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이동문서 삭제토론 독립유공자 (문단 편집) == 독립유공자 후손 대우의 현실 == 독립유공자의 자녀 및 손자/녀[* 일반 국가 유공자는 자녀까지.]에게는 대학 등록금 면제 혜택이 주어진다고 하지만, 사실 '''후손들에 대한 대우는 썩 좋지 못하다.''' 일제강점기가 35년간이나 이어졌으므로 광복 후 행정이나 관리 등 정부 관련 업무를 할 줄 아는 사람들은 사실상 대부분 친일파들밖에 없었기 때문에 이들이 관련 일자리에 많이 들어갔으나, 독립운동가들은 독립운동을 위해 집도 고향도 다 버리고 외국(특히 [[국부군]], 드물게 [[인민해방군]])에 나가 투쟁하는 경우가 다반사라 관련 경험이 있는 사람도 적고 호적도 제대로 되어 있지 않은 경우도 상당하였기 때문이다. 거기에 건국 초부터 북한과 대치해야 했고 가 [[6.25 전쟁]]까지 일어나서 나라가 아수라장이 되었다. 이렇게 건국 당시부터 이념 대립이 심하고 반공 기조가 극심하여 오히려 독립운동을 했어도 좌익 쪽에서 했으면 목이 성한 것을 다행으로 여겨야 했다.[* 무장 독립 투쟁의 전설로 불리던 약산 [[김원봉]]은 친일파였던 [[노덕술]]에게 잡혀 뺨을 맞는 등 심한 모욕을 받았다. 그리고 [[이승만|당시 대통령]]은 그런 노덕술을 '''반공 투사라며 극찬했다.''' 당시에는 경찰이 백색 테러를 비호하고, 공산주의 계열이나 좌파에 대한 탄압이 심했다. 군법 회의에서 사형을 선고 받고 사살당한 [[최능진]]의 경우에는 64년이 지난 2015년에 겨우 무죄를 선도 받기도 했다.[[http://www.yonhapnews.co.kr/bulletin/2015/08/27/0200000000AKR20150827132251004.HTML?input=1179m|기사]]] 거기에 독립유공자 후손에게 주던 공무원 시험 가산점 10%가 위헌 판결을 받아 반으로 줄어든(5%) 일도 있다. 현재 독립유공자의 후손은 손자/녀까지 일부 혜택을 받을 수 있지만, 독립 운동 여부를 증명하는 것 자체가 쉬운 일이 아닐뿐더러[* 후술하겠지만 독립 운동 자체가 비밀적으로 이뤄지다 보니 굵직한 독립운동가가 아니라면 명백한 증거가 남아있지 않거나, 시간이 지나며 증거라고 할 수 있는 것들이 사라진 경우도 많다.], 독립 후 70년이란 세월이 지나며 현재 혜택을 받을 수 있는 후손의 수는 그다지 많지 않다. 예를 들어 [[일제강점기]] 초기에 활동한 독립운동가의 경우 그 후손이 현손자 혹은 6대손까지 내려온 경우도 있다고 한다. 또한,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가가 인정받은 것도 비교적 최근의 일이라서 설령 독립유공자로 힘들게 인정받았어도 그 후손이 조상의 행적에 대한 보상을 받은 일은 생각보다 많지 않다. 이에 대해 유족의 범위를 증손까지 확대하고, 유공자로 지정될 당시 손자/녀도 생존해 있지 않다면 그 후손에게 혜택이 돌아가도록 하는 개정안이 [[국회]]에서 발의되었으나 재정적 문제와 다른 국가유공자들과의 형평성 문제[* 현재 다른 국가유공자의 경우 혜택이 돌아가는 유족의 범위는 자녀까지이며 독립유공자만 3대까지 인정한다.]로 3년이 넘도록 계류 중이다. 그래서 당시에 비교적 대우를 받지 못한 사람들의 후손들에게 얘기를 들어보면 '''차라리 [[친일반민족행위자]]가 낫다'''[* 사실 일제 때 지배층이 친일파에 붙어서 아무래도 친일이 겉으로는 자랑거리가 아니어도 근대적으로 증명된 증거 중 하나로 작용하기도 해서 내부적으로는 [[훈장(상훈)|훈장]]처럼 쓰이기도 했다. 그래서 친일을 떠벌리고 다니진 않아도 부정하지도 않는 사람들도 있었다. ]고 하거나, '''독립 운동을 하면 3대가 망한다'''라고 한다.[* [[친일반민족행위자]]였지만 생계 곤란으로 친일파가 된 [[이효석]]의 후손들은 예외로 '''[[http://m.news.naver.com/read.nhn?mode=LSD&mid=sec&sid1=103&oid=001&aid=0007881108|엄청 빈곤하게 산다]].''' 지금의 언론에서 친일파 후손의 재산 분쟁 때문에 가난해도 숨죽이고 살아야 했다. 물론 이 같은 경우는 극히 일부일 뿐이며, 대부분의 친일파들의 후손들은 기득권을 유지하며 살고 있다.] 그래도 완전히 무시하고 대우를 해주지 않는 것은 아니라서 대학교에서 조금만 관심을 가지면 독립유공자 전형[* 그런데 독립유공자 전형은 정원 외로 별도로 뽑는 것도 아니고 정원 내로 되어있다. 또한 수급자나 저소득층, [[군인]] 자녀, [[경찰]], [[소방관]], [[교사]], [[공무원]] 자녀 또는 다자녀나 [[다문화]] 가정과 같이 경쟁하기 때문에 그리 혜택을 받는다고 보기도 어렵다.]으로 온 친구들을 간혹 볼 수 있으니 먹을 것이라도 잘 사주자.[* 물론 가짜 독립운동가에 대한 서훈이 논란이 되긴 한다.] [* 다만 모든 독립유공자 후손이 다 못사는 것은 아니다. 대표적으로 [[노태악]] ] 독립운동하면 3대가 망한다는 오명도 있지만 의외로 독립운동가의 후손이면서 성공한 사람들이 꽤 있다. 특히 민족주의 우파계열 독립운동가들은 정치, 학계에서 높은 위치에 오른 경우가 많다. 초대 [[국무총리]] 겸 [[대한민국 국방부장관]]인 [[이범석]] 장군, [[손정도]] 목사의 아들이자 초대 [[대한민국 해군참모총장]], 5대 [[국방장관]]을 지낸 [[손원일]] 제독과 그의 동생, [[대한민국 공군]]의 아버지이자 초대 [[국방차관]], 2대 [[대한민국 공군참모총장]]을 지낸 [[최용덕]] 장군, 6대 [[대한민국 공군참모총장]]이었던 [[김신]] 장군을 비롯한 [[김구]]의 후손들[* 김구 집안은 국내 재벌가와 연계되어 있을 정도로 빵빵하다. 이 때문에 손자 김진 씨는 주택공사 사장 시절에 비리를 저질렀다가 할아버지와 아버지 이름에 먹칠하기도 했다. 할아버지의 까방권 때문에 1년 만에 특사로 풀려났지만. 다만 김구 집안이 빵빵한 이유는 국가에서 독립유공자인 김구 집안을 후원해줬기 때문이 아니라, 김구 자신이 해방 이후 유력 정치가였으며, 아들인 [[김신]] 장군 또한 공군 내부의 유력 인사였고 5·16 쿠데타 가담으로 줄을 잘 선 덕분이라고 할 수 있다. 거기다 이승만에 대해서 부정적인 견해를 가진 박정희가 김구를 밀어준 점도 있다.], [[안창호]]의 아들 [[안필립]][* [[보난자]]에 출연했는데, 당시에는 동양인에 대한 인식이 안 좋아서...], [[안중근]] 의사의 사촌이자 초대 [[육군사관학교]] 교장인 [[안춘생]] 장군, 박정희 정부에서 외교관을 한 조카 [[안진생]], 우당 [[이회영]]의 손자이자 더불어민주당의 원내대표였던 [[이종걸]] 의원, 조홍희 등이 있다. [[윤봉길]] 의사의 손녀 국민의힘 [[윤주경]] 의원. 그런데 이 사람들 성공한 건 '''그냥 자기가 잘 해서 성공한 것'''이라서 국가의 보훈 정책과는 관계가 없고, 그마저도 독립운동가 후손의 비율 중에서는 소수다. [* [[대한민국 국군]] 창설 당시 [[광복군]] 출신자들도 대부분 건군에 참가했다. 물론 일본군 출신(특히 육군)이 워낙 많다 보니 수적으로는 미약했다. 다만, 해군의 경우 함선 근무 경력이 있는 일본군 출신자들이 전무하여 손원일 제독을 비롯한 민간 상선사관들이 창군의 주축이 되었으며, 공군의 경우 일본항공대, [[대만 공군|중화민국 공군]](광복군 출신자들 대부분이 중화민국 공군 소속이었다), 민간비행사 출신들이 골고루 분포해 있었다. 채병덕이 워낙 유명해서 6.25 초기 일본군 출신이 다 말아 먹었다고 오해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꽤 다양하게 섞여 있었고 삽질한 사람도 삽질하지 않은 사람도 일본군, 독립군, 팔로군/중국군 출신에 다 있었다. 전쟁 초기의 어이없는 패퇴에 대해서는 복잡한 분석이 있지만, 단순화하면, 중학교 1학년더러 고3이라고 하고 여름방학 끝나고 난데없이 수능 보게 한 셈이라고 하면 비슷하다.] 또는 독립운동가나 그 가문들이 친일파 집안과 인맥으로 연결된 경우도 흔하다. 예를 들면 [[홍사익]] 중장이 [[지청천]]의 일가의 생계를 살펴줬다는 이야기, 김구 또한 해방 후에 [[최창학]]이라는 친일 광산 재벌의 정치 지원을 받았으며,[* 김구가 타계한 경교장의 원래 소유주가 최창학이다.] 그 아들인 [[김신]] 장군은 5·16 쿠데타에 가담하였고, [[박정희]]의 지지를 받았다. [[손원일]] 제독의 아버지인 [[손정도]] 목사는 [[윤치호]] 집안과 사돈을 맺었다. 사실 양반 출신[* 심지어 독립 후에도 이들은 진짜 적폐였다. [[https://namu.wiki/w/개천에서 용 난다?rev=1436|#]] ][* 이런 게 딱히 우리나라만의 특수성은 아니다. 다른 나라도 귀족이나 양반, 젠트리처럼 귀족에 가까운 경우는 평민 출신들보다 서로 사교적인 경우가 많다. ]들끼리는 그런 게 흔했다. 일제 장교인 이응준은 장인 이갑이 독립운동가였고, 마찬가지로 김석원도 독립운동가인 이종혁이 수감을 마치고 백수가 되어 망하고 있을 때 다방면으로 도와줬다. 현재의 대한민국에는 친일파 후손들이 다 해 먹고 독립유공자들은 [[자수성가]]도 못하고 높은 위치에 오르지 못했다는 이야기가 들려온다. 그러나 친일파의 후손들이 슈퍼 엘리트로서 한국 사회를 좌지우지하고 있냐면 그건 현실과는 다른데 우선 뉴스타파의 조사에 따르면 친일파의 후손 중에 엘리트가 많은 건 사실이나 사회에 강한 영향력을 지닌, 즉 '''슈퍼 엘리트급의 존재는 생각만큼 많지 않다'''. 또한 현대 대한민국 사회는 [[친일파]]에 대한 반감이 강하다. 대놓고 과거 친일 행각에 대해 미화하거나 합리화가 마냥 쉽지 않다.[* 해당 인물이 다른 공적을 세웠을지언정 친일파였다는 이유로 견제 받는 일이 당연히 많다. 백선엽 등의 인물도 높은 지위와 군 내부적 명망을 얻었으나 친일 경력을 이유로 원수 추대에 실패했다.] 실제 친일 행적이 드러난 선친이나 조부 때문에 사회적인 인지도를 날려버린 이들도 한둘이 아니다. 요컨대 그들은 현재 시점에선 그냥 돈 많은 집의 2, 3세라고 볼 수 있다. 결론만 이야기하자면 "친일파의 후손은 잘 살고 독립유공자들의 후손들은 힘들다"라는 통념이 어느 정도는 사실이다. 실제 [[신기남|논란이]][* 신기남의 아버지는 친일 순사임이 걸려서 당 의장직에서 물러났다.] [[김희선(정치인)|된 친일파]] [[김무성|후손들]]만 해도 자기 조상이 애국적이었다느니, 시대의 비극적인 희생양이었다느니 어림없는 변명을 내놓았지만 [[개소리|씨도 먹히지 않았다]].[* 이들도 "우리 가문 친일파다"라고 떠들지 못하고, 변명을 한다는 거만 봐도 절대 명문 가문으로 통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독립유공자가 친일파를 절멸시켜도 상관없는 수준이다.] 독립유공자들과 그들의 후손이 가난하게 된 이유는 어떻게 보면 현실적 문제도 있다. 예를 들어 1910년에는 [[초등학교]] 취학률도 4% 가량에 불과하였는데, 양반도 아니고 하찮은 신분인 사람들이 대다수인 독립유공자들이 학벌부터가 좋을 수가 없으니 독립운동 후에 돌아와도 성공하기 힘들었다.[* 그리고 당연히 돈도 없고 인맥도 없었다. 애국의 대명사인 군대부터가 일본군 출신들의 기세가 대단했으니... 농담이 아니라 군사력도 친일파가 더 강해서 코웃음을 치던 사람들도 있었다. 심지어 보도연맹 학살에서도 김창룡처럼 독립운동을 분쇄하던 친일파들이 활약하기도 했다. [[https://www.seoul.co.kr/news/newsView.php?id=20170820500066|#]]] 독립운동가 후손의 75%가 월 소득 200만 원 미만이고 심지어 100만 원 미만이 30%였다는 한국일보의 통계 자료가 있다.[[http://www.hankookilbo.com/v/2c0deda8c2b249d4bc8ee4116ae0254d|#]] 그 이유를 정부 수립 초기의 형편 없는 대우로 꼽고 있으며, 개선된 이후에도 자손들에게는 부모의 [[가난]]이 [[대물림]]된 것으로 보인다. 정부 수립 초기에는 일부 권력형 친일 의혹이 있던 사람이 아니면 대부분 운이 좋은 사람들이 득세했지, 그 외에는 전부 가난 속에 살았다. 특히 전쟁 후에는 더더욱. 또한 친일 인명 사전에 등록된 1000여 명의 자손들을 조사한 결과 그들 대부분이 엘리트로서 부유한 삶을 살고 있다 한다.[[http://media.daum.net/culture/others/newsview?newsid=20150820200041006|#]] 일제의 지원을 받았더라도 친일파에서 친미파나 애국자로 포지션을 전환함으로써 살아남은 친일파 후손들도 많았다.[* 농담이 아니라 [[신기남]], [[김희선(정치인)|김희선]], [[이미경(정치인)|이미경]], 김무성처럼 조상의 초창기 독립 운동을 강조하거나 친일 의혹을 회피하려다 걸린 사람들도 있다.] 친일파들이 전쟁으로 망했다는 썰도 있으나 친일파와 관련있는 사람들을 보면 북한군이 오기 전에 오히려 이미 대비가 되어있어서 서민들과 다르게 오히려 끄떡도 하지 않았다. 노덕술 같은 경우처럼 독립운동가들을 고문하고 때려잡았던 악질 친일파들조차 대한민국 건국 후 정부로부터 훈장을 받기도 했다.[* 사실 어떤 사람들에게 6.25나 건국 후 사회 혼란은 권선징악은커녕 오히려 천재일우였다. 난세에는 특히 악마, 간웅, 인간쓰레기들이 절대 다수의 사람들에게 정당한 영웅이나 위인으로 행세할 수 있는 기회가 많은 법이다.] 나라가 어느 정도 안정되기 시작한 [[박정희]] 정부 때 대대적으로 독립운동가들을 발굴해 훈장을 수여하거나 그 후손을 독립유공자로 지정하는 작업을 했다. 대한민국 정부가 보훈 대상자에 대해서 신경 쓸 정도로 경제 기반을 이루어 낸 것이 1990년대부터였다. 개뿔도 없던 1960년대에는 국가 유공자라는 명패 하나 달랑 주고 끝냈다는 서글픈 이야기가 전해진다만 1960 ~ 70년대에도 자식이나 후손의 등록금 지원과 같은 최소한의 지원은 해줬다. 혜택을 받지 못한 정도는 아니다. 일단 그 대우가 적절한 수준이냐는 것과는 별개로 유공자들에 대한 대우는 나아지고는 있긴 하다. 2015년 6월에는 금전적인 지원도 6배까지 늘리고, [[해외]]에 있는 독립유공자 후손이 귀국해서 정착하는데 최대 7천만 원의 지원을 해주기로 결정했다. 제대로 증명만 되면 누구든 혜택을 받는다. 2019년에는 [[서울]]시에서 독립유공자 후손에 대한 지원을 확대하기도 했다.[[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20&aid=0003234539|#]] 그리고 일반 유공자도 마찬가지지만 독립유공자로 인정을 받기 위해서는 제대로 검증이 되어야 하는 게 현실이다. 이 때문에 [[안중근]]이나 [[윤봉길]]급 독립운동가 후손들은 별 문제 없이 혜택을 받지만, [[임시정부]]에서 군자금 운송하고, 연락책 노릇을 했던 분들의 후손들은 제대로 검증 받기 힘들다. 독립운동의 특성상 보안이 남다를 수밖에 없으니. 그나마 잡혀서 처벌받고 투옥된 기록이 있으면 낫지만, 007급의 활약으로 깔끔하게 해방을 맞이하신 분들은 당연히 후손들 입장에서도 조상님의 업적을 밝히기 몹시 힘들어진다. 안타깝지만 '''검증을 제대로 해야 하는 이유가 '가짜'가 혜택을 받아선 곤란하기 때문이다.''' 실제 독립운동가라고 서훈을 받았다가 나중에 친일로 전향한 게 밝혀져 서훈이 취소된 사례[* 윤치호의 사촌인 [[윤치영]]과 시일야방성대곡으로 유명한 [[장지연]], 고려대ㆍ[[동아일보]]의 창업주인 인촌 [[김성수(1891)|김성수]] 등이 취소되었다.]도 존재한다. 또한 친일파 후손들 만큼이나 독립운동가 후손들도 조상에 대해서 말하는 경우가 적다. 실제 가수 [[송대관]]이나 [[신해철]], [[서태지]], 하이트진로 사장인 양인집, 국방부장관 [[한민구]] 등은 본인들이 자수성가해서 그 사실이 나중에 알려진 경우다. 심지어 "조부는 그 정도인데, 너는 왜 그것밖에 못하냐?", "조부 만큼 해야 하지 않느냐?"...라는 소리를 들어서 압박과 스트레스를 받는 일도 많다. 실제 김구의 증손자인 김용만 씨는 어릴 때 이 때문에 부담이 많았다고 밝히기도 했다.[[http://www.afplay.kr/366|#]] 뿐만 아니라 혜택을 받아도 "조상 덕에 잘나가는 놈"이라고 비아냥 거리는 부류들 때문에 피곤한 게 현실이다. 정말 그런 놈들이 있는지 일반인들은 체감하지 못하겠지만, 실제 유공자들의 후손들이 이 문제 때문에 상당한 스트레스를 받는다. [[위선|입으로는 나라를 위해 애쓴 분들 챙겨주자고 하지만, 정작 눈앞에서 조상 잘 둬서 혜택 받고 꿀 빠는 사람을 보면 냉소적인 시선으로 바라보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 물론 대놓고 욕은 안 하지만, 대학 등록금 면제나 군복무 몇 달 방위/공익 등으로 간단히 해결 받는 것[* 이 문제와 관련해 이런 일도 있다. 훈련소에서 공익들 훈련 맡은 조교가 공익들 3주 훈련 끝내고 집에 가는 게 탐탁지 않게 여겨졌는지, 멀쑥하게 생긴 훈련병더러 "넌 무슨 병신이라서 공익으로 빠졌나?"라며 빈정거렸다. 공익으로 빠지는 게 대개 신검에서 떨어지거나, 아니면 전과 있거나 하기 때문. 열 받은 훈련병이 "우리 아버지 국가유공잡니다!"라고 쏘아붙였고 할 말 없어진 조교는 데꿀멍. 솔직히 데꿀멍했으면 양심 있는 것이다. 그런 아버지를 뒀으니 더더욱 현역에 가서 나라에 애국해야 하는 거 아니냐고 우기지 않은 게 다행이다.]을 탐탁지 않게 여기고 당사자를 [[아싸]]로 만들거나 [[뒷담화]]하는 경우가 흔하다. 아예 당사자 앞에서 '니 할아버지(or 아버지)가 잘난 거지, 니가 잘난 거냐?'며 날 선 소리를 부류들도 있다. 실제로 [[윤봉길]] 의사 장손녀인 윤주경 씨는 '''할아버지 팔아먹는 것처럼 보일까 봐 자기 입으로 자랑한 적은 없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실제로 해방되고 다들 어렵게 지내던 시절에 윤 의사의 미망인이 쥐꼬리 만큼의 도움을 받은 것조차도 남편 뼈를 팔아 먹고 산다고 수근거린 인간들이 있다고. 거기다 '''독립유공자 후손들을 공짜나 바라며 사는 사람들 취급하는 인간들도 있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다며 토로하기도 했다.[[http://blog.daum.net/_blog/BlogTypeView.do?blogid=0UcoW&articleno=1840&categoryId=4®dt=20140929113126|#]][[http://premium.chosun.com/site/data/html_dir/2014/09/28/2014092803647.html|#]] 가장 잘 알려진 독립유공자라 할 수 있는 윤봉길 의사 후손들이 이런 일을 겪었을 정도니, 후방 지원이나 좌파 계열같이 여러 가지 이유로 잘 알려지지 못한 독립유공자 후손들은 어땠을지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대표적인 좌파계열 독립운동가인 김원봉의 친인척들은 국민보도연맹 학살사건에 연루되어 사망한 친인척의 시신을 수습했단 이유로 옥고를 치른 사람도 있다.] 가장 가관인 것은 독립유공자 후손들의 대우를 잘해주자고 하면서도 자신들과 정치적 이해관계나 행보가 틀리다 싶으면 가차 없이 좋지 않게 취급을 하는 점이다. 김구 손자들처럼 뇌물을 받았다가 쇠고랑을 찬 것이라면 모를까.[* 당장 위에 윤주경만 해도 대선 때 [[박근혜]]를 지지했다고 특정 지지자들이 비판했고, 최능진의 아들 최필립도 정수장학회 이사장 맡았다고 욕 먹었다.] 위의 일련의 일로 고통을 받지 않았더라도 조상 후광 안 보고 열심히 사는 게 옳다고 보고 조상 이야기 하지 않는 사람들도 있다. 사실 대다수 독립운동가들이 무언가 대가를 바라고 활동한 것이 아닌, 순수한 신념에서 활동한 것이기 때문.[* 해평 [[이재현(독립운동가)|이재현]]의 경우 ‘투사는 지분을 요구하지 않는다’라고 말했다.] 이에 후손들 역시 자수성가 하거나 그냥 말없이 평범하게 살고 있는 사람들이 많은 것이다. 오히려 이런 분들은 보상 문제가 언급되면 '''"금전 따위로 선조의 업적을 평가하려 들지 마라"'''며 불쾌하게 여기기도 한다. 괜히 윤주경이 친일파 후손 돈 삥뜯어서 독립운동가 후손들 도와주자는 일각의 주장에 회의적인 것이 아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