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독립기념관 (문단 편집) == 건립 배경 == [[1982년]] [[일본]] 고교 역사 교과서 검정 당시 문부성이 한국-중국 근대사와 관련된 내용을 일본 측에 유리한 형태로 수정하면서 [[역사 왜곡]] 이슈가 터졌는데 당시 일본에서는 문부성의 일방적인 수정에 항의하는 교과서 집필진의 항의가 있었고 일본 내 여론도 문부성 비판으로 흘러가면서 한국 내 언론에도 보도되었다. 이 사건이 터지자 한국에서는 독립운동과 같은 역사를 보존하고 후대에 알려야 된다는 여론이 비등해졌고 500여억원의 국민성금을 기초로 독립기념관을 건립하였다.[*정재정,2014,302 정재정, 『주제와 쟁점으로 읽는 20세기 한일관계사』 (서울: 역사비평사), pp.302, 2014][*대한뉴스1415 [[전두환 정부]] 당시 [[평화의 댐]]과 더불어 전 국민을 대상으로 모금 활동을 벌였으며, TV를 통해 모금 방송을 하기도 했다.[[https://youtu.be/JDL5Fv9tvxI|#]]] 독립기념관 등 80년대 건축된 대형 건축물들은 [[1988 서울 올림픽]]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는 시각이 있다. 전통과 현대의 융합이라는 기치 아래 [[문화공보부]]에서는 대형 복합 문화 공간의 거대 프로젝트를 전국적으로 추진했다. 따라서 독립기념관, 중앙청[* 구 [[조선총독부 청사]]] 건물의 [[국립중앙박물관]] 전환, [[국립현대미술관]], [[예술의 전당]] 등이 대형 프로젝트로 추진되어 건립되었다. [[1986 서울 아시안 게임]]과 1988 서울 올림픽으로 한국에 방문하는 [[외국인]] 손님들의 눈높이에 맞는 문화 시설을 만들려는 것이 당시의 목표였다. 독립기념관이 천안 목천에 들어선 이유는 이 일대가 [[유관순]], [[이동녕]], [[조병옥]] 등 여러 독립지사들이 태어나 활동한 곳이기도 하고 1970년대 말 [[박정희]]가 [[임시수도|행정수도]] 이전지 중 하나로 고려했던 곳(이른바 '천원지구')으로 교통과 지세가 좋은 곳이었기 때문이다.[* 당시 [[김재익]] 청와대 경제수석이 독립기념관 입지 선정에 관여했는데 그는 박정희 정권 말기 행정수도 이전계획에도 참여한 경력이 있다.] 설립 발기인 선정부터 말썽이 일었다. 이들은 부랴부랴 '독립기념관 건립사업 전국추진위원회'를 구성 후 발기인 명단을 발표했으나 이들 중 수십 명이 친일부역자라는 사실이 밝혀져 파문이 일었다. 결국 마지못해 이들 이름을 빼고 다시 위원회를 꾸렸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