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독립유공자 (문단 편집) === 왜 이런 일이 벌어졌는가 === '''우리 손으로 독립을 이뤄내지 못했기 때문'''이라 보는 의견이 많다. 독립 운동가들의 숭고한 뜻과 희생 정신은 존경 받아 마땅하고, 그들의 피땀 어린 활동이 대외적으로 주목 받은 것은 사실이나, 결국 한국은 [[제2차 세계 대전|일본을 물리친 미국과 소련의 힘으로 독립]]되었다.[* 카이로 선언 당시만 해도 루즈벨트는 한국 독립에 대해서 시큰둥 한 편이었다. 회담 자체가 승전 후에도 영토를 확장하지 말자는 합의를 위한 것이었는데, 장제스의 한국 독립 주장은 세력권 확보라는 의도가 뻔히 보였기 때문이다. 결국 최종안에서는 '적절한 시일 안에'라는 토가 붙었고, 일본이 항복하기 직전에 소련이 남하하면서 본의아니게 남북분단으로 이어지게 된다.] 즉, 나라를 건국하는 과정에서 우리가 생각하는 바른 길보다는 당시 국제 정세에 맞게 처리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애꿎게도 38선으로 분단된 한반도에는 미소 대결 국면으로 인한 냉전의 기운이 감돌았고, 미군정은 편한 행정처리를 위해 친일반민족행위자들을 관리들로 다시 등용했다. 친일 세력의 손에 국가 권력이 쥐어졌는데, 이들을 청산한다는 목표는 당연히 눈 가리고 아웅이 될 수밖에 없었다. 김구가 불가능에 가까운 한국광복군 손으로[* 광복군의 [[서울 진공 작전]]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광복군만으론 절대 불가능한 일이나 마찬가지였다.] 독립을 이뤄내는걸 못했다고 한탄한 것은 다 이런 까닭이었다.[* 나치 부역자 청산을 이뤄냈다고 평가받는 [[프랑스]]조차 자력([[자유 프랑스]], [[레지스탕스]])으로 나치를 몰아낸 것이 아니라 미국과 영국 등의 연합군이 도와준 덕에 가능했다. 그나마 같이 독일을 상대했던 나라라고 겨우 승전국 반열에 들긴 했지만, 필사적으로 핵무기를 개발한 까닭도 강대국 재진입을 위함이었다. 더구나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것과 달리 프랑스 역시 나치 부역자와 비시정부 관료들을 완전히 청산하지 못했다. '힘없는 사람들만 독일군에게 빵 팔았다', '독일 병정과 잤다'하면서 모진 수난을 당했고, 이들을 처벌한 재판관들의 상당수가 비시정부의 법관들이었다.(...) 이 때문에 프랑스 내에서도 이런 청산에 대해서 비판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물론 냉전이 끝나고 제법 나라 꼴을 갖춘 후에도 독립운동가들이 대접을 받지 못하는 것은 문제가 있지만, 그들을 대접할 절호의 기회는 이미 날아간 지 오래다. 한편으로 '''우리 손으로 독립을 이뤄냈어도 똑같은 상황이 벌어졌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대표적인 예로 폴란드가 있다. 폴란드는 2차 세계 대전 당시 독일에 점령 되자 국외로 탈출한 자유 폴란드군 25만[* 당장 드 골의 자유 프랑스군보다 규모가 컸다.]과 수십만의 [[폴란드 지하국|국내 저항군 조직]]이 나치를 상대로 싸웠다.[* 그 외에 소련군 소속으로 독일과 싸운 폴란드 동부군도 있었는데, 이들은 폴란드 공산정권이 지휘하는 폴란드 인민군의 기간세력이 된다.] [[자유 폴란드군]]들은 전후에 서방 진영이 폴란드 공산정부를 정식으로 승인하며 철저히 배신당했고, 귀국한 장병들도 서방 끄나풀이라며 푸대접받았다. 특히 소련은 친소파를 뽑는 데 과거를 크게 따지지 않았고, 실제 나치 완장 차다가 빨간 완장으로 갈아탄 기회주의자들도 상당히 많았다.[* 소련은 [[국가인민군|동독 인민군]](Nationale Volksarmee)과 [[https://en.wikipedia.org/wiki/Volkspolizei|동독 인민경찰]](Deutsche Volkspolizei)을 조직할 때도 나치당원 출신을 배제하지 않았으며, 폴란드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예를 들어 [[로만 폴란스키]]의 영화 [[피아니스트]]를 보면 주인공을 돕는 유대인 나치 부역자가 나오는데 실제로 이사람은 전후에도 살아남았고, 재빠르게 폴란드에 진주한 소련군 편에 들어가서 소련군 앞잡이가 되었다고 한다.] 이런 기회주의자들이 애국 지사들을 반동으로 때려잡고 감시했기 때문에 귀국을 후회한 장병들도 많았고, 이 때문에 연합군의 푸대접에 불구하고 귀국을 포기하고 영국 등에 정착한 폴란드인들도 많았다. 실제로 폴란드 망명정부는 바웬사 집권으로 민주화가 되기 전까지 런던을 떠나지 않았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결과적으로 독립유공자들과 그 후손들이 제대로 대접 받지 못한 건 권력자와 그 지지자들의 '''정치적 논리''' 때문이다. 친일파, 그것도 비교적 젊은 층들이 해방 이후 기용될 수 있었던 것은 서둘러 정부를 수립하고 나라의 기틀을 잡아야 한다는 생각에 입각한 미군정과 [[이승만]]을 비롯한 [[http://pgr21.com/pb/pb.php?id=ace&no=1441|여러 독립운동가들의 선택 때문이었다]]. 오히려 독립운동가들이 그런 선택을 했다는 것이 아이러니하게 들릴 수 있지만 사실이다. 건군 초기 국군에서 만주군이나 일본군 출신 친일파들이 입대할 수 있었던 것도 [[이범석]] 장군이 "젊은 놈들은 늙은 것들에 비해 일제에 물들지 않았을 것이다" 라는 판단에 기용된 것이다. [[김석원]]이 경력이 새파란 [[채병덕]] 같은 부류와 알력을 벌였던 것도 다 그 때문.[* 실제 창군 초기 사단장 등 고위 간부의 경우 지금과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나이가 젊다. 그만큼 인재가 부족하기도 했지만, 한편으로 최대한 구세대를 배제하려는 의도가 있었던 것이다.] [[조만식]]도 만주군이나 관동군 출신의 청년들을 데리고 다녔다. 대표적인 인물이 [[백선엽]]이다. 독립운동가들은 극심한 좌우 대립 속에서 좌익이든 우익이든 자신의 위치를 잡은 후 친일 경력이 있는 이들을 어찌 되었든 나라 일에 끌어들였다. 독립운동가들은 절대 이상에만 빠진 이상주의자나 신념에만 빠져 현실을 못 보는 사람들이 결코 아니었고, 국가 기틀 잡기나 국제 정세의 쓴맛을 아주 깊이 맛본 사람들이었다. 외국에서 활동하던 독립운동가들, 특히 임시정부 관계의 인물들의 경우, 나라 자체가 없을 경우 국제사회에서 어떤 취급을 받는지 직접 경험했기 때문에 광복 후 나라의 치안과 국방을 우선으로 여겼다. [[대한민국 해군]]의 아버지였던 [[손원일]] 제독은 [[대한민국 해병대|해병대]] 창설을 위해 [[신현준(군인)|신현준]], [[김석범]]과 같은 일본 해군, 만주군 출신들을 기용할 수밖에 없었으며, 역시 [[대한민국 공군|공군]]의 아버지인 [[최용덕]] 장군 또한 공군 창설을 위해 [[김정렬(1917)|김정렬]]과 같은 일본 육군항공대 출신들을 끌어들일 수밖에 없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