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독로국 (문단 편집) === 부산 설 === 일본인 요시다 도고[吉田東伍]가 처음 주장하였고 그의 후학인 [[이병도]]가 따랐으나, 음운적 유사성이 부정되며 비주류가 되었다. 그 요인은 독로란 지명에서 '동래'가 나왔으며 발견된 고분과 유적이 동래가 더 많기에 국가가 생길 여력이 충분하다는 것이다. 동래로 볼때는 삼국사기에 등장하는 [[거칠산국]]과 독로국을 같은 국가로 보기도 한다. 독로국의 독로(瀆盧)는 독(瀆)의 나라라는 말인데, 수영강의 지류가 합류하는 동래 주변에는 탁류(濁流)가 범람하여 ‘구독(溝瀆)’이 되었을 것이고, ‘독로’를 음독하면 ‘동내’ 또는 ‘동래’가 되어 그 미칭으로 ‘동래’가 쓰인 것으로 보는 것이다. 독로가 김해와 함께 철 생산에 관련이 깊으며 한왜통교의 요충지로서 철을 매개로 한 해상 교역의 중심지였을 것이라는 것. 동래에는 삼한, 삼국시대에 걸쳐 동래 패총 [[부산 복천동 고분군]], [[연산동 고분군]] 등 발굴된 고분과 제철유구를 근거로 부산 학자들 위주로 독로국 [[부산]]설을 주장하고 있다. 단, [[https://www.kci.go.kr/kciportal/ci/sereArticleSearch/ciSereArtiView.kci?sereArticleSearchBean.artiId=ART002563567|2020년 선석열 부산대학교 역사교육과 강사]]와 같은 경우[* 신라에 병합된 이후에는 거칠산군으로 편제되었고 해양제사처인 형변이 있었던 점에서 남해항로나 대왜교류의 중요한 해양거점으로서 역할을 다하였다는 점을 고려하여 독로국은 부산에 있었다고 본다.] 상군(裳郡)이라는 지명과 동래군(東萊郡)이라는 지명 자체가 7세기 이후에 형성된 것으로서 이로부터 '독로국'의 유사성을 찾는 것은 무리하다고 본다.[* 신라에서는 동래에 있던 거칠산국을 치고 해당 자리에 거칠산군(居柒山郡)을 구획했으며, 757년(경덕왕 16년)에야 동쪽의 봉래산(蓬萊山)이란 의미로서 현재까지 쓰이는 지명인 동래군(東萊郡)으로 개칭했다.] 또한 동래 일대는 [[사로국]]이 영토를 확장하며 이른 시기에 신라로 편입[* 신라가 영토를 확장한 첫 사례로서, [[탈해 이사금]] 시기에 우시산국과 거칠산국을 합병했다.]되었기에, 동래가 독로국이었다면 3세기까지 국체를 지속하기 어려우며, 같은 이유로 [[정약용]]과 현대 다수 학자들은 독로국을 거제로 본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