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도선 (문단 편집) === 저서 === 도선이 남겼다고 전해지는 책은 옥룡기, 도선비기, 삼각산 명당기 등이 있으나 실물은 전해지지 않는다. 다만, [[고려사]] 등에 인용된 일부 구절들이 전해지고 있을 뿐이다. 대표적인 예가 고려사 [[신돈]] 열전에서 도선비기에 "승려도, 속인도 아닌 자가 나라를 망친다."라고 적힌 구절을 가지고 [[공민왕]] 당시 [[정세운]] 등이 "이 구절은 지금의 신돈을 가르키는 것이다."라고 말한 부분과 [[숙종(고려)|숙종(肅宗)]] 원년인 1096년 위위승동정(衛尉丞同正) 김위제(金謂磾)가 천도를 주장할 때 '도선비기(道詵秘記)'에 나온 내용을 그대로 인용한 경우 등이 있다. 그외 [[조선]] 후기 사람 홍만종의 저서 순오지에 조선왕조 건국과 관련하여 도선이 했다는 예언이 기록되어있으나, 조선 초도 아니고 조선 후기의 사람이 쓴 기록인지라 믿기가 어렵다. >지도첨의(知都僉議) 오인택(吳仁澤)과 경천흥(慶千興)·목인길(睦仁吉)·김원명(金元命), 삼사우사(三司右使) 안우경(安遇慶), 전 밀직부사(密直副使) 조희고(趙希古), 판개성(判開城) 이희필(李希泌), 평리(評理) 한휘(韓暉), 응양상호군(鷹揚上護軍) 조린(趙璘), 상호군(上護軍) 윤승순(尹承順) 등이 비밀리에 의논하기를, “신돈(辛旽)이 간사하고 아첨하며 교활한 데다 사람들을 헐뜯기를 좋아하여 훈구 대신을 배척하고 쫓아내며 무고한 이들을 살육하는 데다 무리가 날로 성하고 있으니, '''『도선밀기(道詵密記)』에 있는 ‘승려도 아니고 속인도 아닌 것이 정치를 망치고 나라를 망하게 한다’는 말이 반드시 이 사람일 것이다.''' 장차 나라의 큰 근심이 될 것이므로 마땅히 왕께 아뢰어 일찌감치 제거해야 한다.”라고 하였다. >----- >- [[http://db.history.go.kr/id/kr_132r_0010_0010_0270|지도첨의 오인택 등이 비밀리에 신돈의 제거를 모의하다]] (고려사 > 권132 > 열전 권제45 > 반역(叛逆) > 신돈 > 지도첨의 오인택 등이 비밀리에 신돈의 제거를 모의하다) >'''「도선기(道詵記)」에 이르기를, ‘고려의 땅에는 3경(京)이 있으니, 송악(松嶽)이 중경(中京)이 되고, 목멱양(木覓壤)이 남경이 되며, 평양(平壤)이 [[서경(고려) |서경(西京)]]이 된다.''' 11월·12월·정월·2월에는 중경에 거주하고, 3월·4월·5월·6월에는 남경에 거주하며, 7월·8월·9월·10월에는 서경에 거주하면 36개 나라가 와서 조공을 바칠 것이다.’라고 하였으며, 또 이르기를 ‘개국하고 160여 년 뒤에 목멱양에 도읍을 정한다.’라고 하였으니, 신(臣)은 지금이 바로 새 도읍을 돌아보시고 거기에 거주하실 때라고 생각합니다. >----- >- [[https://db.history.go.kr/KOREA/item/compareViewer.do?levelId=kr_122_0010_0020_0010|김위제가 『도선비기』를 근거로 남경 천도를 건의하다]] (고려사 > 列傳 卷第三十五 > 方技 > 김위제 > 김위제가 『도선비기』를 근거로 남경 천도를 건의하다) 또한 도선이 지었다는 예언서 <도선비기>에는 당연히 조선왕조 건국 이후의 사실들도 예언이 되어있었다는 주장도 있으며[* 다만, 원본이 전해지지 않았서 정확히 어느 시점까지 예언이 되어있었는지는 알 수 없는 추정의 영역이다.], 당연히 조선왕조는 이를 껄끄럽게 여겼다. 조선왕조실록 세조 3년(1457) 5월 26일자에 '팔도 관찰사에게 고조선비사 등 문서를 사처에서 간직하지 말라.'고 명했다는 기사가 있다. 그 외에도 실록에는 성종 즉위년(1469) 12월 9일자 기사에 성종은 도선이 썼다고 하는 도선비기를 전국에서 압수하도록 지시했다는 내용도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