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독소전쟁 (문단 편집) === 특징 === * '''유례 없는 대규모 병력 동원''' - 서부전선의 경우 가장 유명한 [[노르망디 상륙작전]]만 하더라도 연합군과 독일군 양측에서 야전군 병력들을 동원했고 [[아르덴 대공세]] 때가 되어서야 1개 집단군 규모의 병력들이 서로 맞붙었다. 그 유명한 사막의 여우 [[에르빈 롬멜]]도 몇 개 사단 규모의 아프리카 군단을 지휘한 수준이었다. 반면, 독소전쟁은 '''[[집단군]] 단위의 군 병력들이 총동원되었으며''' 특히 소련군은 어마어마한 피해에도 끊임없이 사단을 편성해 '''10개 전선군(집단군)을 투입했을 정도였다.''' 조공이나 기만 작전만 하더라도 '''몇 개 [[야전군]] 단위에서 1개 집단군 병력들이''' 동원되어 전투를 치렀을 정도로 독소전쟁의 규모는 차원이 달랐다. * '''대규모 기동전''' - 독일군은 대부분의 전차와 항공기들을 동부전선 방면에 투입했으며 소련은 어마어마한 공업 생산력 그리고 [[랜드리스]]로 마련한 수 많은 전차와 항공기들을 전부 독일 전선 방면으로 투입했다. 이러한 상황이다보니 [[중일전쟁]]이나 [[서부전선]]에선 꿈도 못 꿀 '''수천 대 단위의 전차들이 동원되는 대규모 전차전이 여러 번 벌어졌으며''' 기동 전력들이 총동원되다보니 병력의 기동 범위도 크게 넓어졌다. 그 덕에 독일군이 독소전쟁 이전에 보여주었던 [[전격전]]과는 차원이 다른 기동전이 벌여졌다. [[바르바로사 작전]] 당시 독일군은 '''400만 명의 소련군을 섬멸하며 1,500km의 거리를 진격해 모스크바 코앞까지 도달했으며''' [[바그라티온 작전]] 당시 소련군은 단 2개월 만에 '''집단군 단위의 독일군 병력들을 갈아버리며 700km를 주파했다.''' 이러다 보니 지휘관들의 작전 역량도 크게 발달했다. 독일군은 [[임무형 지휘체계]]를 통해 하위 지휘관들이 자유롭고 창의적인 전술을 구사하게 하여 소련군의 반격을 격퇴했으며[* 예외적으로 [[발터 모델]]은 명령형 지휘체계를 선호했다.], 소련군은 [[대숙청]]과 체계 개편의 성과가 보이는 대로 곧장 [[작전술]] 전투 체계를 통해 독일군을 패퇴시키며 독일로 진입했다. * '''대규모 화력''' - 소련의 경우 포병을 중시한 덕에 수많은 [[카츄샤 다연장로켓]]과 곡사포들이 공세 이전에 독일군 방어선에 준비 포격을 가했고 '''포병사단까지 편제되어 각 제대에 연대급 단위 하위부대가 배속되는 형태로''' 운용되기도 했다. 이러다 보니 독일군은 소련군의 어마어마한 포격에 큰 피해를 입어야 했다. 독일의 경우도 소련의 주요 대도시를 점령하기 위해 전투 시 가용가능한 항공기들을 총동원해 [[초토화]]시켰고, 그래서 [[레닌그라드]]와 [[스탈린그라드]]를 비롯한 소련의 주요 도시들은 완전히 폐허가 되었다. 또한 [[구스타프 열차포]]와 [[칼 자주박격포]]를 비롯한 수천 개의 화포를 동원해 세바스토폴 요새를 공략하기도 했다. 서부전선과는 차원이 다른 고화력의 전투가 벌여지다보니 주요 전장이었던 독일 동부 도시와 폴란드, 소련의 주요 도시들이 완전히 쑥대밭으로 전락했다. * '''역사상 유례 없는 [[총력전]]''' - 독소 양측의 지도자들은 전체주의적인 독재자였고 국가를 위해서든, 자신의 정권을 위해서든 간에 승리 이외의 다른 선택지는 없었고 그 상황에서 그야말로 국가의 모든 것을 쏟아부었다. 소련은 '어머니 러시아'와 조국을 지키기 위해 모든 인민들이 나서야 한다고 선전했고 자기 가족과 자기 땅을 침범한 적은 막아야 한다는 인식이 강했던 데다 독일군이 저지른 전쟁범죄를 본 소련인들은 너도 나도 조국을 지키기 위해 나섰다. 대도시에서 벌어진 주요 전투마다 소련 인민들이 나서서 방어진지 공사를 도와주었으며 시골의 경우 [[청야전술]]을 실시해 그동안 정신적 지주로서 수백 년을 버텨왔었던 고향 마을들을 스스로 불태워 없애버려 독일군이 물자를 현지 조달하지 못하도록 막았다. 소련군 패잔병과 일부 민간인들은 총기를 들고 [[빨치산]]이 되어 독일군을 괴롭히고 다녔다. 우랄로 이전된 군수공업단지에선 모든 노동자들이 총동원되어 군수무기들을 생산했고 [[여군]]들도 100만 이상이 동원되어 단순히 지원 부대뿐만 아니라 저격수, 전차병, 조종사 등 일선 전투병과에 배치되어 맹활약했다. 심지어 범죄자들도 [[형벌부대]]에 배치되어 독일군의 총알받이가 되었다. 독일의 공습을 피하고자 서부의 공업지대를 통째로 뜯어가 [[우랄 산맥]] 동쪽으로 이전시킨 것은 물론이고 수백만의 노동자들이 전부 군수 공장에 소집되어 전쟁물자 생산에 모든 것을 걸었고, 주요 교통망과 철도도 전부 소련군의 보급로 및 렌드리스 공급망으로 전환되었으며 다른 인민들도 방어선 구축과 소련군에 대한 비군사적 지원에 그야말로 총동원되었다. 독일의 경우 강탈한 프랑스의 열차 3분의 2를 동부전선 방면에 투입했고 [[비시 프랑스]]로부터 막대한 전쟁자금을 뜯어냈다. 다른 점령지에서도 해당 점령지의 자원과 국부를 몽땅 동부전선에 투입했고 그 과정에서 점령지들은 경제적 타격을 입었다. 독일 역시, 전쟁의 정당성을 끊임없이 선전했는데 볼셰비키와 스탈린의 철권통치로부터 광활한 영토를 수복하고 러시아인들을 해방하러 간다는 프로파간다를 내세웠으며 일단 겉으로는 단순히 불법 침략을 자행한 점령군 행세를 선전하지는 않았다. 나중에 소련이 반격하여 독일이 방어하는 입장이 되었을때는 초기 독소전 당시 소련 인민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총력전에 대다수의 독일 국민들이 기꺼이 협력했다. 결국 전쟁 막바지가 되자 장애인과 노인, 심지어 어린이까지 몽땅 동원해 [[히틀러 유겐트]], [[국민돌격대]]에 집어넣어 소련군을 어떻게든 막으려고 했다. * '''[[제노사이드|절멸전쟁]]과 피의 보복''' - 독소전쟁은 [[게르만족]]이 [[슬라브족]]이 사는 [[동유럽]] 지역을 정복하고 그들을 노예로 삼는 정복전쟁 수준을 넘어서 상대 민족을 말살하여 아예 지구상에서 지워버리려는 절멸전쟁이었기에 온갖 잔혹한 일들이 벌어졌다. 독일군은 [[바르바로사 작전]] 이후 포로로 잡은 수백만 명의 소련군 병사들을 그대로 굶겨 죽이거나 강제수용소로 보내 가스실에서 죽이거나 작은 건물에 포로를 무더기로 집어넣고 입구를 막은 뒤 산 채로 불태워죽이거나 쪄 죽였고 이에 그치지 않고 야전 중 붙잡은 소련군이나 빨치산 포로에게 분풀이로 산 채로 내장을 뽑거나 톱으로 사지를 자르고 신체를 훼손하는 등 온갖 만행을 저질렀고 친위대와 국방군 모두 이러한 행위를 저질렀다.[* 일례로 끈질기게 독일군에게 저항하다가 붙잡힌 [[여군]] 포로 타티야나 바람지나(Tatyana Baramzina)는 독일군에게 잔인하게 구타당하고 산 채로 눈이 파내졌으며 개머리판으로 가격당해 온몸에 골절상을 입었고 총검으로 난도질당한 뒤 대전차소총으로 처형당했다. 이외에도 증언에 따르면 성기와 눈에 총검이 박힌 채 살해당한 여군 포로의 시신을 목격했다는 증언이 있는 등 독일군은 모든 소련군 포로에게 잔인했으나 특히 이데올로기의 문제로 여군에게 더더욱 잔혹했으며 애초부터 여군 포로를 잡으려 하지 않고 남김없이 학살했다.] 독일군의 전쟁범죄에 분노한 현지 민간인들이 [[파르티잔]] 운동을 벌이자 민간인을 상대로도 광범위한 보복학살을 수행했다.[* 예를 들어 벨라루스에서 독일의 파르티잔 토벌전으로 발생한 사망자의 90%가 비무장 민간인이었다. 소련 영화 [[컴 앤 씨]]를 보면 독일군이 수행한 무자비한 학살이 잘 드러난다.] 이러한 독일군의 만행에 분노한 [[소련군]]과 [[빨치산]]들은 독일군 포로를 잡으면, 똑같이 성기와 같은 신체 중요부위를 잘라내거나 십자가에 팔다리를 못박거나 안구를 녹여버리고 망치로 이빨이나 턱을 박살을 낸 뒤에 죽이는 등 보복성의 여러 잔혹한 행위를 저질렀다. 또 독일군 포로들은 전쟁 피해를 복구하기 위해 혹독한 환경 속에 강제 노동에 동원되어야 했고 그렇기에 소련군에 붙잡힌 독일군 포로의 생존율은 서부전선의 독일군 포로보다 훨씬 적었다. 그리고 상부 차원의 지시는 아니었지만 일부 소련군 병사들은 독일 본토에 진주한 뒤로 독일 민간인에 대한 [[약탈]], [[학살]], [[강간]]을 저지르기도 했다.[* 소련군은 이러한 보복행위를 상대를 가리지 않고 무차별적으로 자행하여 독일인뿐만 아니라 폴란드인, 동유럽인도 엄청난 피해를 보았으며 심지어 원수를 진 적도 없는 같은 연합군 소속이었던 프랑스군 포로와 벨기에인 인부를 무차별 학살한 사건도 있었다.] 이러한 상호보복의 특성을 띈 전쟁이었기에 여러 문화 매체들에서 독소전쟁은 잔혹함과 비극의 극치를 달리는 전쟁으로 묘사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