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도다이지 (문단 편집) == 역사 == [[파일:external/s16.postimg.org/shinbcl_219392_7_566702.jpg]] 창건 당시를 재현한 모형과 현재의 모습(아래) 도다이지는 733년 와카쿠사산 기슭에 창건되었다는 긴쇼지(金鐘寺, 금종사)를 그 기원으로 하고 있으며, 크기로 유명한 대불전은 758년에 준공되었다. 최초로 세워진 대불전과 청동대불은 한국계 도래인[* 주로 백제계 도래인들. 쇼무 천황의 명으로 도다이지 대불을 조영하는데 필요한 인력과 재력을 시주받는 역할인 권진(勸進)으로 임명된 사람이 백제계 도래인으로 [[왕인]]의 후손을 자처한 교기(行基) 스님이었고, 도다이지 불상에 입힐 [[금]]을 처음으로 일본 땅에서 찾아내고 조정에 바친 사람은 당시 무쓰노카미(陸奧守)를 맡던 구다라노고니키시 교후쿠(百濟王慶福)와 그이가 거느린 백제계 주금 장인들이었다(그때까지 일본은 금을 자체 생산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구다라노고니키시 교후쿠가 금을 발견한 것은 일본 최초의 금 발견이기도 하다).]들의 주도로 건립되었다. [[http://www.segye.com/Articles/Issue/Inquiry/Article.asp?aid=20070424001978&ctg1=03&ctg2=&subctg1=03&subctg2=&cid=0102060300000|기사]] 본래 도다이지는 [[쇼무 덴노]]가 구니(國)[* 한자는 '나라 국'이지만 일본 내에서는 행정구역 단위로도 사용했다.]마다 세운 고쿠분지(國分寺, 국분사)[* [[야마토]] 정권 초기에 [[불교]]의 힘을 빌어 중앙집권화를 이루기 위해 전국 각지에 세운 국립 사찰들]의 수장으로 덴노 일족의 보살계를 수계하는 높은 위상을 가지고 있었으나, 세월이 흘러 고쿠분지로서의 위상을 잃고 기능이 축소되었다. 원래 [[당나라]]의 영향을 받은 2탑 1금당식의 양식이었으나[* [[한국]]도 비슷한 [[통일신라]] 시기에는 [[사천왕사]]나 [[불국사]] 등 2탑식이 유행하였다.] 후에 2개의 거대한 목탑 등을 잃어버리고 지금의 형태가 되었다. 현재는 대불전과 이월당와 삼월당, 그리고 남대문 일대가 도다이지 경내이다. 과거의 위상은 다이부쓰덴 안에 있는 헤이안 시대의 도다이지 모형에서 약간이나마 찾아볼 수 있다. 대불전은 화재를 두 번 입어 파괴되었다. 첫 번째 화재는 [[헤이안 시대]] 말기인 [[1181년]] 헤이시 정권이 난토(南都)의 [[승병]]들을 추포하는 과정에서 일어났는데 승병 진압을 띠고 난토로 파견된 다이라노 시게히라(平重衡, 1157 - 1185)가 한밤중에 기습을 앞두고 "불을 밝히라(횃불을 가져오라)"고 한 것을 부하가 "전부 불태워라"로 잘못 알아듣고 절에 불을 놓은 것이 그만 온 경내로 옮겨붙어 절이 통째로 불타 버렸다고 한다. 하필 불을 놓은 때가 음력 12월 겨울로 한창 건조할 때였으니 활활 타기 좋은 때였다. 화재가 있고 '''석 달 만에''' 다이라노 기요모리가 사망했고 [[단노우라 전투]]에서 헤이케가 패망한 뒤에 시게히라도 겐지군에게 포로로 사로잡혀 난토로 호송, 분노한 승병들에게 처형되었다. 두 번째 화재는 [[센고쿠 시대]] [[마츠나가 히사히데]]에 의해 [[1567년]]에 일어났다.[* 단, 마츠나가 히사히데가 진짜 불을 질렀는지는 이견이 있다.] 화재 2번 모두 승병뿐 아니라 당시 다이부쓰덴 안으로 몰려든 [[승려]]와 피난민들도 2천여 명에 달했는데, 화재로 건물이 전소되면서 이들 모두 목숨을 잃었고 내부에 안치된 대불 또한 녹았다. 현재의 대불전은 1709년에 재건된 세 번째 금당이다. 현재의 대불전은 [[헤이안 시대]]의 정면 길이의 1/3 규모로 축소된 것으로, 재정이 부족한 점이 가장 큰 원인으로 보인다. 이때 대불전 가운데에 가라하후(唐破風)라는 반곡선 지붕을 만들어 [[헤이안 시대]]의 직선미가 훼손되었다. 축소되었다고는 하지만 정면 57.01 m, 측면 50.48 m, 높이 48.74 m에 달한다.[* 높이가 46.4 m라는 자료도 있는데, 아마도 [[메이지 유신]] 이전에 치미(지붕 제일 위의 양 끝에 붙어 있는 큰 기와)가 낮았을 때의 높이로 추정된다. 예전 사진을 보면 지금 대불전의 치미가 금색의 높은 것으로 바뀌었음을 알 수 있다.] 참고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2번째 도다이지 대불전을 본떠서 약간 더 큰 [[호코지]](方広寺)[* 도요토미 가문 몰락의 단초를 제공한 이른바 '호코지 종명 사건'의 무대가 맞다.] 대불전을 건립하였고, 이는 1592년에 이른바 '게이초 후시미 지진(慶長伏見地震)'으로 붕괴되었다. 불상도 가슴이 무너지고 왼손이 떨어지며 온몸에 금이 가는 대피해를 입었고, 히데요시가 "나라 지키라고 만들었더니 네 몸도 하나 못 지키느냐?"라고 외치며 불상의 미간에 대고 화살을 쏘았다는 야사가[* 야사는 아니고 당시 구교들의 일기 및 예수회 선교사의 편지에도 비슷한 얘기가 나온다. 거기서는 그냥 '''불상을 산산이 부숴 버리라'''고 했다고 한다.] 있다. 이후 1610년에 아들 [[도요토미 히데요리]]가 재건하였으나, 1662년에 역시 지진으로 파괴되었다. 남대문과 대불전의 건축 양식은 <대불양식(다이부쓰요)>으로, 각 시대마다 형태와 구조가 좀 다르며, [[일본]]에서는 상당히 드물게 시도된 양식이다. 기본적으로 복잡한 구조가 인상적으로 다가오는 양식으로, 건물을 세우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한 흔적이 보인다고 할 수 있겠다. 일반적으로 쓰이는 대량식 구조지만, 엄청나게 큰 건물을 지탱하기 위해서 수많은 보와 포로 겹겹이 연결하는 등 갖은 방법을 다 동원했다. 심지어 후대에 건립된 대불전은 일반적인 동양 전통 건축물에서는 쉽게 보기 힘든, 보를 대각선으로 설치하는 방법까지 동원되었다.[* 그러나 유일한 것은 아니다. [[중국]]에서는 이따금 볼 수 있는 방법. 애초에 도다이지 재건을 발원한 인물이 [[남송|송나라]]에 유학한 경험이 있던 조겐(重源)이라는 승려로, 조겐이 중국에서 초청해온 진화경(陳和卿)이라는 장인이 대불전 건립과 대불 복원에 크게 일조했다고 한다.][* 여담으로 [[미나모토노 요시츠네]]와 [[무사시보 벤케이]]의 일화로 유명한 권진장(勧進帳)이 이때 도다이지 중건을 목적으로 시주를 하러 다니는 권진(勧進) 일행으로 위장해 히라이즈미로 도망 중이던 때를 배경으로 한다.] 남대문과 현재의 대불전은 구조나 양식이 다소 다르며, 헤이안 시대의 대불전을 추정할 때 주로 남대문의 구조를 참고하였다. 오늘날의 대불전은 1709년에 창건 이래 세 번째로 재건된 것이다. 이 세 번째 대불전은 과거의 대불전에 비해 크기가 줄었음에도 불구하고 약 2천 톤에 달하는 기와의 무게 때문에 지붕의 처마가 조금씩 계속 처져가면서 처마의 라인이 울퉁불퉁하게 흐트러진다. 이를 막기 위해 [[1882년]]에 버팀목을 삽입하는 공사가 끝났지만, 그래도 무게를 버텨내지 못했다. 대불전 정도의 커다란 목조 건축물에 대한 경험을 가진 [[목수]]가 그 시대에는 남아 있지 않았다는 것도 실패한 이유 중 하나였을 것이다. [[파일:attachment/uploadfile/Todaiji_in_the_Meiji.jpg|width=600]] 메이지 시대의 대불전. 지붕 좌우 아래에 버팀목이 있다. 결국 [[메이지 유신]] 이후 완전히 해체 수리하는 과정에서 많은 변화가 있었다. 해체 수리를 담당한 건축가들은 [[유럽]]에서 교육을 받았던 사람들로, 많은 근대식 건축 재료와 공법이 사용되었다. 철골 트러스를 이용하여 지붕을 지탱하게 하였으며, 거대한 나무 한 그루로 이루어졌던 기둥들을 나무 여러 개를 합쳐 철물로 묶은 기둥으로 교체하여 강도를 높였다. 그리고 기와의 수를 줄여 지붕의 무게를 12% 감소시켰다. 이에 몇몇 사람들은 그냥 현대에 잘 개조된 현대 건축물로 보기도 하나 유용한 신기술이 들어왔는데도 써먹지 않는 게 더 이상한 노릇이기도 하고 고딕 성당처럼 지어진 지 수백 년이 넘은 건축물들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수리·개축 과정을 거치며 해당 시기의 유행 및 기술의 영향을 받았다. 자연스러운 변화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