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독도/역사 (문단 편집) === 17세기 후반-19세기 초반: 울릉도로의 지속적인 재파견과 독도의 인식 확대 === 1차 안용복 사건 직후, [[조선]] 조정에서는 울릉도에 대한 권리를 확정하기 위해 장한상(張漢相)을 [[삼척]]첨사(僉使)로 울릉도에 파견하고, 이후로도 3년에 한 번 울릉도를 조사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를 통해 우산도가 독도로 확고히 비정된 것은 아니었는데, 실제로 이때 장한상은 실제로 울릉도 성인봉에서 독도를 보고 그것을 기록으로 남겼지만 그것을 단지 '한 섬'이라고만 언급했을 뿐 우산도라고 집어서 언급하지는 않았던 것이다. >비 개이고 구름 걷힌 날, 산에 들어가 중봉에 올라보니 남쪽과 북쪽의 두 봉우리가 우뚝하게 마주하고 있는데, 이것이 이른바 삼봉입니다. 서쪽으로는 구불구불한 대관령의 모습이 보이고, 동쪽으로 바다를 바라보니 __동남쪽에 섬 하나가 희미하게 있는데 크기는 울릉도의 3분의 1이 안 되고 거리는 300여 리에 지나지 않았습니다.__ 그리고 남쪽과 북쪽에는 망망대해가 펼쳐져 물빛과 하늘빛이 같았습니다. > ─ 장한상, 「울릉도사적」, 1694년 >섬의 산봉우리에 올라 __저 나라 강역을 자세히 살펴보니, 아득할 뿐 눈에 들어오는 섬이 없어__ 그 거리가 얼마나 되는지 모르겠는데, 울릉도의 지리적 형세는 아마도 저 나라와 우리나라 사이에 있는 듯합니다. > ─ 장한상, 「울릉도사적」, 1694년[* 이상 본 인용문의 해석은 유미림의 논문 「‘우산도=독도’설 입증을 위한 논고」에서 가져옴.] 다만 장한상이 일본의 섬은 보이는 것이 없다고 기술하여 동남쪽의 '한 섬'인 독도가 일본의 영토가 아님을 명시한 것은 분명한 의의가 있다. 그러나 조선 조정에서는 오히려 장한상의 보고가 기존의 울릉도 인식과 다른 점이 많았기에 혹자는 장한상이 가 본 데가 진짜 울릉도가 아닐 것이라고 의심하기에 이르렀고, 이로 인해 장한상의 탐사 결과는 울릉도와 독도의 지리적 정보를 구체적으로 확정하는 데까지는 이르지는 못한 것으로 보인다. 한편 일본에서는 울릉도 성인봉 정상에서 독도를 육안만으로는 볼 수 없고 망원경 등 광학기기로 줌인을 해서야만 볼 수 있다고 주장하며 장한상이 본 '섬'은 사실 '수평선에 걸린 구름을 섬으로 착각한 것이다.'라고 반박하고 있다. 실제로 이후 18세기까지도, 조선에서 만들어진 울릉도 지도는 여전히 우산도가 울릉도의 서쪽에 그려져 있었다. 특히 1711년에 삼척영장(營將) 박석창(朴錫昌)이 울릉도를 조사하고 보고서에 첨부한 지도인 「울릉도도형(鬱陵島圖形)」에는 그 동쪽 한가운데 있는 우산도에 '대나무 밭'이라고 표기되어 있어서 여기서의 우산도는 독도보다는 지금의 [[죽도#s-3.1|죽도]]로 추정되기도 한다.[* 독도는 당연히 대나무가 숲으로 우거질 만한 공간이 없다. 반면 사방이 깎아지른 절벽이지만 위가 6만여 평으로 평평한 죽도는 이름부터가 대나무 죽(竹)일 정도로 대나무가 우거져 있었고, 이것은 지금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만기요람을 비롯한 문헌에서는 일본의 마쓰시마(松島)가 곧 우산도로 조선의 영토임을 명시하고 있어서, 일본인들이 부르는 마쓰시마는 곧 조선의 영토임을 분명히 못박아두고 있다. >輿地志云 鬱陵于山皆于山國地 于山則倭所謂松島也[br][br]여지지에 이르기를, 울릉과 우산은 모두 우산국의 땅인데, 우산은 일본이 말하는 마쓰시마라고 하였다. > ─ 서영보(徐榮輔), 심상규(沈象奎) 등, 『만기요람』「군정(軍政)편 4」 해방(海防) 동해(東海)조, 1808년 즉 조선이 '''일본이 마쓰시마라고 부르는 섬은 우리 울릉도에 부속된 것'''으로 당연히 우리 것이라 여기고, 독도에 대해서 지나치게 피상적으로 인식하고 있었던 것이 탈이라면 탈. 하지만 전근대에 해양국가도 아닌 조선으로서는 여기까지만 해도 장한 것이다. 당장 일본만 해도 정확한 해양 측량이 불가능해 저 위에서 보듯이 '배타고 북서쪽으로 2일' 수준으로 기록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애시당초 영국에서 최초의 정밀한 해양 측량, 즉 경도 측정이 이루어진 것도 1761년이다. 그보다 반세기 전의 조선에서 근대적 측량 기록을 바라기는 무리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