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독도/역사 (문단 편집) ==== 은주시청합기 ==== 은주시청합기는 두 가문이 울릉도를 왕래하던 중인 1667년, 은주(隱州, [[오키|오키국]]) 지방 번사 사이토 호센이 남긴 책인데, 독도를 직접 기록한 일본 최초의 기록으로 알려져 있다. 일본은 한국 정부에게 보낸 외교 공문에 이 저서를 언급하며 '17세기부터 일본은 독도를 인식하고 있었다'는 자료로 사용하려 했으나 실제 내용을 살펴보면, >([[오키]]에서) 북서쪽으로 이틀 가면 송도(독도)가 있다. 또 하루를 가면 죽도(울릉도)가 있다. 속칭 기죽도라고 불리며, 대나무, 물고기, 바다사자가 많다. 생각건대 (바다사자는) 신서에 나오는 이른바 오십맹이 아닌가. 이 두 섬은 사람이 살지 않는 땅으로 고려(내륙)을 보는 것이 마치 [[이즈모|운주(雲州)]]에서 [[오키|은주(隱州)]]를 보는 것과 같다. 그러한즉 일본의 서북 한계는 이 주[* 이 주라는 문장이 논란이 많다. 한국 측에서는 오키(은주)로 해석하며, 일본 측에서는 울릉도 자체를 주로 분리하여 보았다고 한다.]까지로 한다.[br][br]戌亥間行二日一有松島 又一日程有竹島 俗言磯竹島多竹魚海鹿 按神書所謂五十猛歟 此二島無人之地 見高麗如雲州望隱州 然則日本之乾地 以此州爲限矣 [[https://ja.m.wikipedia.org/wiki/隠州視聴合紀|출처]][[https://www.dokdo-takeshima.com/korea/japanese-earliest-records-of-dokdo-ii.html|출처]] 로 오히려 '17세기부터 일본은 독도를 일본령으로 인식하고 있지는 않았다'[* 은주시청합기는 일본의 서북한계를 오키섬으로 정하고 있기 때문이다.]는 것을 증명하고 말았다.[* 조선령이라는 것까지는 무리가 있는 것이, 실제로 울릉도에 대한 두 국가의 직접적인 영토 분쟁 사건이 발생하는 '안용복 사건'이 이보다 30여년 뒤인 1693년이기 때문이다.] 현재 일본 외무성의 독도 사이트에서 은주시청합기 내용을 찾아볼 수 없다. 그러나 선박의 항해 거리라는 객관적인 정보를 제시하며, 위의 아직 논란의 여지가 많은 조선시대 문헌과 다르게 은주시정합기는 첫 객관적으로도 부정할 수 없는 증거가 나온 첫 문헌이다. 그건 그거 나름대로 의미가 있는 셈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