 원정을 중지했으나 1013년에 아들 크누드를 데리고 다시한번 대규모 원정군을 이끌고 잉글랜드로 향하여 이번에는 대승을 거뒀다. 잉글랜드의 애설레드 2세는 [[프랑스 왕국]]의 [[노르망디]]로 도망쳤고 스벤 1세가 1013년 크리스마스에 잉글랜드 왕으로 선포되었다. 스벤 1세는 덴마크, 노르웨이, 잉글랜드의 3개국을 지배하게 되었지만 얼마지나지 않아 1014년 2월 사망하고 말았다. 그리고 비록 스벤 1세가 사망당시 [[크누트 대왕|크누드]]를 자신의 후계자로 지명했지만 덴마크 귀족들은 스벤 1세의 장남인 [[하랄 2세]]를 덴마크 왕으로 세웠고 노르웨이에서는 최초의 노르웨이 왕 하랄 1세의 후손 올라프 하랄드손에게 1015년 노르웨이 왕위를 계승시켰다. 또한 잉글랜드인들도 크누드의 왕위 계승을 인정하지 않고 스벤 1세에 의해 축출된 애설레드 2세를 귀국시켜 다시 왕으로 옹립했다. 크누드는 스벤 1세의 사망 이후 일단 잉글랜드를 떠나 덴마크로 갔지만 형의 덴마크 왕위 계승을 인정하고 1015년 잉글랜드로 되돌아와 1016년 노섬브리아를 장악하고 웨식스로 진군하였다. 1016년 4월 애설레드 2세가 사망하자 웨식스의 수석 고문들과 귀족, 교회인들의 회의인 위턴회의(Witenagemot)는 크누드를 막아낼 수 없자 전쟁의 참화를 피하기 위해 크누드를 왕으로 선출했으나 런던에서는 이 결정을 따르지 않고 애설레드 2세의 아들인 에드먼드 2세를 자신의 왕으로 옹립했다. 이에 크누드와 에드먼드 2세가 전쟁을 벌였고 에드먼드 2세가 '용맹왕(Ironside)'이라는 별명처럼 한때 크누드를 거세게 몰아붙였으나 결국 1016년 10월 18일 에식스의 에싱턴 전투에서 크누드가 대승을 거두었다. 그리고 크누드와 에드먼드 2세가 강화조약을 체결하고 웨식스는 에드먼드 2세가 통치하는 대신에 나머지 노섬브리아와 머시아는 크누드의 차지가 되는 합의가 이루어졌으나 에드먼드 2세가 같은 해 11월 급사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크누드가 잉글랜드 전체의 왕이 될 수 있었다. 크누드는 잉글랜드 사람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 애설레드 2세의 미망인인 노르망디의 엠마와 결혼하였고 그 대신 애설레드 2세와 엠마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들은 노르망디에서 사는 조건으로 살려주었다. 이렇게 하여 살아남은 아이 중에는 나중의 참회왕 에드워드도 포함되어 있었다. 1018년 하랄 2세가 사망하면서 크누드는 덴마크 왕위까지 계승하게 되었으나 덴마크에서 크누드의 왕위계승에 반대하는 귀족들이 포메른의 벤드족과 동맹을 체결하자 1019년 잉글랜드 군을 이끌고 덴마크로 향하여 반대파를 일소하였다. 그리고 여동생 [[에스트리드 스벤스다테르|에스트리드]]와 결혼한 울프 야를을 덴마크의 섭정으로 임명하고 재혼한 노르망디의 엠마로부터 얻은 [[하레크누드]]를 덴마크의 왕위 계승자로 선포한 뒤 1022년 잉글랜드로 귀환하였다. 1022년 스웨덴 왕 울로프 쇠트코눙이 사망하고 그의 아들인 아눈드 3세 야코브가 새로운 스웨덴의 왕이 되었다. 아눈드 3세 야코브는 부왕 울로프 3세 쇠트코눙과 마찬가지로 노르웨이의 올라프 2세와 동맹관계를 유지하였다. 노르웨이의 올라프 2세의 지원을 받은 아눈드 3세 야코브가 덴마크까지 위협하기 시작하자 덴마크 섭정 울프 야를이 1026년 반란을 일으켜 크누드의 어린 아들인 하레크누드를 왕위에 올리는 일이 일어났다. 이에 잉글랜드군을 이끌고 다시 덴마크로 돌아온 크누드가 울프 야를을 제압하였고 같은 해 벌어진 스웨덴-노르웨이 함대를 상대로 벌인 헬게 강 전투에서 승리를 거뒀다. 그리고 1028년 노르웨이 지주들을 매수하여 노르웨이 왕인 올라프 2세에 대한 반란을 일으키게 만든 후 노르웨이 왕위까지 차지했다. 이렇게 하여 크누드는 잉글랜드-덴마크-노르웨이의 3개국 왕위를 모두 차지하면서 북해를 내해로 가지는 '북해 제국(North Sea empire)' 혹은 '앵글로-스칸디나비아 제국'이라고 불리는 대제국을 건설하는 데 성공했다. 이 때문에 크누드에게는 '대왕(the Great)'라는 칭호가 붙었다. 크누드는 흘라티르의 에리크의 아들인 호콘 에릭손을 노르웨이 섭정으로 삼았으나 호콘이 1030년 사망했기 때문에 크누드의 첫번째 왕후 앨프지푸에게서 낳은 아들인 스벤을 노르웨이의 왕으로 임명했다. 같은 해 러시아로 망명을 떠난 올라프 2세가 스웨덴 왕 아눈드 3세 야코프의 지원을 받아 노르웨이 회복을 노렸지만 스티클레스타 전투에서 패배하고 전사하였다. 그러나 올라프 2세는 노르웨이에 그리스도교를 널리 전파시킨 공을 인정받아 성인으로 추증되었을 정도로 노르웨이 사람들에게 여전히 많은 신망을 얻었고 이 덕분에 [[키예프 루스]]로 망명을 떠나 있던 그의 아들인 [[망누스 1세|망누스]]가 나중에 재기에 성공했다. 한편 크누드는 노르망디의 엠마와 결혼하고 엠마만 합법적인 왕후로 인정하면서 그녀의 소생인 하레크누드 만이 합법적인 왕위 계승권자가 되었고 첫 번째 왕후였던 앨프지푸의 아들들은 모두 서자로 격하되었기 때문에 분쟁의 불씨를 남겨두고 말았다. 비록 크누드가 엠마 소생인 하레크누드를 덴마크의 왕위 계승자로 선포하였지만 이미 앨프지푸의 아들인 스벤이 노르웨이 왕이 되었고 앨프지푸의 또 다른 아들인 해럴드가 머시아 백작 레오프릭의 지지를 받아 잉글랜드 내에서 상당한 세력을 키우고 있었다. 이 때문에 1035년 크누드가 사망하자 그의 제국은 아들들의 내분으로 무너져 내리고 만다. 크누드가 죽은 이후 [[하레크누드]]는 덴마크의 왕위만 문제없이 계승하였을 뿐 잉글랜드는 머시아 백작 레오프릭의 지지 아래 앨프지푸의 아들인 해럴드가 섭정이라는 이름으로 사실상 통치권을 장악하였다. 더구나 노르웨이의 왕으로 임명되었던 스벤이 올라프 2세의 아들인 [[망누스 1세]]에게 쫓겨나면서 하레크누드는 노르웨이의 망누스 1세 때문에 잉글랜드에는 신경쓸 겨를이 없었다. 이 틈을 타고 해럴드가 1037년 하레크누드와 그의 모후인 엠마를 지지하던 웨식스 백작 고드윈을 추방하고 잉글랜드 남부의 귀족들까지 모두 제압한 뒤 스스로 잉글랜드 왕이 되었다. 이렇게 하여 크누드가 수립했던 북해 제국이 완전히 붕괴되었다. 한편 노르웨이 왕이 된 [[망누스 1세]]는 본래 노르웨이 국왕 올라프 2세와 잉글랜드 출신 [[노예]]인 알프힐드 사이에서 태어난 사생아였다. 망누스 1세가 4살에 불과한 나이에 올라프 2세는 크누드에게 폐위당하여 스웨덴 국왕 아눈드 3세 야코브의 도움을 받아 키예프 루스로 망명을 떠났다. 이후 키예프 루스에서 성장하였으나 1035년 크누드가 사망하고 그의 아들인 스벤 크누드손이 노르웨이 왕위를 상속받게 되자 그의 지배를 원치 않았던 노르웨이 귀족인 아이나르 탐바르스켈피르와 칼프르 아르네손이 망누스 1세를 왕으로 옹립하고자 했다. 11살의 망누스 1세가 이를 위해 스웨덴으로 향했고 망누스 1세의 아버지인 올라프 2세를 지원했던 스웨덴 왕 아눈드 3세 야코브로부터 이번에도 도움을 받아 노르웨이 왕위에 오르는 데 성공했다. 크누드의 아들인 스벤이 노르웨이에서 쫓겨난 뒤 얼마 지나지 않아 사망했다. 이후 하레크누드가 노르웨이를 다시 합병시키기 위해 전쟁을 벌였으나 1039년까지 결판이 나지 않았다. 이에 덴마크의 하레크누드와 노르웨이의 망누스 1세는 서로 협상을 가지고 둘 중 더 오래 사는 사람이 덴마크와 노르웨이의 왕위를 모두 차지하기로 합의했다. 그리고 1040년 잉글랜드에서 [[해럴드 1세]]가 급사하자 하레크누드가 잉글랜드 왕위를 되찾기 위해 떠났으나 1042년 하레크누드도 잉글랜드에서 사망하고 말았다. 이후 잉글랜드 왕위는 하레크누드와 어머니가 같고 아버지가 다른 형제이자 애설레드 2세의 아들인 [[참회왕 에드워드]]가 이어받아 앵글로-색슨 왕조를 부활시켰고 덴마크 왕위는 하레크누드와의 사전 약속에 따라 망누스 1세의 차지가 되었다. 이후 망누스 1세는 크누드의 누이 동생인 에스트리드와 울프 야를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자 울프 야를이 반란에 실패하여 크누드에게 살해당한 이후 스웨덴으로 망명을 떠나 있던 스벤을 귀국시켜 덴마크 부왕으로 임명하였다. 그리고 북해 제국을 재건하기 위해 망누스 1세가 잉글랜드 왕위도 요구하고 나섰으나 포메라이나의 벤드족과 전투를 벌이는 동안 스벤이 덴마크 귀족들의 지지를 받아 반란을 일으켜 [[스벤 2세 에스트리드센]]으로 덴마크 왕위에 오르면서 더이상 잉글랜드에 신경쓸 수 없게 되었다. 망누스 1세는 스벤 2세를 연이어 격파하고 스웨덴으로 쫓아냈으나 동로마 제국에서 용병으로 활약한 망누스 1세의 숙부인 하랄 시구르손이 1045년 노르웨이로 귀국하여 노르웨이 동부 지역을 요구하고 나서며 스벤 2세와 연대를 도모했다. 이에 망누스 1세는 어쩔 수 없이 하랄 시구르손을 노르웨이의 공동왕 하랄 3세로 인정해야만 했다. 이 때부터 노르웨이는 공동왕 즉위가 관행이 되었다. 그리고 망누스 1세가 다시 덴마크 공격에 나섰지만 1047년 갑자기 사망하고 말았다. 망누스 1세가 사망하자 노르웨이 왕위는 하랄 3세가, 덴마크 왕위는 스벤 2세가 각각 차지하게 되었지만 이후로도 노르웨이와 덴마크의 전쟁은 15년간이나 계속되었다. 그 사이 스웨덴에서도 1050년경 아눈드 3세 야코브가 사망하고 그의 이복 형인 에문드 2세가 왕위를 계승했다. 하지만 에눈드 2세는 선왕인 아눈드 3세 야코브보다도 나이가 많아 노왕이라고 불렸고 더욱이 그의 아들인 아눈드 에문드손이 요절하고 에문드 2세도 재위 10년만인 1060년에 사망하면서 문쇠 왕조가 단절되고 말았다. 이제 스웨덴은 에문드 2세의 사위인 스텐킬에 의한 스텐킬 왕조가 새롭게 시작되었지만 내정 정비 때문에 노르웨이와 덴마크의 전쟁에 개입할 수 없었다. 그리고 노르웨이와 덴마크의 전쟁은 덴마크의 스벤 2세가 노르웨이의 하랄 3세에게 패배를 거듭했지만 하랄 3세가 약탈에만 몰두하면서 덴마크를 끝내 정복하지 못했다. 결국 1062년 니즈 전투를 끝으로 둘은 상대방을 각국의 군주로 인정하였고 1064년 강화조약을 체결하였다. 한편 잉글랜드에서 참회왕 에드워드가 1066년 1월 사망하고 고드윈 백작 해럴드 2세가 왕위를 차지하였으나 그의 동생인 토스티그가 반기를 들었다. 하랄 3세는 토스티그를 지원하여 대대적으로 잉글랜드를 공격하였으나 1066년 9월 스탐퍼드브리지 전투에서 패배하고 하랄 3세도 전사하고 말았다. 하랄 3세가 죽자 그의 두 아들인 울라프 3세와 망누스 2세가 공동으로 노르웨이를 통치하게 되었다. 그런데 하랄 3세의 잉글랜드 침공은 예기치 않게 해럴드 2세를 유인한 셈이 되었는데 하랄 3세가 잉글랜드를 침공한 지 한달 후인 1066년 10월 노르망디 공작 기욤 2세가 헤이스팅스 전투에서 해럴드 2세를 격파하고 잉글랜드 왕 윌리엄 1세로 즉위하는 노르만 정복이 일어난다. 하랄 3세가 사망한 이후 덴마크의 스벤 2세는 더이상 위협당할 일이 없어졌고 1068년 노르웨이와와 평화조약을 체결했다. 그리고 스벤 2세도 잉글랜드를 욕심내어 1069년 잉글랜드 왕 에드먼드 2세의 손자인 에드가 애설링의 반란을 지원하였으나 이듬해 윌리엄 1세와 협정을 맺고 군대를 철수시켰다. 이후 스벤 2세는 꾸준히 왕권 강화를 추진하였고 스칸디나비아 총대주교구를 세울 야심을 가진 함부르크-브레멘 대주교 아달베르트의 영향으로 덴마크 교회가 독일인 성직자로 채워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잉글랜드에서 앵글로-데인족 성직자를 대거 데려오기도 하였다. 스벤 2세는 1060년 덴마크 교회를 8개의 교구로 나누며 주교구를 정비하였고 1072년 함부르크-브레멘 대주교 아달베르트가 사망하면서 덴마크 교회의 독립을 유지할 수 있었다. 참고로 스벤 2세는 브레멘 주교인 아담과도 친분이 있어 그가 북유럽의 초기 역사를 기록한 "함부르크-브레멘 대주교구의 역사"를 저술할 때 많은 정보를 제공하기도 했다. 1074년 덴마크 왕 스벤 2세가 사망하고 그의 아들인 [[하랄 3세]]가 왕위를 계승했다. 그러나 하랄 3세는 자신을 왕으로 선출해준 덴마크 귀족들에게 휘둘려야 했고 왕위를 노리는 이복동생들도 견제해야만 했다. 이 때문에 하랄 3세는 대외 영토 확장보다는 내부적으로 왕권을 강화하는 데 온 힘을 기울여야 했다. 그러나 하랄 3세는 1080년 사망하였고 이후 하랄 3세에게 추방당하여 스웨덴에 머물던 그의 이복동생인 크누드가 [[크누드 4세]]로 덴마크 왕위를 이어받았다. 크누드 4세는 적극적으로 그리스도교를 장려하여 교회의 권위를 강화시키고 십일조를 강화했으며 이를 바탕으로 왕권을 신장시키고자 하였다. 1085년 크누드 4세는 잉글랜드를 침공하고자 농민들을 징집하고 함대를 준비했으나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하인리히 4세]]가 덴마크 남부의 슐레스비히를 위협했기 때문에 잉글랜드로 향하지 못했다. 이후 추수기가 도래하면서 징집된 농민들이 해산을 요구하기 시작했고 크누드 4세의 이복 동생인 올루프가 이들의 입장을 대변하고 나섰다. 이 때문에 올루프는 플랑드르로 추방당했으나 결국 군대는 해산할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1년 뒤 크누드 4세가 다시 군대를 소집하고 했으나 이에 반발한 농민 반란이 일어나면서 살해당하고 만다. 그리고 플랑드르로 추방당했던 올루프가 자신의 동생인 [[닐스(덴마크)|닐스]]를 플랑드르에 인질로 맡긴 뒤 귀국하여 다른 이복동생인 에리크를 추방하고 [[올루프 1세]]로 왕위를 이어받는데 성공했다. 올루프 1세의 치세는 계속된 흉년으로 얼룩졌기 때문에 [[덴마크인]]들은 "교회에 헌신했던 크누드 4세를 살해한 것에 대한 천벌을 받는 것"이라는 생각이 퍼졌다. 더욱이 [[오덴세]]에 있던 크누드 4세의 무덤에서 기적이 일어났다는 소문까지 퍼지면서 크누드 4세에 대한 공경심이 일어났고, [[성인(기독교)|성인]] [[시성]]까지 추진되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올루프 1세는 1095년에 의문의 죽음을 맞이했고 이후 그의 동생으로 왕위에 오른 [[에리크 1세]]가 1101년에 [[로마]]를 직접 방문하여 [[교황]] [[파스칼 2세]]로부터 크누드 4세의 성인 시성을 승인받는데 성공하게 된다. 이를 계기로 1104년 지금의 스웨덴 남부 [[스코네]]에 [[룬드]] 대주교구가 수립되었고 이로서 덴마크 교회를 비롯한 스칸디나비아 교회들이 함부르크-브레멘 대주교구에서 독립하게 되었다. 이후 에리크 1세는 갑자기 성지 예루살렘으로 순례를 떠났고, 1103년 키프로스 섬에서 병을 얻어 사망하게 된다. 에리크 1세가 병사한 이후 그의 동생으로 동행하고 있던 스벤이 왕으로 선출되지만 귀국 도중에 마찬가지로 병사하자 플랑드르에 올루프 1세 대신에 인질로 붙잡혀 있던 다른 동생인 [[닐스(덴마크)|닐스]]가 귀국하여 1104년 덴마크 왕위를 이어받았다. [[스벤 2세 에스트리드센]]의 아들로서 5번째 왕위 계승이었다. 그리고 이듬해인 1105년 스웨덴 왕 잉에 1세의 딸인 마르가레타와 결혼하였는데 그의 아들인 망누스가 1125년 스웨덴 왕위를 이어받아 망누스 1세로 잠시 즉위하게 된다. 그 대신에 에리크 1세의 적자이자 닐스의 조카인 남부 유틀란트(슐레스비히) 공작 크누드 라바르가 유력한 덴마크 왕위계승 후보자로 손꼽히게 되지만 1130년 마르가레타가 사망하면서 망누스도 폐위당하고 만다. 비록 닐스가 즉위한 이후 초기 27년간은 평화로왔지만 이제 닐스의 아들인 망누스와 조카인 크누드 라바르 사이에 갈등이 일어나면서 내전의 기운이 감돌기 시작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