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독립문 (문단 편집) == 설립 배경과 과정 == 1894년(고종 31), [[청일전쟁]]이 발발했고, 청은 이 전쟁에서 패전하고 말았다. 이듬해에 청일 간의 [[시모노세키 조약]]이 체결되었는데 여기서 조선의 자주독립을 훼손하는 [[조공관계]]의 폐지를 선언하면서 완전무결한 자주독립국임을 확인했다. 이제 조선 내부에서도 동네북이 되어버린 청나라와의 관계를 재편해야 한다는 여론이 일었고, 조선 국왕이 직접 나가 칙사를 맞이하던 [[영은문]](迎恩門)이 철거되었다. 동시에 조선 조정에 대한 일본의 영향력이 점점 강해지면서 [[갑오개혁]]에서 [[갑신정변]]을 일으켰던 친일 인사들은 모두 복권되고, [[박영효]]는 같이 갑신정변을 일으켰던 한때의 동지인 서재필에게 조선으로 건너올 것을 권유했다. 그리고 그 서재필이 1896년 1월에 조선으로 와서 [[중추원(대한제국)|중추원]]의 고문[* 이 시기의 중추원은 [[을미개혁]]의 일환으로 일본의 영향력을 피할 수 없었다.]이 되었고 그와 동시에 진행한 것이 독립문 건립 운동이었다. 그러나 2월에 [[아관파천]]이 벌어져 상당수 친일 관료들이 입지를 잃거나 숙청되었는데, 서재필은 [[미국인]]으로 간주되고 있었기 때문에 입지를 보존할 수 있었고, 이후 1896년 4월 7일 《[[독립신문]]》이 창간되었다. 이 《독립신문》은 정부의 재정 지원금 4400원이 들어간 만큼 친정부적 [[어용]][[신문]]이었고, 이 와중에 생성된 단체가 '''독립문 건립 추진위원회'''이다. 그리고 이 독립문 건립 추진 위원회가 바로 이후의 독립협회의 모체가 된다. 즉, 독립협회가 독립문을 쌓은게 아니라, '''독립문을 쌓기 위해서 독립협회를 만든 것'''이다. 단적으로 이 독립문 추진 위원회 시기는 당시 정부 관료 중에서도 외교적 역할을 하던 정동구락부 출신 인사들이 많았다. 그리고 1896년 5월 [[일본]]과 [[러시아]]의 관계가 호전되고[* 이 과정에서 로마노프 - 야마가타 의정서가 체결되었다.], 반면에 러시아와 조선 관계는 슬슬 틀어지기 시작했다. 때문에 대외적으로 독립을 밝힐 필요는 더 커졌다. 그래서 1896년 7월에 독립문 건립 추진 위원회를 기반으로 해서 [[독립협회]]를 창설했고 회장에는 [[안경수]], 위원장으로는 [[이완용]]을 정했다.[* 이 시기의 [[이완용]]은 고종에 의해 촉망받는 신진 관료로, 미국 공사관 주재 경험을 갖춰 친미파로 간주되었으며 [[춘생문 사건]]에도 개입해서 고종의 신임도 두터웠고 백성들 사이에서의 평판도 좋았다.] 서재필은 고문이었고, 동농 [[김가진]], 월남 [[이상재]] 등의 고위 관료와 명사들이 여기에 참여했다. 이 과정에서는 독립협회건 《독립신문》이건 죄다 친정부 성향일 수밖에 없었다. 한편 서재필은 1896년 초부터 《독립신문》에 독립문 건설의 당위성을 계속 주장했다. >조선이 몇 해를 청나라의 속국으로 있다가 하나님 덕에 독립이 되어 조선 대군주 폐하께서 지금은 세계의 제일 높은 임금들과 동등이 되시고, 조선 인민이 세계에서 자유로운 백성이 되었으니, 이런 경사를 그저 보고 지내는 것이 도리가 아니요, 조선 독립된 것을 세계에 광고도 하며, 또 조선 후생들에게도 이때에 조선이 분명하게 독립된 것을 전하자는 표적이 있어야 할 터이요. 또 조선 인민이 양생을 하려면 맑은 공기를 마셔야 할 터이요, 경치 좋고 맑은 데서 운동도 하여야 할지라. >---- > 1896년 7월 4일, 《독립신문》 이를 위해 [[서재필]]은 파리의 [[에투알 개선문]]을 토대로 기본 스케치를 했고, 이를 바탕으로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독일 공사관 출신 스위스인이 설계를 했으며, 시공은 한국인 건축가 심의석이 담당하였다.[* 사바틴, 사바찐 등으로 불리는 우크라이나계 러시아인 건축가가 독립문 설계에 참여하였다는 주장이 일각에서 제기되나 실제로 사바틴이 독립문의 설계자인지에 관해서는 아직도 전문가들 사이에서 일치된 의견이 없다. 첫째로, 서재필의 구술 회고록에서 서재필은 사바틴이라는 러시아 사람이 아니라 독일 공사관 출신의 스위스인이 설계한 것이고, 다만 그 이름이 기억나지 않을 뿐임을 명확하게 밝히고 있다. 둘째로, 독립문의 설계도나 공사허가증 등 어떤 1차적 공식사료에도 사바틴의 이름은 확인되지 않는다. 사바틴이 독립문의 설계자라는 사료는 조선총독부가 한참 뒤에 간행한 경성역사서에 처음 등장할 뿐이며 그 사료가 사바틴을 독립문의 설계자로 특정한 근거는 전혀 확인되지 않는다. 몇몇 친러 학자들이 독립문의 설계자는 사바틴이라고 주장하는 선전을 피운 사례가 있으나, 실제로 사바틴이 독립문의 설계자라는 어떤 구체적인 사료도 발견되지 않았고, 단지 사바틴이 '스위스 혈통일 수도 있으니' '서재필이 스위스계 혈통이 약간 섞인 사바틴을 스위스인으로 헷갈렸을 수도 있다'는 식의 영양가 없는 추측만이 발표되었을 뿐이다. [[https://www.joongang.co.kr/article/23897991|반면 대한민국 [[문화재청]]은 사바틴이 독립문의 설계에 참여했다는 주장을 한 번도 공식적으로 인정한 사실이 없다.]]] 건설 비용은 독립 신문과 독립협회가 모금 운동을 벌여 얻은 성금과 왕실의 기증으로 충당했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external/www.poongsoojiri.co.kr/db56e21e781ca1512c3ff280336ed391195357.jpg|width=100%]]}}} || || {{{#000 ''' 완공 직후 독립문 '''}}} || 이후 조선인 건축사 심의석이 건축을 맡아 1896년 11월 21일 영은문 부지에서 공사에 돌입했고,[* 독립문 앞에 있는 기묘한 돌기둥이 영은문의 주초로, 이후 이 주초는 [[대한민국의 사적|사적 제 33호]]로 등록되게 된다.] 이후 고종이 1897년 2월 러시아 공사관에서 [[경운궁]]으로 환궁해 동년 10월 [[대한제국]]을 선포했고, 《독립신문》과 독립협회는 충실하게 이를 지지했다. 그 후 1897년 11월에 완공된 독립문은 대한제국의 문이 되었다. 한글과 한문으로 적힌 현판 아래에는 대한 제국 황실을 상징하는 [[이화문]]이 새겨졌다. [[태극기]] 또한 새겨져 있는데, 이 태극기가 소위 말하는 '독립문 태극기'이다.[* '독립문 태극기'의 경우 [[3.1 운동]] 당시 민중들이 태극기의 정확한 모습을 몰라서 경성 주민들의 경우 독립문으로 가서 조각된 태극기를 보고 도안을 그렸다는 일화가 있다.] 하지만 이후 [[독립협회]]와 《[[독립신문]]》은 서재필이나 [[박영효]]와의 문제로 [[대한제국]]과 틀어지게 되었다. 그 후 [[대한제국]]의 국권을 피탈한 일본은 독립문 건설의 배경을 눈여겨보고 '일본이 청일전쟁에서 승리하여 조선인들을 청나라의 지배로부터 독립시켜 주었다.'라는 정치적 [[프로파간다]]의 근거로 이용하려고 강점기 내내 독립문을 철거하지 않았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youtube(qx4LYW9A-IA)]}}} || || {{{#000 ''' 국방TV에서 다룬 독립문 영상 '''}}} || [[1979년]], [[구자춘]] [[서울특별시장]]이 [[성산로(서울)|성산로]][* 이 때 [[성산대교]]와 [[모래내고가도로]]가 같이 건설되었다.]를 건설하는 건설하는 과정에서 [[현저고가차도]]와 금화터널 예정지가 독립문 부지와 간섭되자, 이를 이격시켜 고가도로를 놓기 위해 그냥 통째로 들어 옮겼다. 1979년에 [[성산로(서울)|성산로]] 공사로 인해 본래의 위치에서 북서쪽으로 70미터 정도 이전했다. 이에 대해 코미디언 [[전유성]]은 [[전유성#s-4|"차라리 고가를 돌아가게 만들자는 마음이 관광 상품을 만드는 것"이라는 쓴소리를 하기도 했다.]] 독립문 고가 차도를 철거하고 원래대로 복원하자는 주장도 있으나, 문제는 독립문 고가 차도가 [[일산신도시|일산]], [[운정신도시|운정]], [[행신동|행신]], [[가좌역|가좌동]], [[연세대학교|연대앞]]을 비롯한 '''수도권 서북부 지역과 [[경복궁 광화문|광화문]] 도심을 연결하는 메인 간선 도로'''라서 반발이 엄청날 게 뻔해서 복원이 어렵다. 일산, 운정을 기점으로 하는 대부분의 [[서울역]]행 광역 버스가 이 독립문 고가 차도를 지나갈 정도로 중요한 도로이다. 그런데 이전하기 전에는 순수한 석조물로 알고 있었으나, 뜯어 보니 내부는 철근 콘크리트로 만든 것이었다. 돌 현판 글자는 당시에 지금과 달리 한글도 [[세로쓰기|우에서 좌로 썼기]]에 '문립독'이라고 되어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