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독립문 (문단 편집) === [[김가진]] 설 === 친일파 연구 전문가 [[정운현]]은 편액을 쓴 사람이 이완용이 아니라는 증거로 세 가지 이유를 들었다. >'''첫째'''. 자서전인 《일당기사》에 따르면, 이완용이 66세 될 적인 1923년 1월 11일 직지사에 대웅전, 천왕문 등 두 개의 편액을 쓴 건 소상히 썼음에도 독립문 글씨와 관련된 것은 한 줄도 없다. > >'''둘째'''. 《[[동아일보]]》 1924년 7월 15일자 〈내 동리 명물〉에 실린 독립문 관련 글의 신뢰도에도 문제가 있는데, 이 글은 정식 취재 기사가 아닌 당시 교북동에 살던 한 주민의 이야기를 실은 것이라 근거가 부족한 면이 있다. > >'''셋째'''. 독립문 편액은 [[한글]], [[한자]] 할 것 없이 이완용의 것과는 차이가 있다. 이완용의 친필 서체는 주로 해서체이고 획이 날카로운 반면, 독립문 편액은 글씨 획의 끝이 뭉텅하여 선이 굵고 힘찬 것이 특징이기 때문이다. 김가진의 손자인 김자동[*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장]은 2010년에 [[한겨레]]와 중앙선데이에서 김가진이 쓴 글이라고 주장했다. >독립협회 결성의 주역 중 한 사람이던 할아버지는 당대 명필로도 꼽혀 서대문 밖에 세운 ‘독립문’의 한자·한글 제자 모두 쓰셨다. 비원에 있는 현판도 대부분 할아버지 글씨다. 독립문의 제자가 ‘역적’ 이완용의 글씨로 일부 잘못 알려져 있는데, 육안으로 서체만 비교해도 틀린 주장임을 알 수 있다. >---- >《한겨레》 2010년 1월 3일자 기사: 〈길을찾아서 - 일본 작위 내던지고 망명한 할아버지 / 김자동〉 중에서 [[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396758.html|#]] >우리 집안에서는 당연히 할아버님(동농 김가진·1846 ~ 1922) 글씨로 알고 있습니다. 강단이 남달랐던 어머니(정정화·1900 ~ 1991)의 회고록 장강일기에도 한문과 한글 현판을 정성 들여 쓰셨다고 나와 있고요. 어머니는 홀로 상하이에 건너가 시아버지를 모셨어요. 할아버님은 1903년 중추원 부의장으로 계셨을 때, 비원 감독직을 맡아 창덕궁 모든 현판 글씨들도 쓰셨습니다. >---- >《중앙SUNDAY》 2010년 9월 18일자 기사:〈일제의 만행 증언하는 사형장 앞 ‘통곡의 미루나무’〉 중에서 [[https://www.joongang.co.kr/article/4466187|#]] 제3자인 [[서예]] [[전문가]] 김선원은 중앙SUNDAY 기사에서 독립문의 ‘문 문(門)자’와 ‘설 립(立)자’의 체형을 조목조목 짚어가며 이완용의 글이 아니라고 단언했으며 이완용 글씨로 알려진 [[경복궁 함원전]] [[현판]] [[글씨]]도 마찬가지라고 지적했다. 완숙한 독립문 글씨와는 체형과 서법이 다르다고 말했다. 그 증거로 김가진이 1903년에 [[창덕궁#s-4.4|창덕궁 후원]]의 [[감독]]을 맡아 쓴 몽룡정, [[창덕궁 부용정|부용정]], [[창덕궁 애련정|애련정]], [[창덕궁 희우정|희우정]], 금마문, [[창덕궁 폄우사|폄우사]], [[창덕궁 의두합#s-5|운경거]] 등의 편액 역시 전부 글씨체가 뭉텅하며 예리하지 않은 스타일이다. 이는 독립문 편액 글씨체와도 일맥상통한다. 그러나 미스테리를 풀 핵심인 독립문의 [[한글]] [[현판]]은 현재 김가진이 쓴 한글 친필이 전무한 관계로 비교의 대상은 [[한문]] 편액밖에 남지 않는다. 또 [[독립협회]]는 출범 뒤 모화관을 '독립관'으로 바꾸면서 현판을 내걸었는데, 현재 [[현판]]은 전해진 것이 없으나 1897년 5월 25일 《[[독립신문]]》 잡보에 따르면 [[태자]] 시절의 [[순종(대한제국)|순종황제]]가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2326234&cid=51385&categoryId=51385|썼다.]] 또 1898년 1월 25일자 《독립신문》 잡보에선 당시 [[황해도]] [[관찰사]]인 김가진이 독립문에 관심을 지녔을 것이라는 내용도 나온다. >황해도 관찰사 김가진 씨가 [[해주시|해주]] 먹판을 금번에 새로 만들어 먹에 박아서 전국에 반포했는데. 그 먹 전면에는 제국 독립문(帝國獨立門)이라 박아 도금 했고 후면에는 독립문을 온통 모본하여 박고 [[국기]]와 독립문에는 또한 도금을 했더라. 물건에 까지 이렇게 판각했으니 김씨의 마음에 독립이자 사랑하는 것을 깊이 치사하노라. 전국 인민이 일심으로 애국하여 독립이자 생각하기를 이 먹에다 각(刻)한 것과 같이 함을 우리는 바라노라. >---- >1898년 1월 25일자 《독립신문》 잡보 독립문의 글씨를 누가, 언제 썼는지에 대해서는 정확한 기록이 없으므로 서체 고증에만 의지할 수밖에 없다. 정운현은 위와 같은 견해들을 종합해 보아 김가진의 것이 맞을 것이라고 판단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