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도겸(삼국지) (문단 편집) == 평가 == 연의에선 유비에게 서주를 물려줬다는 것 때문인지 선역으로만 묘사되나 정사에서는 평이 꽤나 복잡하다. [[자치통감]]에서는 "도겸은 서주의 지배자이자 의로써 충성을 다한 인물이다. 그가 어찌 궐선의 몇 천 무리와 손을 잡았겠는가?"라고 평가했고 삼국지 주석 오서에서도 도겸을 강직하고 절개가 있다 평하며 연의와 비슷한 평가를 냈지만 후한서나 정사 삼국지에서는 반대로 입에 거품물며 죽어라 도겸을 비판하는 모양새. 정사 삼국지의 특성상 서주 대학살이라는 죄업을 약간이라도 줄여내려는 것일 수도 있지만 그와는 별개인 후한서에서도 우호적인 서술은커녕 부정적인 서술이 주로 존재한다.[* 만들어진 시기상 조위의 압박을 완전히 배제할 수 없던 정사 삼국지야 그렇다치더라도 조조의 숙적이던 원소에 대해서도 호평할건 호평하는등 조위의 입김을 신경쓰지 않은 후한서에서도 마찬가지의 서술이 있다는 점에서 교차검증이 어느정도 이루어진 셈. 역사상 도겸이 서주자사가 된 건 동탁이 한창 중앙정부를 휘하 부리듯 다룰 시절이였고 이 당시 관직이라는게 결국 매관매직이었음을 고려하면 사실상 동탁에게 뇌물을 준 격이 된 도겸을 아니꼽게 봤을 수도 있긴 하다.] 정사에서의 도겸의 언급을 보면 병약하고 늙은 선비로만 묘사되는 연의와 달리 나름대로 문무를 겸비한 호걸로서, 유생으로서 효렴으로 천거된 이후 출사할 때 군무에서도 활약했다는 등 단순한 선비와는 일선을 긋고 있다. 거기에 장반의 일화에서 보듯 젊은 시절부터 자존심이 강했고 아무리봐도 '좋은 사람'이라고 단언하긴 힘든 성격이었으며 정치적 야심과 카리스마가 강했다. 즉 난세 초기에 서주의 지배자로 있을 정도의 재량은 있던 인물인 셈. 심지어 원술과 공손찬이 각각 무너지기 전의 한때엔 이 둘과 동맹해서 원소, 조조 세력에 맞섰는데 그 조조조차 함부로 넘볼 수 없을 정도로 강성한 세력 중 하나였으며[* 다만 이 때 조조는 스스로도 원소의 부하라는 이미지를 쉽사리 떼놓지 못할 정도로 그 영향력이 큰 편은 아니었다. 다만 영향력과 별개로 실력은 이때도 역시 명불허전이였는데, 대표적으로 저 연합의 실질적인 맹주였던 원술의 침공을 패퇴시킨 게 있다.] 자신이 통치하는 서주만이 아니라 인접한 연주, 예주, 양주에 두루 영향력을 미칠 정도였다.[* 정확히는 각 주의 인접지방인 연주의 태산군, 패국, 그리고 본인의 고향인 단양과 그의 치중인 왕랑이 태수로 있던 회계까지 영향력이 미쳤다고 볼 수 있고 아예 태산군의 화현과 비현, 임성국은 본인이 점령하기까지 했다. 조조의 부친 조숭이 죽은 곳도 태산군이었다.] 또 [[헌제|천자]]가 [[동탁]]에 의해 강제로 장안으로 수도를 옮기고 제후들과의 연락을 끊었을 때, 왕랑의 조언에 따라 도겸은 샛길로 공물을 바쳐 안동장군과 서주자사로 승진하였고 율양후에 봉해졌던 사실을 문제로 삼는 이들이 있는데, 이는 동탁이 집권하여 폐쇄적인 상황이 되어버린 중앙정권에 근왕을 하지 못하니 공물을 보낸다는 것을 명분으로 삼아 도겸이 서주에서 이룩한 공로와 서주의 사회에서 그가 가지고 있던 정치적 입지를 황제에게 공식적으로 승인을 받은 것이다. 동탁이 패망한 다음 [[이각]]과 [[곽사]]가 집권했을 때 도겸은 [[주준]]을 태사로 삼도록 추천하였고 이각 등을 토벌하여 천자를 맞이하려고도 했다. 조조보다도 먼저 협천자를 시도한 것이다. 즉, 도겸은 한황실을 중요하게 여기고 있었고, 무엇보다도 그는 '''황제의 중요성을 알고 있었다'''는 셈이다. 이보다 이전에 반동탁연합이 궐기할 당시 영천에 있던 주준을 맹주로 받들어 동탁에게 대항한 것을 생각하면 도겸은 확실히 천자가 지닌 상징성이 당시 사회에서 어떤 기능을 하는지를 꿰고 있었다. 그리고 무작정 동탁에 굴종한 것도 아니었다. 위에서 언급했듯이 반동탁연합군에는 처음에 참여하지 않았으나 동탁이 수도인 낙양을 태운 뒤 연합군을 막을 병력을 주둔시켜두는데 그 주둔군의 사령관이 다름 아닌 황건봉기 당시 공을 세웠던 [[주준]]이었다. 주준은 자진해서 낙양에 남아있었는데, 병력을 인솔해 주둔군을 장악하고 동탁에게 반기를 들었고 이에 동탁은 이각, 곽사 등을 보내서 주준을 공격했다, 병력 차가 심했던 것인지 주준은 이각과 곽사 등에 밀려 연주와 예주 사이로 후퇴하게 되는데 여기서 가만히 있던 도겸과 [[공융]]이 제각각 병사와 물자를 보내 주준을 지원, 원소 등의 연합군이 와해된 뒤에 한동안 주준을 중심으로 한 반동탁연합군이 유지되기까지 했다. 한황실을 중시했던 만큼 한황실을 쥐고 흔드는 동탁을 가만히 보고 있지만은 않았다는 것이다. 후일 서주를 구원한 방계 중 방계황족인 유비에게 서주를 넘긴건 이런 원인도 분명히 있었을 것이다. 도겸이 서주에 대한 지배권을 [[유비]]에게 이양한 것은 엄연한 사실이다. 당시 서주의 주요 호족이나 주요 관료들([[미축]]과 [[진등]] 등)이 유비를 지지했다. 도겸 스스로도 미축에게 "유비가 아니면 서주를 안정시킬 수 없다." 고 했다는 점을 고려하면 당시 서주에는 유비를 지지하는 여론이 폭넓게 퍼져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러한 조치로 조조가 서주를 칠 명분을 없앨 수도 있었다. 그러나 모든 도겸 휘하 세력들이 단합하여 유비를 지지한 것은 아니었다. 그 가운데 [[조표(삼국지)|조표]]는 소패의 진궁, 여포와 내통하여 유비가 함양의 원술과 싸우러 출정하였을 때 성문을 그들에게 내주었을 정도로 유비를 인정하지 않았다. 아무튼 유비는 도겸을 도운 일로 인하여 잃은 것이 하나도 없고[* 사실 이때는 몰랐지만 잠재적으로 얻은 이득은 [[제갈량|어마어마했다.]] 초장기적 투자로 복권에 당첨된 수준.] 오히려 [[조조의 서주 침공|서주 대학살]]로 인하여 조조야말로 민심을 크게 잃었다. [[조숭]]을 죽였다고는 하지만, 후대를 하다가 부하가 욕심을 내서 조숭을 살해하여 오해를 덮어쓰게 된 연의와는 상황이 좀 다르다. 역사적으로는 조숭 살해 당시, 당시 정세는 원소와 조조의 연합과 원술, 도겸, 그리고 [[공손찬]]의 연합이 대립하였다. 193년 가을 이전에 조숭이 장개에게 살해당했다. 조조가 서주를 침략했으나 군량이 부족해 군대를 잠시 물렸다. 조조는 다시 서주를 침공하였으나 [[여포]]가 반격하여 퇴각하였는데, 조조의 군세가 돌아가며 일으킨 서주 군민들에 대한 무단학살이 벌어진 때는 진수의 삼국지와 자치통감 그리고 후한서의 기록이 다르다. [[일본]]의 삼국지 창작물들에는 도겸이 마치 대대로 서주를 다스린 것마냥 묘사되어 있기도 한데,[* 물론 애초에 봉건제가 아닌 한나라에서 대대로 한 가문이 지역의 지배자로 지낸다는건 변방의 몇몇 경우를 빼면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실제로 도겸은 [[황건적]]을 토벌하면서 서주를 세력권으로 삼아 당대에 군벌로 성장한 것이다. 즉 도겸 역시 당대의 호걸이자 효웅이라고 볼 수 있다.[* 애초에 한나라 조정의 권위가 살아있던 시절에는 무슨 봉건영주처럼 한 지방을 다스리다 자식에게 물려주는 것은 불가능했다. 현대와 비교할 수는 없지만 당시 한나라의 중앙집권제는 시대상을 감안하면 상당한 수준까지 발달해 있었고, 각 지방을 다스리는 것은 세습적 봉건영주가 아닌 황제가 임명한 관리였던 것. 이 점은 일본인들에게 익숙한 일본 시대물의 영향을 받아, 그리고 선량하고 유약하고 늙은 군주인 도겸의 이미지를 위해 왜곡된 묘사라고 보아야 한다. 유비에게 서주를 스르륵 물려주는 역할로는 서주를 쟁탈한 효웅보다는 훨씬 이미지에 맞는 것이다.] 그리고 당시 많은 유민들과 백성들이 곡식을 풍족히 축적한 도겸에게 의탁하고 있었다, 적어도 연의에서처럼 백성들에게는 괜찮은 군주였던 셈이다. 한 마디로 도겸은 한나라의 충신이면서 동시에 야심가이기도 했다. 인재 등용을 중요시했으면서도 소인배들과 친하게 지냈다. 또 한편으로는 유민이 된 백성들을 돌보는 훌륭한 목민관이기도 했다. 어쨌건 이런 저런 한계점은 분명 존재하지만 그 존재감을 무시할 만한 사람은 아니다. 조조의 업적 중 하나라고 알려진 둔전제를 처음으로 시행한 사람이 도겸이라는 재미있는 설이 존재한다. 도겸은 삼보의 난 전후로, 도겸은 갑작스럽게 발생해 서주 내로 이주하기 시작한 수백만의 난민과 그 원인인 기근의 간접적인 영향을 받아 식량 문제를 해결하고자 당시 동양현의 장을 지내고 있던 진등을 전농교위로 삼아 둔전을 진행하도록 했다. 물론 그 이전인 192년에 조조 진영에서 모사인 [[모개]]에 의해 경작지 문제에 대한 논의가 있었으나, 조조가 둔전을 본격적으로 시작한 것은 194~5년쯤 즉 조조는 논의에 그쳤던 둔전을 한 발 앞서서 진등을 통해 상당한 양의 벼와 보리 등을 비축하고 회복세에 들어간 셈인데 이 시기도 조조보다 한참이나 앞서 있었다. 다만 둔전의 개념은 그전부터 있었고 조조가 처음으로 실행한 것은 민둔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