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도자기 (문단 편집) === 유럽 자기, 판을 뒤엎다 === || [[파일:external/www.foselin.com/delftware_17th.jpg|width=100%]] || || 17세기경 네덜란드 델프트 자기.[br]딱 보더라도 중국 청화백자의[br]열화카피임을 알 수 있다. || [[유럽]]의 도자기 역사는 [[17세기]]까지만 하더라도 중국의 열화 카피에 불과했다[* 16~17세기에 [[토스카나 대공국]] [[피렌체]]의 메디치나 [[프랑스 왕국|프랑스]]의 [[루앙]], [[네덜란드 공화국|네덜란드]]의 [[델프트]] 같은 곳에서 중국 청화백자풍의 도기를 모방 생산하였다]. 하지만 18세기 초 [[신성 로마 제국]] [[작센 선제후국]]의 [[선제후]]이자 [[폴란트-리투아니아]] 국왕 [[아우구스트 2세]]의 지원 하에 [[마이센(독일)|마이센]]에서 자기(porcelain, fine china)를 제조하는데 성공하고 자기제조기술이 유럽 여러 나라에 퍼져나가 유럽에서도 자기를 제조하게 되었다. 이렇게 생산된 마이센 자기는 1760 년대 프랑스의 세브르[* 프랑스 왕실 소유 자기 제작소, 로얄 블루라는 특유의 채색을 출원하기도 했다. [[https://en.wikipedia.org/wiki/Manufacture_nationale_de_S%C3%A8vres#Manufactury_today|영문위키]]] 자기가 본격적으로 등판하기 전 까지 초기 유럽식 자기시장을 선도하는 역할을 한다. [[장인정신]]을 강조하면서 사승관계와 무형의 노하우 전승을 강조하던 동양의 문화와는 달리, 온갖 실험을 꼼꼼히 기록하는 서구 문화는 이런 제작 기술이 빠르게 퍼지는 데 공헌했다.[* 약간의 보충을 하자면, 중세 유럽의 수공업 길드 시스템을 생각해 볼 때, 서양 역시 사승 관계와 노하우 전승을 강조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온갖 실험을 꼼꼼히 기록하는 서구 문화"는 유럽의 도자기 개발 과정이 국가적 사업이었으며 장인들만이 아닌, 과학자들이 참여했던 영향도 있다. 프랑스 정부는 경덕진에 있던 프랑스 가톨릭 선교사가 보내온 고령토 표본을 활용해 나라 전역을 샅샅이 뒤져 도자기 생산에 적합한 토양을 찾아냈었고, 유럽 최초로 자기를 개발한 마이센의 요한 뵈트거만 해도 작센 선제후의 후원을 받던 연금술사였다. [[러시아 제국]]은 당대 최고의 러시아 과학자인 비노그라도프를 아예 공방 안에 가둬놓고 밥만 넣어주면서 도자기 개발을 밀어붙였다. 현실적으로 유럽의 도자기 개발 시도가 수백년에 걸쳐 이루어졌다는 사실로 봐도 유럽인들이 도자기 개발 과정을 "꼼꼼히 기록"하지 않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여기에 에나멜 같은 동양에는 없던 색채기법 및 금채를 칠하는 방식이 등장하고, 기존에 유럽이 [[르네상스]]부터 발전시킨 [[사실주의]] 양식이 가미되면서 동양과 서양 두 세계의 도자기 품질이 역전되었다. 우리가 흔히 아는 영국의 [[본차이나]]도 이 무렵에 등장했다. || [[파일:external/pressian.wcms.newscloud.or.kr/40090212214423(2).jpg|width=100%]] || || 18세기 무렵 유럽에서 나온 대표적인 형태의[br]세브르 양식의 자기 || || [[파일:external/londongrandtour.files.wordpress.com/portland-vase-wedgwood-replica.jpg|width=100%]] || || 18세기 영국 웨지우드의 도자기 || ||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250px-BLW_Bone_China_Chocolate_Cup.jpg|width=100%]] || || 스트랫포드셔 [[초콜릿]]컵 본차이나[br]1815-20년경 || 기존 중국산 도자기 문양은 근대 서양양식에 비하여 섬세함이 부족했고, 화려하긴 했지만 서양 귀족들의 취향과는 차이가 있었다. 그리하여 이 무렵 중국제 도자기는 유럽의 서민계층용으로 전락했고, 고위 계층이나 왕실 스스로 기술을 개발하여 자체생산한 유럽식 도자기는 상류층용이 되었다. 다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일상용품으로서의 도자기를 말하는 것이고 예술품으로의 중국 자기는 여전히 유럽 상류층들사이에서 대단한 높은 평가를 받았고 수집의 대상이었다. 근대 유럽 도공들의 중요한 업적이 있다면 바로 '''대량생산'''의 개발이다. 물론 당대 도자기 종주국이었던 [[중국]]이나 [[일본]]에서는 일찍이 분업화가 이루어졌었지만 [* [[명나라]] 때 [[경덕진]]의 수출용 도자기를 굽는 가마에서는 고령토 채취, 흙 혼합, 분쇄, 토련, 반죽, 성형, 초벌구이, 채색, 재벌구이 등 총 75가지 공법을 각각 한 사람이 전담해서 분업하였다.[* 유명한 [[자사호]]도 자사니를 취급하는 공장, 작가, 가마가 서로 분업하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이는 업무효율을 높이면서 도자기 제법이 알려지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다. 도공 하나를 매수해봤자 그 도공은 자기가 하는 일만 알 테니까(...)],유럽에서는 여기에 더해 도자기에 넣을 무늬를 대량생산하는 데 성공했다. 유럽에서 보편화된 예술인 [[동]][[판화]]를 응용했는데, 가장 오래된 대량생산 기법은 동판에 작가가 손으로 문양을 파고 액화시킨 [[코발트]] 안료를 홈 위에 붓고 롤러로 미는 것이었다. [* 오늘날 상업도자기에서 많이 사용하는 전사지기법은 1950년대에나 대중화되었다.] 초창기에는 오직 파란색만 넣을 수 있었지만 이후 금속안료를 개발해서 빨간색, 녹색도 만들 수 있게 되었다. 이러한 방법을 전사 인쇄라고 하며, 기술은 이탈리아에서 나왔지만 상업적인 발전은 영국에서 이루어졌다. 분업화 및 효율화된 유럽식 자기제작 체계는, [[산업혁명]]때 쉽게 자동화될 수 있게끔 기여하여 도자기 생산량이 기하급수적으로 증대되게 한다. [[대량생산]]이 가능해짐에 따라 웨지우드와 같은 유럽의 제조소들은 도자기를 시중에 저가에 공급하였고, 경제적으로 부유하지 못한 계층의 식탁에도 양질의 자기가 사용될 수 있게끔 했다. 이는 서양문명이 만들어낸 도자기가 질뿐만이 아니라 양에서도 동양을 훌쩍 뛰어넘었음을 의미했다. 현대에 전 세계적으로 시중에 사용되는 자기들 대부분이 서양식이라는 점은, 시작은 동양에서 했지만 완성은 서양에서 이루어진 도자기 역사의 결과를 보여주는 단적인 예다. [* 물론 이것은 어디까지나 공산품으로써 시판되는 도자기 제품을 기준으로 한 것이다. 유물이나 문화재로서의 가치를 보자면 중국을 중심으로 한 송나라 시대 등의 고대의 동양식 도자기가 서양보다 인정을 받는다. 굳이 비슷한 경우를 찾자면 금속활자 인쇄본인 직지나 구텐베르크 성경 등이 현대의 완성된 프레스기로 찍혀나온 책들보다 훨씬 가치가 큼을 생각하면 될지도.]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