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도자기 (문단 편집) === 최초의 자기, 청자 === 초기에 등장한 자기는 원시적인 청자였다. 당시 청자는 우리가 흔히 아는 옥빛이 아니라 그저 '도기에 유약을 바르는 것이 목적임을 확인할 수 있는' 빛깔이었다. 이후에 기술이 발전하여 송대에 이르러서 우리가 흔히 아는 형태의 청자가 나왔다.[* 참고로 당시 유약은 기포가 많이 발생하던 종류였고, 소성시 이 기포로 인해 뿌연 표면을 만들어내었다. 때문에 청자의 빛깔은 깊은 물이 푸른 빛을 내듯 유약을 여러번 겹쳐서 표면을 푸르스름하게 산란시키던 원리였다.]. [[중국]]의 도자기는 북방식 백자와 남방식 청자로 나뉘었는데, 물론 당시의 백자는 현재처럼 정립된 것은 아니었다. 북송대의 양각청자 [[파일:external/ojsfile.ohmynews.com/IE001111225_STD.jpg]] 북송대에 만들어진 영청과형병 [[파일:external/ojsfile.ohmynews.com/IE001108457_STD.jpg]] [[당나라]] 이후로 [[송나라]] 때까지 당시 귀족들은 백자와 청자를 두루 사용하였다. 그런데 [[송휘종]]이 '황제의 그릇은 청자로 하라.'고 명령하자 청자가 대유행하였고, 송의 귀족들도 청자를 애호하게 되었다. 북송이 멸망하고 남송이 강남으로 쫓겨난 것도 남방식 청자가 우세해지는 한 요인이 되었다. [[고려]]도 이런 영향을 받았으므로 역시 청자 애호로 기울어졌다. 서해에서 발견되는 도자기 운반선에 실린 도자기 대부분은 송나라 청자이다. 고려의 특산품이라 불렸던 상감청자는 도자기에 그림을 넣으려는 방법을 고안하다가 나온 자기이다. 당시에는 [[코발트]]를 사용한 청화나 [[철(원소)|철]]을 사용한 철화가 나오기 이전이었다. 도자기 위에 일반 안료로 그림을 그려 구우면 색이 변하거나 날아가기 때문에 "물감을 쓸 수 없다면 색이 다른 흙으로 그림을 그리면 되잖아?" 하는 발상에서 나온 것. [[파일:external/www.k-heritage.tv/1209_do08.jpg]] 송, 원, 명대 초반까지 중국 수준의 도자기 기술을 구현할 수 있는 나라는 한국이 유일했다. 아니, 구현하는 수준을 넘어서서 [[고려청자]]처럼 중국인들에게 특유의 색과 양식을 인정받고 중국시장에 팔리는 수준이었다. 따라서 중세의 도자기 역사를 말할 때 중국과 함께 한국이 거론된다. 후술하겠지만 임진왜란 이전까지 세계 도자기 역사에서 고려와 조선은 빠질 수 없다. 경매에서 수십억에 낙찰되는 도자기가 조선백자라는 사실이 이를 증명한다. 늦어도 16세기 종반이면 포르투갈, 네덜란드 주도로 열린 동아시아 세계 시장에 뛰어든 중국, 일본과 달리, 끝까지 세계 체제에 직접적으로 참가하지 않았던 한국이 만든 물건 중 인삼, 종이와 함께 세계적으로 경쟁력 있는 특산품이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