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도교 (문단 편집) == 한국의 도교 == || [[파일:external/www.chondogyo.or.kr/238328603_x9wBosAY_BFEBB4E3C1A41.jpg|width=400]] || || 도교의 영향을 받은 신종교인 동학의 성지 경주 용담정.[[http://www.chondogyo.or.kr/bbs/board.php?bo_table=pds&wr_id=28&page=5|#]] || 한국의 도교에 대해서는 크게 자생설과 도입설, 중도설이 있다. 자생설은 중국의 도교가 들어오기 이전부터 한국의 자체적으로 독립 교단화된 도교가 존재했다는 것으로, 조선시대의 도교서적인 [[해동이적]]이나 [[청학집]][* 단, 청학집의 경우 [[환인]]과 [[헌원]]의 스승이 둘 다 중국 서방의 공동산의 선인 [[광성자]]라고 기록하고 있다.]에서 약간 등장하며, 일제시기 이능화의 <조선도교사>에서는 아예 이 주장을 중심으로 하고 있다. 다만 이 주장을 뒷받침하는 문헌들이 대부분 국내 문헌 위주의 주장인데다, 문헌 기록 해석에서 지나친 자의주의적 관점을 가진 점에서 문제가 있다고 보는 의견이 많다. 도입설은 중국의 도교 교단이 국내에 유입되면서 한국에 도교가 퍼졌다는 주장으로, 김부식의 [[삼국사기]]나 조선조 [[해동전도록]]에서 나타나는 주장이다. 그러나 원시도교의 성립기에 이민족 신앙의 영향을 배제하고, 중국 중심주의적인 해석이 강하다는 비판이 있다. 원시도교의 문헌인 [[태평경]]이나 [[포박자]]에는 위에서 언급한 대로 중국 주변 이민족의 샤머니즘 신앙이 도교 형성에 영향을 주었음을 암시하는 내용이 있고, 종교학적으로도 원시도교(방선도)는 이민족 신앙의 영향을 받았다는 것이 알려져 있다. 그래서인지 중국인들이 도교사를 언급할 때는 아직 완전한 종교의 형태를 갖추지 못했다면서 방선도 부분을 빼버리거나 대충 넘어가고 태평도와 오두미교부터 도교로 보는 경우가 많다 중도설은 현재 사학계/종교학계의 일반적인 주장으로, [[단군]]신화나 한국 토착신앙과 관련된 고고학 자료/역사기록 등을 토대로 우리나라에 자생적으로 존재하는 무속신앙/신선신앙/제천의식 등의 원시도교와 유사한 토착신앙이 존재했고, 이러한 신앙을 기반으로 중국에서 도입된 도교가 융합하여 현재 한국의 민간신앙/신종교의 근간이 되었다고 보는 주장이다. 현재까지 나온 설 중 가장 논리적이고 학술적인 뒷받침이 잘되어있는 설이라고 볼 수 있다. 문헌으로 가장 오래된 한국의 도교 유입 기록은 기원후 624년 [[고구려]] 영류왕 때로, 고구려의 요청으로 당나라에서 도사와 천존상을 보내주었다는 기록이 있다. 이후 보장왕 때 연개소문에 의해 기존 고구려 왕실/귀족층과 결합한 상태이던 불교계를 억압하기 위해 당나라에서 도교를 받아들이고 장려하였으며, 이러한 행보가 당시 고구려 내의 분열을 오히려 부채질하여 고구려 멸망에 부분적으로 관여했다는 주장도 있다. 그러나 그 이전부터 고구려 고분벽화에 등장하는 도교적인 신들과 신수들의 모습, 별자리 신앙, 문헌에 등장하는 고구려의 제천의식을 기반으로 그 이전부터 한국에 원시도교적인 토속신앙이 존재했다고 보고 있으며,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열린 한국의 도교 문화 특별전에서는 [[한사군]] 시절의 도교(특히 외단도교)와 관련된 약재/의례용품류의 유물을 전시한 바 있다. [[백제]]의 경우 [[도덕경]]의 구절을 언급한 [[막고해]]의 발언 기록이나 도교적인 세계관이 반영된 산수무늬 벽돌과 금동대향로 등 조형물, 도교의 토지신(토백)이 등장하는 무령왕 매지석을 통해 어느 정도 도교 문화가 유입되었다는 추정은 있으나 고구려처럼 직접적으로 교단화된 도교가 유입되었다는 기록이나 흔적은 찾아볼 수 없으며, 다만 일본에 불교 문화를 전하면서 주금사나 도교의 술법인 기문둔갑에 대한 책들을 전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신라]]에서는 [[신라사선]](四仙)에 대한 기록이나 화랑들을 신선에 비유한 기록, [[최치원]]의 [[난랑비서문]] 등을 통해 고구려 못지않게 도교가 활발하게 도입되었으며, 동시에 풍류도로 대표되는 토착신앙과의 융합도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는 불교가 이미 중심 종교로서 우세한 자리를 잡고 있었고, 불교와 토착 신앙과의 융합도 강해 후발주자였던 데다 토착신앙과 유사하고, 불교가 중국을 거쳐 한국으로 전래되면서 이미 중국에서 도교와 상호 영향이 시작되어 공통분모가 많이 생긴 상황에서 도교가 고유의 색을 가진 채로 깊이 파고들 만한 여지는 없었다. 자연히 도교는 독립된 교단이 아니라 불교/토착신앙과 융합하는 형태로 한국 문화의 한 구성원이 되었고, 이는 지금까지 내려와 현재 우리나라 불교와 무속 신앙에서는 중국 도교적인 성격을 가진 요소를 많이 찾아볼 수 있으며, 그 중 한 예를 들자면 불자들이 애독하는 경전 중 하나인 <북두칠성연명경>[* 고려 시대부터 유입된 '불설북두칠성연명경'을 주로 사용했는데, 1534년(중종 29년)에 안동 광흥사에서 불공용으로 발행한 북두칠성공양문(北斗七星供養文)에는 칠성청, 불설북두칠성연명경, 칠성하강일, 칠성부(민속에서도 사용하는 부적으로 당나라 때 바라문승이 번역한 불설북두칠성연명경에 수록되어 있는 부적) 등이 수록되어 있다.([[https://www.kci.go.kr/kciportal/ci/sereArticleSearch/ciSereArtiOrteServHistIFrame.kci?sereArticleSearchBean.artiId=ART001701747&sereArticleSearchBean.orteFileId=KCI_FI001701747|성수신앙의 일환으로서 북두칠성의 신앙적 화현 양상]]) 링크되어 있는 논문 파일 자료에서는 북두칠설공양문에 수록된 것이 그냥 일반 북두칠성연명경이라고 되어 있는데, [[http://www.nl.go.kr/nl/search/bookdetail/online.jsp?contents_id=CNTS-00047983646&topF1=title_author&kwd=%E5%8C%97%E6%96%97%E4%B8%83%E6%98%9F%E4%BE%9B%E9%A4%8A+%E6%96%87&dan=&yon=&disabled=&media=&web=&map=&music=&etc=&archive=&cip=&kolisNet=&korcis=#|국립중앙도서관에서 직접 북두칠성공양문의 원문을 보면]] "불설" 북두칠성연명경의 내용이 수록되어 있다. [[http://www.dapsa.kr/blog/?p=9022|중앙박물관 특별전]]에서도 북두칠성공양문에 수록된 것이 불설북두칠성연명경이라고 제대로 나왔다.]을 보면 불경이라고는 하지만 칠성신에게 비는 것은 토착신앙/도교적인 요소며,[* [[북두칠성]]숭배는 [[청동기시대]] [[고인돌]]에서도 발견되는 유서 깊은 토속신앙이지만, 현재의 칠성신앙은 도교적인 요소의 영향이 강하다. 다른 점이 있다면 한국은 중국과 달리 칠성신을 인간에게 생명과 복을 주는 긍정적인 존재로 보는 시각이 강하며, 반대로 중국에서 칠성신은 무서운 죽음의 신이다.] 경전에서 석가모니가 아니라 중국 도교의 신인 [[태상노군]][* [[노자]]]이 주연으로 언급된다.[* 사실 이 북두칠성연명경 자체가 중국에서 만들어진 책이며, 노자가 등장하는 점에서 도교의 칠성숭배가 유입되었다고 보는 게 맞다. 당장 한국 사찰에서 [[칠성단]] 예불시 언급되는 존재인 [[태을신]]이나 [[자미대제]]는 모두 도교의 신이고, [[치성광여래]]는 북극성 신앙과 불교가 혼합된 존재다.] 조선시대 문헌인 [[증보해동이적]]에서도 '원래 불교와 도교[* 여기서의 도교는 중국식 도교가 아니라 한국의 토착신앙과 결합해 한국화된 도교/도교로 이해된 토속신앙을 말한다. 해동이적이란 책 자체가 중국과는 다른 한국 고유의 신선들의 선맥을 정리한 책인데, 등장 인물들 중 고대의 선인들은 [[단군]], [[해모수]] 등 초자연적인 권능을 발휘했다고 전해지는 제정일치 시대의 군장들인 경우가 많다.]는 주문을 읽고 부적을 쓰는 데서[* 엄밀히 말하면 부적을 쓰는 것 자체가 토속신앙의 영향이다.] 유사점이 많은데다, 우리나라에서는 서로 섞여 어느 게 불교고 어느 게 도교인지 알 수 없다'는 기록이나, [[남궁두]]에 대한 기록에서 남궁두의 스승이 스님이면서 신선술을 연마한 도사로 기록된 점은 이러한 사실을 반영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후 고려시대로 들면서 송나라와 활발한 교류를 통해 본격적으로 중국의 도교가 유입된다. 적극적으로 도교를 수입한 [[예종(고려)|예종]] 때 최초로 도관 [[복원궁]]이 세워지고 중국에서 파견된 도사들이 초제를 지냈다. 하지만 이때도 기존에 자리를 굳건히 지키고 있는 불교와 토속신앙과 충돌보다는 동화되는 형태를 보였고, 도교는 왕실과 지배층 중심으로 신앙의 대상이 되면서 기존 한국의 종교들과 서로 공존하는 형태로 유지된다. 이때 우리나라에서 유행한 도교는 수련도교가 아닌 제초도교로서 신선이 되기 위한 수행이나 종교의 교리 연구보다는 도교식의 초제(재초)를 통해 국가와 왕실의 복을 빌고 재액을 물리치는데 집중된 철저한 기복신앙이었다. 우리나라에서 도교의 신선 수련이 발달한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유학을 중시한 조선시대에 들어서면서부터였다. 조선시대에 들어 유학을 중시하면서 불교와 도교, 토속신앙의 의례를 음사로 규정하고 유교적인 윤리주의와 유교적인 제례를 중시하게 되었다. 물론 이때도 기복신앙적인 제초도교가 완전히 없어진 것은 아니나 국가의례에서 도교가 차지하는 비중은 이전에 비해 쇠퇴하였고, 나중에는 [[마니산]]의 [[참성단]] 초제 정도만이 남게 된다. 이때부터 도/불 융합적인 민간신앙의 발달과 몇몇 지방 양반가에서 가풍으로 내단수련과 선행을 중시하는 이른바 내단파가 등장하면서 국내에서의 도교의 수행이론 역시 정리되는 모습을 보인다.[* 양반들은 장시간 앉아서 공부를 하다 보니 쉽게 문약(文弱)해졌고, 건강을 해치는 일이 많았다. 또한 [[경신대기근]] 등의 자연재해와 돌림병의 유행 속에서, 향촌 양반들 사이에 건강법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게 되었다.] 현재 국내의 여러 단학 수련단체에서 중요시하는 [[용호비결]]이나 개운조사파에서 중시하는 [[선불가진수어록]]등의 서적이 모두 이러한 시기에 등장한 책들이다. 여기서 도교의 이해에 있어서는 민간신앙과 내단파의 관점이 조금 차이를 보였다. 민간신앙에서는 도교/불교/민간신앙이 뒤섞이면서 민간신앙에서 도교의 수경신[* 경신일에 삼시충이 하늘로 올라가 옥황상제에게 자신이 기생하는 인간의 죄를 일러바쳐 수명이 줄어드는 것을 막기 위해 하루동안 잠을 자지 않는 것] 행사를 비롯한 몇몇 도교의례의 도입과 더불어 도교적인 신의 위격/호칭이 사용되었고, 이는 이후 [[정감록]]을 비롯한 [[도참서]] 및 구세주를 자처하는 민간 반란 세력의 형성에도 영향을 주게 된다. 그러나 내단파에서는 종교적인 부분보다는[* 종교적인 부분이 아예 없는 건 아니다. 신에 대한 저술이나, 천제를 지낸 유적도 남아있다.] 유교/도교의 사이에서 심성을 닦고 선행을 중시하며, 삼교의 어느 극단에 치우침을 강하게 비판하면서 중도주의를 주장하는 모습을 보인다.[* 대표적인 내단파 인물인 [[김시습]]의 경우 중국 내단도교의 불로장생 사상에 대해 장수에 대한 집착을 비판했고, [[정렴]]이나 [[권극중]] 등 다른 내단파의 인물들도 정도나 방향의 차이는 있지만 중도주의를 추구한다.] 조선시대 종교적 도교의 경우, [[관성제군]] 신앙이 선조 이후 명나라를 통해 유입된다. 이러한 [[관성제군]] 신앙은 조선말 [[무상단]]으로까지 이어진다. 무상단은 삼성을 중시했는데, 삼성은 관성제군 [[문창제군]][* 유불선 삼교일치적 측면에서 중시되었다.], [[부우제군]][* [[여동빈]]을 의미]이었다. 조선 후기를 거쳐 근세로 들어오면서 민족의식의 발달과 유교의 경직화, 신분제도의 붕괴 등을 거치면서 사회가 혼란스러워졌고, 이 때 들어서야 우리나라에서는 처음으로 교단화된 도교[* 무상단이 대표적이다. 다만 이러한 조선말 교단도교는 민간 자생 교단이기보다, 당대 정부와의 관계속에서 성립, 성장하였다.]가 등장하게 된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특성상 중국처럼 순수한 도교 교단을 갖추기보다는 유불선 삼교와 토착신앙이 섞인 성격을 하고 있었으며, 이 때를 전후하여 등장한 도교 혹은 도교적 요소가 다분한 민족종교 교단들로는 [[동학]], [[남학]][* 다른 이름은 오방불교로 이름은 불교라고는 하지만, 교단의 성격을 보면 도교와 불교, 주역학이 뒤섞인 형태다.], [[정역파]], [[증산교]]의 교단들이 있다. 특히 동학과 [[증산교]]단은 도교의 신인 상제(上帝)에 대한 언급([[동경대전]]에 상제라는 표현이 나온다.[[http://www.chondogyo.or.kr/niabbs4/bbs.php?bbstable=dongkyung|*]])과 더불어 다양한 도교계 신령들[* 동학에서는 한울님 외에 다른 신에 대해 특별히 다루지 않으나, 증산계의 경우 엄청난 수의 도교계 신령들이 등장한다. 관우, 28수, 28장, 칠성신 등이 모두 도교와 직간접적으로 관련된 신격들이다.]과 원시/민간도교에서도 공통적으로 보이는 부적을 태운 물을 마시는 의례와 이 과정에서 믿음을 강조하는 모습, 선계(仙界), [[신선]], 무위이화(無爲而化) 등의 다양한 도교적 관념과 표현이 등장한다. 물론 이들 신종교의 사상은 중국 도교의 사상을 그대로 가져오는 것이 아니라, 각자 독자적인 사상을 중심으로 하고 있다.[* 참조문헌:<한국 도교의 기원과 역사>정재서 저.]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