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독가스 (문단 편집) === 제2차 세계 대전 === 독일의 경우 제2차 세계 대전 시점에서 살상력도 높고 대량 생산도 용이한 최신 독가스인 신경 작용제 여러 가지를 새로 개발해놓은 상태였다. 그러나 전쟁도중 사용하진 못했고 전후 모조리 소련군에게 접수당해버렸다. 서부전선은 그렇다 쳐도 소련군을 인간 취급 안 한 동부전선에서 안 쓴 이유는 [[말(동물)|말(馬)]] 때문이라고 괴링이 [[뉘른베르크 국제군사재판]]에서 밝힌 바 있다. 자동화부대의 인상이 매우 강한 독일군이지만, 실제로 전선에서 수송과 병참을 책임진 것은 트럭이 아니라 말이었으며[* 병사 수보다 말의 수가 많을 정도. 사실 대전기에서 모든 수송 및 병참보급에 있어 자동차가 풍족하게 사용된 국가는 미국 뿐이였다. 영국은 원래부터 육군에 대한 지원이 적었으며 그마저도 덩케르크 철수때 버리고 왔고, 이탈리아와 일본은 2차대전 [[스페인 내전|이전]][[제2차 이탈리아-에티오피아 전쟁|부터]] [[중일전쟁|전쟁]] 중이였기 때문에 충분한 기술발전과 산업시설 확충을 하지 못했다. 이탈리아야 일본에 비하면 금방 에티오피아 전선이 정리되긴 했지만 대량생산체제를 싫어했던 무솔리니 때문에 발전하지 못했다. 독일은 내부 권력투쟁으로 생긴 [[4호 돌격포|내부적 모순]]으로 인한 생산력 저하와 생산라인 부족으로 주로 기차와 말에 의존했으며, 소련도 그나마 풍족해진 건 대전말기 랜드리스와 편제된 병력대비 실제 병력수의 괴리로 인해 생긴 과보급 때문이었다.], 전차를 앞세운 기동전에도 말이 끄는 견인포나 수레가 필수적이었기 때문이다. 특히 동부전선은 수비에서도 기동력이 중요했으며, 말을 보호해야 했기 때문에 독일군은 화학무기를 대량으로 사용할 수 없었다. 독일군으로선 그 많은 말에게 일일이 방독면을 씌워줄 여력은 없었다. 또한 히틀러 자신이 1차 대전의 독가스로 인해 부상당했기 때문에[* 독가스로 눈이 일시적으로 실명되었다가 나았고 목소리가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바뀌어 죽을때까지 원래 목소리로 바뀌지 않았다.] 화학전을 싫어했으며 화학무기를 사용하지 말라고 한 바있다. 다만 인도주의적 견지에서 사용하지 말라고 한 게 절대 아니어서 전투용이 아닌 진압용 등으로는 잘 써먹었다. 독일군은 1942년에서 43년 사이 [[우크라이나]]와 크림 반도의 [[파르티잔]] 소탕 과정에서 화학전을 시행했다는 의혹을 사고 있으며, 1944년 [[바르샤바 봉기]] 같은 점령지 진압 작전에서는 심지어 봉기와 무관한 양민들이 대피해 몰려 있었던 지하철과 하수구 등에 독가스를 살포했다는 의혹도 있다. 또한 2차 세계 대전의 전투 형태가 본질적으로 달라진 점도 생각해야한다. 참호전이었기 때문에 뭉쳐있는 병력들을 효과적으로 분쇄할 수 있던 1차 대전과 달리 2차 세계 대전은 [[기동전]]이 주가 되었던 만큼, 병력들이 뭉치고 산개하는 수준이 더욱 빨라졌던데다, 그만큼 전선이 수 없이 변화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독가스는 살상력이 떨어질 수 밖에 없으며, 만약 잘못 쓰인다면 아군 몰살로 곧장 이어지기 쉬웠고, 본질적으로 변화하는 전선에 잔류한 화학 무기는 불필요한 희생을 일으킬 가능성이 있었다. 이 때문에 2차 대전 당시 유럽 전선에서 문헌에 남을 수준의 독가스 사용은 거의 없었으며, 독가스로 인한 사상자 대부분은 화학 사고나 [[홀로코스트|특정 정치적 목적을 위한 대량 학살]]이었다. 그러나 또 다른 전선인 중국에서는 일본군이 전황이 불리해질 때마다 사용하면서 중국군에게 피해를 강요했다. 사실 일본군의 전술은 공중폭격 이후 돌격하는 방식이었지만 예산의 문제 등으로 큰 피해를 입으면 무조건 공중폭격 뒤 독가스 살포로 나왔다. [[상하이 전투]], [[난징 전투]], [[창더 전투]] 등 굵직한 전투에서는 꼭 썼던 방식이다. 중국군의 저항이 거세어서 전선 돌파가 불가능하다고 판단되면 사단 단위에서 자체적으로 퍼부었다. 일본이 영국 등 서구국가에서 전술을 배워온 만큼 중국 측 역시 독일이나 소련에서 수많은 고문관들을 초청하여 전술을 배웠음에도 방어선이 매우 빈번히 무너진 것은 중국 측 통합 지휘력의 부재와 중국군 병력의 전반적인 역량 부족[* 전술을 배운다고 그것을 실전에서 바로 써먹을 수 있는것도 아니고 장교단을 제대로 양성할 기회도 없이 전쟁에 휘말린 탓에 장교단의 질도 그리 우수하지 못했다.] 탓도 있지만 일본군의 끔찍한 화학무기 전술 또한 주된 이유의 하나이다. 당시 중국군의 생화학전 대응 능력은 상당히 빈약해서, 일본군의 생화학무기에 큰 피해를 입었다. 이후로도 더 효과적인 생화학무기 개발을 위해 [[731 부대]] 등을 설립하는 등 중일전쟁에서는 이런 전술들이 별 거리낌 없이 남발되는 경향을 보인다. 심지어 상부명령을 받기전에 일선부대에서 살포하기도 했다.[[https://m.yna.co.kr/view/AKR20190827067400097?section=search|#]] 연합군의 경우, 성능 자체로는 독일이 보유한 거보다 더 효과가 강한 독가스를 이미 대량생산해서 배치할 능력이 있었지만, 굳이 먼저 뿌려서 전쟁수행을 더욱 힘들게 하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지금으로 치면 핵무기가 핵무기를 억제하는 억지력과 비슷하다고 보면 된다. 아이러니한 일. 또한 적들을 향해 진격해야하는 연합국 입장에선 후에 점령해야할 점령지 및 민심관리를 위해서 필요 이상의 피를 볼 이유도 없었다. 결국 연합군의 독가스는 사용되지 않았다. 다만 전장에서 심각한 누출 사고가 발생한 적은 있다. 이탈리아 전선이 벌어질 시기인 1943년 12월 2일, 이탈리아 바리 항구에 정박한 연합군 함선들을 독일 공군이 공격한 적이 있었는데, 하필이면 공격받은 수송선 중 한 척이 미군 당국이 만약의 상황이 닥칠 경우 사용하기 위해 가져온 대량의 [[겨자 가스]]를 싣고 있었다. 이 겨자 가스가 항구를 덮치는 바람에 연합군 장병만 700명 이상의 사상자가 발생했고, 항구에 있던 민간인의 사상자를 합치면 1000명 이상으로 추정하는 참사가 벌어졌다. 소련군의 경우엔 항복 이후에도 이어진 관동군의 악명 높은 후터우 요새의 저항을 꺾기 위해서 독가스를 뿌려서 함락시키기도 했다. 공식적으로 기록된 2차 대전 최후의 화학전이었다.[* 데이비드 글랜츠, Soviet operational and tactical combat in Manchuria, 1945:'August Strom']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