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독소전쟁 (문단 편집) ==== [[동유럽]] [[유대인]] [[사회]] 파괴 ==== 에스토니아를 제외한 나머지 나라들 모두 독일의 홀로코스트로 인한 유대인 사망자가 민간인 사망자의 과반수를 차지했다. 그 결과 동유럽의 도시문화와 상업, 엘리트층에서 무시할 수 없는 존재감을 자랑하던 유대인 공동체가 거의 완벽하게 소멸되었다.[* 예를 들어 전전에 335만에 달하던 폴란드 유대인은 오늘날 많이 잡아도 2만 명에 불과하다. 30만에 달하는 생존자 대부분은 전후 외국으로 이주했다.] ||<-4>동유럽 유대인 사망자의 국적별 분류(1939년~1945년)[* 데이비드 크로우(David M. Crowe)의 The Holocaust: Roots, History, and Aftermath(2008)를 따름.]|| ||국적||전쟁 전 인구||사망자 수||인구 대비 사망자(%)|| ||[[폴란드 제2공화국|폴란드]]||3,500,000||3,000,000||86%|| ||[[체코슬로바키아 제1공화국|체코슬로바키아]]||254,310||180,000||71%|| ||[[헝가리 왕국(1920년~1946년)|헝가리]]||725,000||569,000||78%|| ||[[루마니아 왕국|루마니아]]||756,000[* 1930년 기준.]||287,000||38%|| ||[[유고슬라비아 왕국|유고슬라비아]]||82,242||67,438||82%|| ||[[소련]]||3,020,000[* [[독소 불가침 조약]]으로 획득한 [[발트 3국]] 및 폴란드 동부, [[베사라비아]] 제외. 중앙아시아 및 카프카스 유대인을 포함함. 소련 서부에 거주하던 유대인 150만 명은 동쪽으로 피난하는데 성공했다.]||700,000||23%|| ||[[에스토니아 제1공화국|에스토니아]]||4,500||2,000||44%|| ||[[라트비아 제1공화국|라트비아]]||95,000||85,000||89%|| ||[[리투아니아 제1공화국|리투아니아]]||168,000||130,000||77%|| ||[[불가리아 왕국|불가리아]]||50,000||7,335||15%|| ||총계||8,655,052[* 총계에 나타난 유대인 인구는 약간 중복집계되거나 과장되었다. 1938년 헝가리 유대인은 40만명이지만(유대인 기독교도 제외) 1941년까지 이웃국가들의 영토를 병합하는 과정에서 32만명 증가했다. 폴란드 유대인은 집계 기준에 따라 330만 명으로 줄어들기도 한다. 이것을 감안하면 전쟁 전 동유럽 유대인은 최소 800만에 달한다고 볼 수 있다.][* 오늘날 동유럽으로 간주되는 독일의 [[오데르-나이세 선]] 이동지역의 유대인은 포함되지 않았다. 독일 유대인은 1933년 나치가 정권을 잡자 대거 이주하여 50만 명에서 1939년 20만 명까지 줄어들었다. 그 중 18만 명이 홀로코스트에서 학살당했다.]||5,027,773||58%|| 1939년 전 유대인은 대부분 동유럽에 거주했다. 독일과 그 동맹국은 1939년 체코슬로바키아와 폴란드 전역을, 1941년 유고슬라비아 전역과 소련 서부의 상당부분을 점령하여 이 지역에 거주하던 유대인 최소 650만 명의 생사여탈권을 쥐게 되었다.[* 위의 총계에 나타난 유대인 인구 중 중복집계되거나 약간 과장된 유대인 50만명과 소련군을 따라 동쪽으로 피난한 유대인 150만 명을 제외함.] 독일군을 뒤따르는 기동학살부대 [[아인자츠그루펜]]은 마치 군사작전을 벌이듯이 유대인을 닥치는 대로 사살하였다. 1943년 봄까지 유대인 최소 100만 명이 이들에게 학살당했다.[* [[바비야르 학살]]은 수많은 학살 중 하나일 뿐이다. 이외에도 파르티잔이나 파르티잔으로 의심되는 주민들도 수십만이나 학살당했다.] 독일 당국은 유대인을 직접 살육할 뿐만 아니라 각지에 설치한 게토로 몰아넣었다. 독일의 폴란드 및 소련 점령지에 설치된 게토만 1,000개가 넘었다. 여기서 유대인들은 노예노동에 시달리면서도 생존이 불가능할 정도로 적은 식량을 배급받았고, 수십만 명이 굶주림과 질병 또는 독일 관헌의 자의적인 학대와 살해로 죽어갔다. 전쟁 초 기동학살부대의 학살과 게토 수립에 초점을 맞추었던 독일의 유대인 정책은 1942년 1월 [[반제 회의]]에서 유대인의 절멸로 방향이 바뀌었다. 독일은 폴란드 지역에 [[절멸수용소]] 6개소를 설치하고 그곳으로 게토 안에 가둬 놓았던 희생자들을 이송했다. 이곳에서만 270만 명이 학살당했는데 절대다수는 유대인이었다. 절멸수용소가 아닌 [[강제수용소]]에서도 수십만 명이 학대로 사망했다. 유대인 학살은 독소전쟁의 패색이 짙어져도 계속되었는데, [[바그라티온 작전]]과 [[노르망디 상륙작전]]의 성공으로 전쟁의 결판이 뻔히 보이는 1944년에도 [[헝가리 국민단결정부|헝가리를 사실상 괴뢰화하고]] 헝가리에 남아있던 유대인들을 대부분 죽였다. 이렇듯 독일은 __'''[[제2차 세계 대전]]에서 패배하는 그날까지'''__ 유대인 학살을 포기하지 않고 계속 진행했다. 혹자는 홀로코스트가 다른 학살과 결을 달리하는 부분이 바로 이 지점이 있다고 본다. 프랑스 철학자 베르나르앙리 레비(Bernard-Henri Levi)[* [[1948년]] [[프랑스령 알제리]]에서 출생한지 몇달 후 유럽으로 이주한 [[세파르딤]] 유대인이다. 1970년대 프랑스 신철학자(Nouveaux Philosophes)들의 기수로 유명하다. 현실참여적 지식인으로 유명하며 동시에 비슷한 유형의 지식인이 듣는 욕도 먹는 논쟁적 인물이다(...)]에 따르면 __군수품을 싣고 전선으로 달려야 할 기차가 유대인을 싣고 절멸수용소로 향했다.__ 즉 패색이 짙어져도 독일은 전세를 뒤집는 것보다 유대인 학살하는데 열중했다는 것이다. 패배가 가까워지자 독일은 절멸수용소와 강제수용소의 증거를 인멸하고 아직 남아있던 유대인들을 서쪽으로 강제이주했다. 이 과정에서 또다시 유대인 수십만 명이 길거리에서 죽어갔다. 1945년까지 홀로코스트로 발생한 유대인 사망자 600만 중 500만 명이 동유럽 유대인이었다. 이것은 소련에 거주하여 살아남은 유대인들을 제외한 숫자로, 독일 점령지에서 유대인의 생존률은 극악에 가까웠다. 특히 폴란드와 발트 3국에서 유대인의 사망률은 80~90%에 달했다. 루마니아는 의외로 사망자가 낮은데, 루마니아는 자국 내의 유대인은 보호했지만 대신 대소전쟁에서 얻은 동유럽 점령지역에서 거주하던 유대인들은 무자비하게 학살했다. 불가리아 역시 제2차 세계대전 초기에 유고슬라비아와 루마니아, 그리스 점령지의 유대인들을 나치독일군에게 인계하여 아우슈비츠나 트레블링카 등 절멸수용소로 끌고가거나 탄압하기도 했으나 당시 국회의원이었던 디미터르 페셰프와 동방정교회 등 종교계에서 반유대주의 정책에 대해 철회할 것을 요구하는 탄원서를 당시 불가리아의 보리스 2세 국왕에게 보내어 이에 당 보리스 2세 국왕이 이를 승인하면서 이후 유대인들을 보호하는 입장으로 선회하여 나치 독일과 대립각을 세웠다. 동유럽의 홀로코스트는 독일에 의해서만 저질러진 것은 아니었다. 동유럽 친독국가의 국가기관과 현지인 부역자들도 유대인 학살을 저질렀다. 가장 가혹한 학살을 벌인 루마니아와 헝가리는 독소전쟁 초부터 독일이 나설것도 없이 진군로 주변의 유대인들을 잔혹하게 학살했고, 특히 루마니아군에 의한 피학살자는 적어도 20만에 달한다. 독일의 점령지를 제외하면 루마니아의 점령지만큼 유대인의 생존률이 낮은 곳은 없었다. 헝가리는 루마니아보단 자제하는 편이었지만, 1944년 독일이 [[호르티 미클로시]]를 내쫓고 헝가리를 점령한 후에는 독일과 헝가리 관헌[* [[살러시 페렌츠]]의 [[화살십자당]] 정권.]에 의해 헝가리 유대인들이 학살당했다. 여기서는 헝가리 유대인뿐만 아니라 헝가리만큼은 독일의 마수로부터 안전하다고 믿어 피신한 다른 국가의 유대인들도 학살되었다. 우크라이나와 발트 3국에서는 현지인 부역자들이 자원하여 독일의 유대인 학살을 돕거나 아예 직접 학살하는 경우도 보였다. 예를 들어 우크라이나에서는 독일이 진군하기 전에도 현지인이 들고 일어나 [[르비우]] 등지에서 유대인 수천여 명을 학살했고, 독일이 점령한 후에는 보조경찰을 구성하여 유대인 학살을 보조했다. [[게토]] 이송 도중에 또는 게토에서 탈출한 유대인들도 현지인 부역자들의 집요한 추적을 받아 학살당했으며, 그 결과 서우크라이나에 거주하던 유대인 80만명 중 불과 1만 5천명 만이 생존하였다. 즉 생존률이 __2%__도 미치지 못했던 것이다. 비슷하게 에스토니아, 라트비아, 리투아니아에서도 각각 보조경찰이 구성되어 유대인 수만여 명을 직접 학살했다. 폴란드와 체코슬로바키아, 벨라루스에서는 부역의 정도가 상대적으로 덜하긴 했지만 여기서도 보조경찰[* 벨라루스의 [[https://de.wikipedia.org/wiki/Wei%C3%9Fruthenische_Hilfspolizei|백루테니아인 보조경찰]], 폴란드의 [[https://en.wikipedia.org/wiki/Blue_Police|청색 경찰]].]에 자원하여 유대인 학살에 가담한 사람들이 있었고 유대인의 재산을 약탈하거나 원래 주인을 입막음하기 위해 살해한 경우도 있었다. 폴란드에서는 게토에서 탈출하여 피난처를 찾은 유대인이 폴란드인에 의해 독일 당국에 넘겨지거나 아예 살해된 경우도 많았다. 독일이 괴뢰국으로 세운 [[슬로바키아 제1공화국|슬로바키아 공화국]]은 독일의 의중에 따라 엄격한 [[반유대주의]] 정책을 펼쳤고 나중에는 유대인을 돈을 받고 독일에 팔아넘겨 학살당하게 만들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