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독소전쟁 (문단 편집) ==== 소련 ==== * 소련 측 피해 ||<-4>A: 군인 피해|| ||<-3>동원군인 총수||29,574,900|| ||<-3>동원군인 총수(기타 정부부처 포함)||34,476,700|| ||<-3>총 손실(사망/전쟁포로/행방불명)||11,444,100|| ||<-3>전사, 부상으로 인한 총 사망자 수||6,885,100|| ||<-3>행방불명/전쟁포로 총수||4,559,000|| ||<-3>1941~1945년 사이의 사망자 총 수||8,688,400|| ||<|4>의학상||<-2>사상자 총수||18,344,148|| ||<-2>부상/심리장애||15,205,692|| ||<-2>질병||3,047,675|| ||<-2>동상||90,880|| ||<-4>B: 민간인 인명 손실 추산|| ||<-2>소콜로프(Sokolov)||민간인 사망자 총 수||16,900,000|| ||<-2>코롤(Korol)||민간인 사망자 총 수||24,000,000|| ||<-2>코즐로프(kozlov)||인구학적 총 손실||40,000,000|| ||<-2>쿠르가노프(Kurganov)||인구학적 총 손실||35,500,000|| 소련은 전쟁 중 공식적인 수치로 '''2,900여만 명'''이 사망했으며[* 이 수치는 정확하지 않다. 1945년 종전 당시에는 2,000만이라고 주장하였고 현재 역사가들은 종전 이후 인구 성장률과 남녀 비율을 살펴 볼 때 최대 4,000만의 인명 손실을 주장하기도 한다. 주요 전장이었던 [[벨라루스]]와 [[우크라이나]]에서는 아직도 '''사람의 [[시체]]로만 이루어진 [[지층]]이 존재'''한다.], 이는 공식적으로 인정되는 2차 세계 대전 사망자 5,000만 명의 60%에 달하는 수치다.[* 그러나 이 자료에 의하면 소련인 사망자는 2,000만명이다.][* 중국의 피해는 당시 중국 행정력이 헬게이트라서 정확히 집계되지 않았으며, 최대치는 중국만 해도 3천만 이상이 교전, 학살, 기근으로 인해 죽었다. 모든 국가의 사상자를 최대치로 계산하면 '''1억 2,000만 명'''이 2차 세계대전에서 죽었다. 물론 이 숫자는 행정적 과장, 기아와 전염병, 미등록 인구, 그리고 전쟁이 아니었어도 발생하는 자연사, 병사 등 비전쟁 요인도 포괄하는 소수설임을 고려해야 하며 가장 통설은 7,000만 명 안팎으로 파악한다.] 인구가 적지 않았던 40년대 [[일제강점기]] 하의 한반도 인구가 2,500만 명, 세계 인구는 25억 명 정도였음을 감안하면 '''일반적인 인구를 가진 국가가 소멸할 정도'''의 인적 피해를 입은 것이다. 소련에서 동원된 남녀 3,450만 명 중 약 84%가 죽거나 다치거나 사로잡혔다. 민간인 약 2천만 명, 군인 약 1,128만 명이라고 하는데[* 러시아에서는 다년생 검사 기준으로 3,700만 명까지 추산하고 있다.] 이 수치라면 [[바르바로사 작전]]이 개시된 1941년 6월 22일부터 베를린이 함락되어 사실상 독일이 끝난 45년 4월 30일까지 하루 평균 민간인 약 14,000명,[* 이걸 계산하면 '''분당 약 10명'''이 죽었다는 계산이 나온다.] 군인 6,500명이 죽었다. 하루 평균 2만 명이 넘는 수치다. 역사학자 제프리 A. 호스킹(Geoffrey A. Hosking)에 따르면 소련인은 높은 사망률로 인해 1940년대 말의 젊은이는 적었고, 1939년 이후 소련이 예측한 인구인 4,500만-5,000만 명보다 적을 정도로 전체 손실은 높았다. 또한 전쟁으로 인해 [[여초]] 현상이 대단히 심각하게 발생했는데, 종전 후 소련 인구 중 10대 후반~40대 남녀 성비가 4:7이었다. 인구손실은 1950년대 [[베이비붐]]으로 대강 해결했지만[* 다만 청년 남성의 절대적 부족의 영향으로 베이비붐 수준은 미국에 비해서 그리 강하지는 않았다. 미국에서 출산율 3명대 후반을 기록할 동안 소련은 출산율 3명대 초반 정도 기록하던 수준이었다. 전쟁 전 1937년의 5명대 출산율, 1940년의 4.4명 출산율도 회복하지 못했다.] 영향이 꽤나 오래 갔으며 1930년대-40년대 중반에 출생한 사람 가운데서 한창 자랐을 때 아버지 없이 자란 경우도 많다. 물론 1960년대 이후에는 산업계의 [[여초]] 현상은 해결되었지만 음주문화의 영향으로 현재도 러시아는 상당히 심각한 수준의 여초 국가이다. 게다가 소련은 전쟁으로 [[모스크바]] 서쪽의 거의 모든 기간 설비와 공업 시설이 파괴되었으며 농지와 마을, 인프라의 파괴도 심각했다. 도시 1,710개, 촌락 70,000여 개, 2,508개 [[교회]], 31,850개 산업 시설, 4만 마일(64,373.76km)의 철도, 4,100개 철도역, 4만 개의 [[병원]], 8만 4,000개 [[학교]], 4만 3,000개 [[도서관]]이 초토화되었다. 집을 잃은 인원은 2,500만 명 정도였고, 국부의 약 1/3 이상이 손실되었다. 가히 멸망되지 않은 것이 정말로 기적인 나라였다. 이처럼 [[나치 독일]]은 소련에서 종래의 [[민간인 학살]], [[강간]]을 넘어 아예 슬라브인과 유대인을 열등 민족으로 낙인찍어 독일인의 노예로 삼거나 절멸하려고 했다. 그 과정에서 자행된 전쟁범죄는 상상을 초월하며, 독소전쟁 동안 소련 [[민간인]] 사망자만 하루 평균 1만 4천명, 도합 2천만명 이상 발생했고, 심지어는 학살된 사람들이 한 곳에 묻혀서 해골과 시체로 지층이 만들어질 정도였다.[* [[발트 3국]]은 그나마 나은 편이었다. 주 민족이 말살 대상인 슬라브족이 아니라 [[아리아인]]으로 간주했던 [[발트족]]-[[핀족]]이기 때문이었다. 또한 이들은 독일 이전에 자신들을 공격해 강제로 합병한 소련을 침략자로 봤고 소련군을 몰아낸 독일을 해방자로 봤기 때문에 독일 당국에 협력했다. 소련에서 나치 [[부역자]]들이 제일 많았던 곳도 이 나라들이었다. 하지만 이 나라들도 [[레벤스라움]]의 일원이었으므로 말살까지는 아니더라도 탄압과 강제 동화의 칼날은 피할 수가 없었다.] 또한 수많은 소련의 여성과 여군 포로들이 독일군에게 [[강간]]을 당했고 대부분은 강간 후 잔혹한 [[성고문]]을 당한 뒤 살해당했다. 독일 측 기록에 의하면 무려 1,000만 건에 달하는 강간 사례가 보고되었으며 독일군과 소련인 여성 사이에 최소 75만에서 100만명에 달하는 사생아가 태어났다. 이런 독일군의 범죄를 다루는 [[독일 영화]] [[베를린의 여인]]에는 "독일군이 소련에서 한 일의 1/10만 소련군이 해도 독일인은 다 죽는다"는 대사가 있을 정도다. 소련군의 군사적 피해도 막대했다. 전차, 돌격포, 자주포만 '''9만 6,500대를 손실했으며''' 3만 7,000여대의 기타 기갑 차량도 손실했다. 항공기도 10만 2,600대를 손실하는 어마어마한 피해를 입었다. 그럼에도 소련은 어마어마한 생산력으로 무기들을 계속 생산하고 거기다가 미국과 영국의 [[랜드리스]]를 통해 군사력과 전투력을 금방 회복할 수 있었다. 특히 우랄로의 산업 이전을 통해 소련 군수공장들은 안전하게 대규모의 전쟁 장비들을 생산할 수 있었고 연합군에게 전략 폭격을 두들겨 맞아 초토화되던 독일의 군수 공업 역량보다 당연히 우위에 있을 수 밖에 없었다. 결국 이러한 역량 및 미영의 지원을 기반으로 소련군은 나치 독일에 대한 반격을 성공하다 못해 나치의 심장부인 베를린까지 점령할 수 있었다. 다만 이 경험이 너무 강력한 [[트라우마]]였던 탓인지, 소련은 미국보다 경제력이 부족했음에도 미국과 벌이는 군비경쟁에 지나치게 많은 비용을 쏟아부어 남은 50년의 [[소련/경제|소련 경제]]에 큰 부담을 주었다. 일명 포위 심리([[피포위 의식|Siege Mentality]])라고 하는 소련의 심리 상태는 [[러시아 내전]]과 함께 [[소련/외교|소련의 외교 정책]]에도 큰 영향을 끼쳐 몇 번의 치명적인 과오와 패권주의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말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