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도굴 (문단 편집) === 한국 === 다른 나라와 마찬가지로 [[왕조]]가 망하면 지키는 권력이 없어진 [[왕]]과 [[귀족]] [[고관대작]]의 무덤은 도굴의 표적이 되었다. 특히 정복전쟁으로 멸망한 경우는 패전국에 대한 약탈 및 보복 격으로 군대에 의한 조직적인 도굴이 벌어지기도 했다. 백제가 망한 후에 당나라군에 의해 백제왕릉은 대부분 도굴되었다고 하며, 고구려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다만 고구려왕릉과 백제왕릉이 모두 삼국시대에 도굴된 것은 아니고 후술하듯 많은 내외의 침략 [[약탈]]에 따라 관련 기록이나 도굴갱의 수 등 [[신라]], [[고려]], [[조선]], [[일제강점기]], [[대한민국]]에 이르기까지 장기적으로 시대를 막론하고 여러 차례 도굴되었다. 반면 한반도 왕조들 사이에서 섬멸전 없이 항복 형식이나 자연스레 정권이 교체된 경우는 약탈도 없고 망한 나라의 무덤이라도 관리를 명령하기도 했다. 신라시대의 [[수로왕릉]] 등 가야 고분들, 고려시대의 신라 왕릉 그 외 다른 많은 고분들이 그렇다. [[금관가야]]의 왕족은 신라 진골로 편입됐고 신라 마지막 왕 [[경순왕]]은 고려 왕실과 결혼까지 하며 지배층이 됐으니 현 왕조가 예전 왕조의 무덤들을 굳이 도굴할 일이 없었다. 전쟁으로 삼국을 통일한 신라도 망한 백제와 고구려 지배층들에게 관직을 주어 달래고 포섭하는 쪽을 택했지, 백제와 고구려 지역에서 수탈하고 유명 고분들을 도굴했다는 기록이 없다. 조선 왕조의 경우 왕권이 안정되면서 고려왕실에 대한 탄압을 거두고 살아남은 [[왕(성씨)|고려 왕씨]]들을 통해 고려 왕조의 제사까지 지원해주기도 했다. 사실 통념상으로도 도굴 자체가 일반적으로 금기시되는 일이기도 했다. [[고조선]] 시대의 [[고인돌]]조차도 외부 자연환경의 변수가 적어 유실 피해가 없으면 비파형동검과 청동거울 등의 고급 유물들이 아직도 쏟아져 나온다. 수백 수천년 동안 고인돌이 무덤인 걸 사람들이 모르진 않았을텐데 유물들이 비교적 온전한 것은 조상들이 무덤을 그만큼 신성시한 덕분이다. 유교와 불교의 정착과 [[풍수지리설]]까지 유행하며 무덤자리를 골라주는 지관까지 엄연한 직업으로 정착한 사회에서 도굴이란 가장 몹쓸 짓이었다. 왕조와 집권세력이 바뀌어도 현 왕실 혹은 권력층이 도굴을 명한다는 것은 그 시대 윤리관념으로도 미친 짓이었고 피정복지역 혹은 예전 왕조에 향수가 깊은 백성들에게 반발을 사기 딱 좋은 짓이므로 역사에 기록된 바가 없다. 20세기까지 유명 고분 및 왕릉들이 비교적 온건하게 남아 있을 수 있었던 것은 지역민들[* 구전으로 '저 무덤은 누구의 무덤이라 하더라~'라고 세대마다 전해졌기에 [[계백#s-5|계백의 사례]]처럼 보호의 대상이 되거나 [[원균#s-3.4.1|원균의 사례]]처럼 이야기 거리가 되곤 했다.]과 역대 왕조들이 이전 시대의 능묘들을 파괴하거나 도굴하지 않고 관청에 보호대상으로 인지가 되면 관리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https://www.cctimes.kr/news/articleView.html?idxno=646819|국내 도굴에 관한 오피니언]] '''그러나 돈독 오른 인간들에게는 불가능은 없었다.''' 도굴꾼들에게는 그런 의식과 제약이 없었고 [[통구 고분군|고구려와]] [[석촌동 고분군|백제의]] 굴식돌방무덤들은 입구를 친절하게 만들어놓았기 때문에[* 주위를 빙 50센티씩만 파보면 큰 입구가 나온다. 나름 막아놨기는 하지만, 도굴꾼들에겐 [[하이패스]]급의 가치를 지닌 포인트.] 도굴이 쉬워 거의 대부분 탈탈 털렸고, [[고려]] 시대 무덤들도 딱히 도굴 방어장치가 없는데다 [[고려청자]]를 발굴하기 위한 도굴꾼들의 욕심에 의해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 [[고려 말 왜구의 침입]]이나 [[임진왜란]] 때 건너온 일본군이 일부 고분들을 도굴했으며 [[일제강점기]]부턴 '오구라 컬렉션'으로 대표되는 골동품 수집가들의 수요에 힘입어 도굴이 대놓고 판을 쳐서 수많은 [[무덤]]을 속 빈 강정으로 만들어놨다. [youtube(V0ZdcweViZs)] 일본인들은 이미 고려청자가 대량으로 고려시대 고분에 있음을 알았는데, 고려 멸망 이후 조선 중후기 이후 청자의 맥이 끊기고 흥선대원군 시절 전세품[* 옛날부터 세상에서 애완(愛玩)·전래(傳來)된 물건. 주로, 미술품을 가리킴.]까지 대부분 소실된 이상 고려시대 청자를 구하기 위해선 고려시대 고분을 팔 수밖에 없다는 생각을 했기 때문이다. [[이토 히로부미]]가 [[통감부]]를 만든 후 한 일 중에는 고려청자를 얻기 위해 조사를 벌이고 [[개성시]]의 고려 고분들을 파낸 것이 있다.[* 이토 히로부미 본인도 떳떳한 짓은 아니라고 인식은 했는지 고종이 이토 히로부미가 고분에서 파낸 유물을 들고 자랑하자 고종이 다 좋은데 그거 어디서 난 거냐는 식으로 물어보자 대답하지 못했다는 얘기가 있다.] 이는 당시 일본인 학자들과 도굴꾼들의 회고록 및 책자를 통해 다수 교차검증 된다. '''지금도 이렇게 원무덤 주인의 자리에서 벗어나 세상의 빛을 본 국보급 고려 청자들의 대다수가 외국에 있으니 통탄할 노릇이다.''' [[신라]]의 무덤들, 특히 [[돌무지덧널무덤]]은 엄청난 무게의 봉토와 그 속의 돌무지를 전부 걷어내기 전에는 목곽 안으로 못 들어가는 구조상 도굴이 힘들어서 대놓고 도굴하진 않았으나[* 현대라면 중장비를 동원하면 하룻밤만에 도굴이 가능할 수도 있겠지만 경주의 경우 왕릉 주변에 주민도 많이 살았으므로 야밤에 몰래 도굴하기란 매우 어렵다.] [[금관총]]을 비롯하여 왕릉급 무덤 다수가 [[조선총독부]]의 발굴이라는 명목 하에 사실상 도굴되었다. 비슷한 시기 이집트에서 [[투탕카멘]]의 무덤이 발견되면서 고고학의 탈을 쓴 무덤 파헤치기가 전세계적으로 유행하고 신라 고분에서 황금이 쏟아져 나왔다는 소식이 퍼지자, 백인들이 조선총독부에 허가를 받고 사실상 무덤 사냥을 하러오거나 구경하는 추태가 일어나기도 했는데 경주 [[서봉총]]과 그 옆의 '''데이비드총'''[* 데이비드가 팠다고 '데이비드' 총이다.]이 그 예다. 꼴 좋게도 데이비드가 판 고분에서는 부장품이 별로 나오지 않았고 데이비드는 허탕을 쳤다고 한다...다행히 이런 경위가 있는 고분들 말고는 지금까지도 경주 시내 중심 [[대릉원]] 고분들 중 대부분은 도굴된 적이 없다. [[가야]] 무덤은 도굴피해가 위의 신라보다는 심하지만 고구려나 백제보다는 덜한 편이다. 이유는 [[순장]] 풍습 때문인데, 가야 공통적으로 순장을 했고 특히 [[대가야]]는 한국사에서 독보적으로 순장을 많이 했다.[* 한국사 다른 고대 국가들은 [[왕릉]]급 무덤에 1~6명 순장했고 그나마도 나중엔 금지했지만, 대가야는 한 왕릉에 많게는 40여 명씩 순장을 했다.] 무덤 주인이 묻힌 주곽 외에 주변에 순장곽이 여럿 있었는데, 도굴꾼들은 고급 유물이 많은 주곽을 노리고, 땅 속 이곳저곳에 퍼졌고 상대적으로 부장품 유물의 급이 낮은 순장곽은 찾지도 못하거나 찾아도 [[가성비]]가 안 좋아서 건드리지 않기도 했다.[* 이런 순장곽은 어차피 파도 금은보화는 거의 없고 녹슬어버린 가야 [[판갑]], [[마갑]], 산산조각난 [[가야토기]] 같은 거나 나올까 말까 할텐데 도굴꾼들은 어디까지나 관군이나 현지 주민 몰래 후딱 파고 도망가야 하는 입장이다.] 그리고 얘들이 후배 도굴꾼들에게 어디부터 어디까지 도굴 진도 나갔다고 남겨놓는 게 아니기 때문에 다음에도 혹시나 타겟이 되더라도 저런 식의 전개가 반복된다. 덕분에 미발굴분이 거의 없어서 포기하고 들어가는 고구려백제와 다르게 가야 고분군에서는 미발굴분도 많이 발견되는 편이다. 순장풍습이 현대인 기준으로 영 좋게 볼 수만은 없지만 고고학적으로는 순장풍습 덕분에 그나마 잊힌 역사를 더 추적할 수 있게 된 셈이다. 조선시대에는 유교적 문화에 따라 화려한 부장품은 따로 묻지 않고 간소하게 묻어서[* 직접적인 귀금속이 적었다는 것이지, 부장품이 있는 무덤은 많았다. 대부분 고인이 살아 있을 때 즐겨 쓰던 물건들(특히 의복)이나 편지 등을 같이 묻는 경우가 많았고, 이런 것은 당대에는 크게 가치가 없는 물건이었고 도굴꾼이 노릴만한 물건은 아니었지만 후대에는 역사적 가치가 더해져 귀해지고 있다.] 부장품을 노린 도굴은 거의 없었다. 그러나 조선말 혼란기에 도굴이 성행했는데 부장품이 아닌 바로 고인의 시신 자체를 가지고 [[인질극]](?)을 벌이는 경우가 잦았다. 자녀들 입장에서 부모의 유해를 가지고 인질극을 벌이니 피눈물을 머금고 돈을 주는 경우가 많았고[* 그나마도 온전한 시체를 가지고 하는 놈들은 그나마 질이 좀 나은 편이었고 진짜 심한 이들은 시체를 훼손하기도 했다(...).] 부장품도 아니고 시신을 도굴하는 행각은 현대에도 그렇겠지만 당대에는 악질중의 악질로 생각해 민간이나 심지어 왕족들의 무덤을 상대로 도굴을 벌인 짓도 있는데 [[선정릉 도굴사건]]이나 [[오페르트 도굴 사건]]이 주 예시다. 그나마 오페르트 도굴사건은 미수로 끝났지만 선정릉 도굴사건은 아직도 문제[* 선정릉은 성종과 중종의 무덤인데 도굴 때문에 시신이 사라졌고 '''아직도 시신이 어디 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시신은 커녕 도굴범들도 정체조차 알 수 없다.]가 해결되지 못했다. [[조선왕릉]]은 검소함을 위해 부장품이 왕릉에 맞지 않게 간소했고 석회를 발라 굳혀서 상당한 견고함을 자랑하여 도굴할 가치도 없고 리스크만 크기 때문에 대부분 도굴을 피할 수 있었다.[* 말이 석회를 발랐다지, 석회로 수십 cm ~ 1미터 두께의 ~~[[떡장갑]]~~ [[콘크리트]]층을 하나 만든 수준이라, 조선 왕릉 대부분은 시멘트 구조물이 보호하는 형태였다. 이걸 뚫으려면 중장비나 폭약을 동원해 며칠 동안 대공사를 해야하다 보니 '''몰래''' 도굴하기는 불가능에 가깝다.] 여기에 조선시대에는 현역 왕조의 왕릉이었기에 경비가 삼엄했다. 조선이 망한 후인 일제강점기에도 아직 왕릉에 대한 시민들의 인식이 바뀌지 않았고, 형식상으로나마 조선 왕족들이 덴노가 다음가는 서열의 [[이왕가]]로 일본 계급 사회에 편입되어 큰 대접을 받았는데다가 조선왕릉을 도굴했다간 조선인들의 반발과 독립운동이 터질 것은 불보듯 뻔했기에 조선 총독부를 포함해서 누구도 감히 왕릉을 도굴할 생각을 함부로 못했던 것도 한 몫했다. 그러나 일제는 [[경복궁]]의 대부분을 파괴한 것처럼 조선왕조의 태실은 교묘히 파내어 그 정기를 훼손하고 조선인들이 조선왕조를 잊게끔 만들었다.[[https://www.cha.go.kr/cop/bbs/selectBoardArticle.do?nttId=5137&bbsId=BBSMSTR_1008&pageUnit=10&searchtitle=title&searchcont=&searchkey=&searchwriter=&searchWrd=&ctgryLrcls=&ctgryMdcls=&ctgrySmcls=&ntcStartDt=&ntcEndDt=&mn=NS_01_09_01|조선왕실의 정기 차단, 일제의 태실 옮기기]] 해방 이후에는 이승만이 조선 왕족의 후예를 자처했던데다[* 다만 자처만 했지 왕이 되려고 했다든가 왕족을 우대했다든가 하는 건 없었다. 사실 왕릉 보존도 그냥 모두가 관심이 없어서 온전했다고 봐야 할 듯하다. 왕릉 보존 같은 것에 관심을 쓸 정도로 시대가 여유롭지 않았다. 왕릉에 부장품이 많다든가 하면 도굴이 많이 일어났겠지만 조선 왕릉은 그런 것도 없었으니.] 대한민국 들어서는 이제 전국의 유적을 문화재로서 국가가 체계적으로 인력을 붙여 현대적으로 관리하는 것이 정착되었기 때문에 도굴되지 않았다. 다만 조선왕릉 중에서도 [[성종(조선)|성종]]의 [[선릉]]과 [[중종(조선)|중종]]의 [[정릉(서울 강남)|정릉]]은 [[선정릉 도굴사건|임진왜란 때 도굴되었다]]. 사실 이때 일본군은 왕릉이라고 하기에 [[명종(조선)|명종]]의 강릉과 문정왕후의 태릉을 도굴하려고 했다가 너무 튼튼해서 실패하자 선릉과 정릉을 도굴했던 것이다. 그 밖에도 잘 알려져있다시피 [[고종(대한제국)|고종]] 시기 독일인 오페르트가 [[흥선대원군]]의 [[남연군묘|아버지의 무덤]]을 [[오페르트 도굴 사건|도굴하려 했으나]] 워낙 석회로 단단히 보호되어 도굴에 실패했다. 참고로 일제 당시 [[가루베 지온]]은 고고학이란 명분으로 충남 공주 일대에 조성된 고분들을 여기저기 파헤쳐 발굴된 유물들을 일본으로 빼돌렸는데, '''만약 이것들이 다 환수되면 역사서 상당수가 바뀔지도 모른다.''' 하지만 생전에 가루베 본인은 물론 그의 후손들도 2006년에 꼴랑 기와 4점을 돌려주고는 더 이상 없다고 발뺌하는 중이다. 다만 가루베가 [[무령왕릉]]을 자기가 송산리 6호분을 파헤치며 생성된 인공주산이라고 여겨 손을 대지 않은 것은 불행 중 다행이라 하겠다. 광복을 맞은 후에도 [[황룡사]]지를 발굴해 조사하기 위해 민가들을 매입해 헐어버렸는데, 그 틈을 타 도굴꾼이 난입하기도 했다. 이 황룡사지를 턴 도굴꾼들은 그걸로도 모자라 석가탑을 털려하기도 했으나 미수에 그쳤는데, 도굴범들 때문에 파손된 석가탑을 보수하는 과정에서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이 발견되었다.''' 만약 그들이 석가탑도굴에 성공했더라면...[[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문중]]의 압력으로 무덤 발굴을 하기가 어려워 구제발굴을 주로 하는 한국고고학의 특징상 '''도굴 행위가 학술 발굴의 시작점이 되는''' 아이러니가 있다. 도굴 행위는 전근대에만 있던 것이 아니라 현대에도 있는데 바로 [[임당동 고분군]]의 도굴 사례가 대표적이다. 경산 임당 고분군 인근의 영남대학교 교수의 제보로 도굴 행위가 고발[[http://m.news.naver.com/read.nhn?mode=LSD&mid=sec&sid1=103&oid=028&aid=0002271191|#]]되었고 나아가 해당 고분이 발굴되어 임당 지역 및 신라사·고고학적인 자료가 추가[[http://m.news.naver.com/read.nhn?mode=LSD&mid=sec&sid1=103&oid=028&aid=0002369459|#]]되기도 하였다. 물론 문화재 관리 당국과 그 행정의 구조적 문제일 뿐 '''도굴 행위가 이런 이유에서 절대 정당화되지는 않는다.''' 현대에 와서도 도굴 사례가 있기도 한데 롯데 그룹 명예 회장 [[신격호]]회장의 선친 신진수의 묘가 도굴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그 이유가 신격호 관련 도서를 보면서 그의 선친 무덤 속에 보석, 귀금속이 매장되어있단 소문을 알게되고 당시 빚을 탕감하고자 감행한 것이었다. 그리고 당연하겠지만 보석, 귀금속은 없었고 그 무덤의 유골을 훔치게 되었다.] 그리고 범인 정씨는 징역 5년 받고 수감되었다 2003년 성탄절 특사로 출소한 지 얼마 안되어서 2004년 9월 '''무려''' [[한화 그룹]] [[김승연]] 회장의 조부모의 묘지 도굴을 저지르고 공범들은 유골 5점을 훔쳤다. 그리고 수사망을 피해 달아났지만 1개월 만에 체포되고 또 다시 징역 5년형 선고받고 풀렸다가, 얼마 안 가서 2009년 11월 [[태광그룹]] [[이임용]] 회장의 묘를 또 도굴했으나 동일범의 소행일 거라 직감한 경찰은 수사 착수 이틀만에 또 다시 체포된다. 그리고 2개월 뒤 해당 사건의 범인은 미결수 신분으로 쓸쓸히 교도소 화장실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게 되었다. 이후 잇단 재벌 그룹 선산 도굴 사건이 발생하자 피해를 보지 않은 재벌 그룹들은 자신들의 선산 보안 관리를 강화했다고 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