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이동문서 삭제토론 도교 (문단 편집) == 일본의 도교 == [[파일:external/www.taoworld.info/about_honbu.jpg|width=400]] 일본에 현존하는 도관의 모습.[[http://www.taoworld.info/cn_traditional/about.html|#]] [[일본]]에 처음 도교가 전래된 것은 백제를 통해서였다. 위덕왕 24년(577)에 백제에서 일본으로 불교와 관련된 사람들을 파견하였는데, 이 중에 주금사(呪禁師)[* 주문을 읽어 주술로 병을 고치는 것을 업으로 삼는 무당 겸 의사(위치닥터)를 말한다.]가 있고, 무왕 3년(602)년에는 승려 [[관륵]]이 일본에 여러 책을 전했는데, 그 중에 도교와 관련된 역서(曆書), 둔갑(遁甲), 방술(方術)에 대한 책들이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렇게 일본에 도교가 전해지면서 일본서기에 상세(常世)신앙이 나타나는데, 이곳은 신선들이 사는 세계로 이곳에 사는 상세신에게 제사를 지내면 가난이 해결되고 젊어진다는 믿음이 널리 퍼졌으나 중앙 정부의 통제로 교단화에는 이르지 못하였다. 본격적으로 일본에 도교가 흥하게 된 시기는 나라 시대, 헤이안 시대를 거치면서부터였다. 이 시기 일본은 중국에 직접적으로 유학승/견당사를 파견하면서 중국이 제초도교가 들어와 점을 치고 개인의 구복을 비는 방기주술이 크게 발달하였고, 일본의 민간신앙과 결합하여 지나치게 미신적인 경향을 띄기도 하였다. 그러나 기비노 마키비(吉備眞備)처럼 도교를 전문적으로 연구하고 많은 도교서적을 수입한 자들도 있었으며, 이는 헤이안 시대에 들어 화려한 귀족문화의 발달과 더불어 외래문화를 토착화시키면서 그 유명한 [[음양사]]가 등장하게 되었다. 반면에 백성들은 귀족들의 착취를 당하면서 그들 나름대로의 구원을 꿈꾸었고, 도교의 은둔적이고 기복적인 성격은 민중들에게도 잘 맞아 민중들과 민간신앙에도 파고들었다. 중앙정부의 관청인 음양료에 속하지 않은 음양사들인 외법사들 역시 많이 활동하였다. 그러나 이때의 일본 도교는 하나의 독립된 종교 교파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도교의 주술 위주로 일본에 들어와 귀족층을 중심으로 후원을 받아 성장하였고, 또 그런 집단들이 주류로 인정받는 상황이었다. 외법사들의 경우 통제의 대상이었고, 민간신앙에 흡수된 도교는 일본에 들어올 때부터 기복적인 주술 위주로 들어와 독자적인 색깔을 드러내는 수준은 되지 못하였다. 더욱이 일본에서는 종교적 신비주의를 강조하는 밀교가 발달하면서, 타 종교와의 융합에 있어 한국만큼 널널하지 않았다. 때문에 귀족 중심적이던 헤이안 시대가 몰락하고 막부 정권이 들어서면서, 기존의 일본 도교계는 된서리를 맞는다.[* 비슷한 예로 한국의 밀교계가 있다. 한국의 밀교는 비록 순밀까지는 아니더라도 신라 후기/고려시대 동안 왕실과 귀족 중심으로 크게 발전하였으나 이후 조선 건국으로 대차게 타격을 입는다. 이후 조선시대에 불교 의례집에 밀교적인 요소가 많이 발견되기는 하나 민간신앙/도교적 요소가 혼합된 현세구복적 잡밀 수준이다.] 항상 언제 죽을 지 모르는 무사계급들에게 있어 도교의 신선사상이나 불로장생 사상은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했다.[* 전국시대에 기독교가 들어왔지만 기독교는 에도막부의 탄압도 겹쳐서 일본에선 널리 퍼지진 못했다.] 오히려 이들에게는 생사를 초탈한다는 사상을 가진 불교가 더 구미에 맞았고, 당시 일본의 종교계에서도 객관적으로 놓고 보면 도교보다는 당연히 불교의 사회적 영향력이 더 컸다. 당연히 도교는 귀족들의 몰락과 더불어 주류 무대에서 밀려나고, 궁중의 음양사는 민간에서 떠돌이 주술사로 일하는 박사로 변하였다.[* 박사란 활줄을 두드리며 주문을 읽어 재액을 물리치는 일본 주술사를 말한다. 우리나라의 무당도 지역에 따라 박사(博士)라 하나 호칭의 유래와 관련해서 일본의 박사와 관련은 없다. 원래 박사는 옛날부터 전문 지식인에게 주는 벼슬이름이었으니, 나라에 상관없이 존칭으로 붙였다고 보는 게 옳다.] 이후 일본의 도교는 우리나라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민간신앙([[신토]], [[슈겐도]])과 불교에 흡수되어 독자적인 교단을 이루지는 못한다. 에도시대에 들어서 중국 도교의 경전들과 더불어 당시 중국에서 유행하던 민간 도교가 전래되나, 이 역시 독립된 교단의 형태를 이루지는 못했다. 일본에서 도교는 민간 신앙과 불교의 일부로 대부분 흡수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