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이동문서 삭제토론 독소전쟁 (문단 편집) === [[전쟁범죄]]와 피의 보복 === '''[[전쟁범죄]]와 그에 따른 보복 측면에서도 독소전은 제2차 세계 대전의 전역들 중 [[태평양 전쟁]]과 함께 최악을 달린다.''' 나치 독일은 점령 지역에서 소련군 [[포로]]와[* 전쟁 당시 소련군 포로의 사망률은 무려 '''30%~58%'''로 추산된다. 중국 쪽에서는 70%라고 주장한다고 하는데 이쪽은 신빙성이 높지 않으므로 논외. 일단 58%로 잡은 건 영국 학자 [[니얼 퍼거슨]]인데 이쪽은 아무래도 높게 잡힌 편으로 보는 경우가 많다. 소련에게 잡힌 포로는 15~30% 정도로 추산되며 30%는 마찬가지로 니얼 퍼거슨의 추산이다. 참고로 일본군에 잡힌 미군 포로의 사망률은 27%이고 중국군까지 집계하면 최대 40% 수준이니 저게 결코 낮은 수치가 아니라는 걸 알 수 있다.] 소련 영토에서 살고 있던 주민들을 대상으로 끊임없이 학살, 약탈, 강간을 자행하고 마을을 모두 불태워버리는 지옥도를 펼쳤고 독일군 지휘부는 이러한 노골적인 전쟁범죄 행위를 처벌하기는커녕 대놓고 방관하거나 조장했다. 그 지역의 [[유대인]]을 대상으로 한 [[홀로코스트]] 역시 꾸준히 자행되었다. 게다가 [[아인자츠그루펜]]은 똑같이 학살과 전쟁범죄를 저지른 [[독일 국방군]]과 [[무장친위대|무장친위대 예하 사단 장병들]]에게도 '독일군의 수치'라는 말을 들었을 정도다. 물론 그걸 열심히 도와주고 자기들도 열심히 똑같은 짓을 하고 다닌 [[독일 국방군]]이나 [[무장친위대]]가 [[국방군 무오설|할 말은 절대 아니지만.]][* 이미 1941년에 국방군과 친위대가 아인자츠그루펜이 국방군 점령지대에 작전 수행하는 것을 사전 동의했다. 출처 : “결백한 독일국방군” 신화의 산파 바실 리델 하트: 한 군사학 구루의 명예와 제2차 세계대전의 진실] 이렇게 처절한 전쟁범죄 때문에, 지금도 [[벨라루스]]를 비롯한 동유럽 일대에는 전쟁 당시 학살당한 사람들의 유해로 [[지층]]이 이루어진 곳도 있다. 독일군에 의해 체계적으로 행해진 소련 영토 내의 초토화 작전 또한 대표적인데 빨치산 토벌, 소련 내 저항 세력 약화라는 전략적 목적으로만 알려졌으나 이후 연구가 진행되면서 슬라브인 말살이라는 나치 독일의 [[홀로코스트]]적인 목적도 있었음이 밝혀진다. 한마디로 나치 독일은 [[슬라브]]인을 제거해야 하는 말살 대상으로 본 것이다. 물론 소련군 또한 전쟁 초반부터 독일군 포로들에 대한 잔혹한 보복을 행했으며[*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를 보면 포로로 잡힌 독일군의 내장과 갈비뼈를 볼 때까지 고문하고 죽였다는 증언들이 있으며 나치의 병사들의 도청 기록엔 전쟁 초반에 포로로 잡힌 독일군들이 푸줏간에서 도살되거나 혓바닥이 못에 박힌 채 잔혹하게 처형된 사례들이 다수 보고되었다. 이를 지켜본 독일군은 똑같이 소련군이나 빨치산 포로를 산채로 눈알을 파내고 성기를 훼손하고 배를 갈라 온갖 잡동사니를 쑤셔넣거나 포로를 산채로 불태워죽이는 등의 잔악 행위를 했고 독일군이 소련군 야전 병원을 접수한 후 미처 피신하지 못한 소련군 부상병들을 끌어내어 잔인하게 오체분시하여 죽이고 형체를 알아볼 수 없게 훼손된 시체를 무더기로 쌓아놓은 채 떠났고 이후 그 광경을 본 소련군이 경악하며 독일군을 포로로 잡지 않고 모조리 죽이겠다고 분노에 떨었다는 증언도 나온다. 이와 같이 극에 달한 증오와 복수심으로 일련의 잔악 행위를 양쪽에서 계속 되로 주고 말로 받는 참혹한 인외마경이 전쟁이 끝날때까지 이어졌다.][* 물론 독소전쟁에서는 포로 포획이 이루어질 시 다수의 인원이 한꺼번에 포획되는 경우가 많았으므로 항상 이런 개인적인 보복이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다. 의외로 [[소련 공산당]]의 공식지침은 "전후 재건을 위한 노동력 확충을 위해 최대한 많은 포로를 산채로 붙잡을 것"이었므로 비록 복수심에 불타는 소련군에 의해 이러한 지침이 항상 지켜지지는 않았으나 전쟁이 끝날때까지 어마어마한 수의 독일군 포로들이 붙잡혔다. 그러나 포로들에 대한 대우는 이 문서에 언급된 것처럼 최악의 수준이었고 환경도 매우 열악했으며 대부분의 포로가 수감중 사망했다. 따라서 독소전쟁에서의 포로 학살 행위 대부분은 수감 중의 학대로 이루어졌다고 볼 수 있다.] 소련이 주도권을 잡고 [[비스와-오데르 대공세|독일 국내에 진입한 후에는]] 지휘부의 통제에도 불구하고 아예 [[민간인]]들을 대상으로 한 다수의 약탈 및 강간과 같은 보복성 범죄 행위가 발생하였다. [[베를린 공방전]] 당시 모든 희망을 잃고 항복만을 선택할 수 밖에 없었던 독일군이 저항한 원인 중 하나가 이것이다. 소련군의 보복을 피해 민간인들과 잔존 병력이 상대적으로 훨씬 안전한 서방 연합군 점령 지역으로 탈출할 때까지 [[티거2|쾨니히스티거]] 5대와 [[국민돌격대]]와 같이 한 줌도 안 되는 병력과 장비만으로 승리가 아닌 탈출의 시간을 벌기 위해 싸워야만 했던 것이다. 실제로 소련에 포로로 잡힌 독일군의 사망률은 서방 연합군에 잡힌 포로의 사망률보다 훨씬 높았다. 민간인을 대상으로 범죄를 저지르는 것도 점령 초기에 제대로 통제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21세기에도 소련의 포로 대우가 굉장히 나빴다는 내용의 주장이 미국, 영국, 독일 등의 학자들로부터 제기되고 있다. 어느 정도의 논란도 있지만 그래도 한 번은 참고할 만하다. 러시아에서도 가혹한 포로 대우를 인정하기도 하지만 대신 독일이 러시아에서 벌인 학살과 약탈을 이유로 들어 소련의 포로 대우가 상대적으로 좋았다고 주장하거나 독일처럼 의도적으로 모조리 죽이려고 하지는 않았다고 반발하기도 한다. 사실 전쟁 기간에도 독일 민간인들이 전쟁의 고통을 호소할 때 영미 연합군은 어느 정도 죄책감을 느꼈다는 묘사도 있는 반면,[* 영국과 미국도 반독 정서의 결이 달랐는데 영국은 소련과 같이 한 세대가 통으로 사라진 수준은 아니었지만 [[런던]]을 비롯한 본토가 루프트바페의 공습을 받으며 대전 초기 상당한 민간인 피해를 입었기 때문에 반독 정서가 상당했다. 반면 미국은 물론 일선 병사들이야 독일군과 교전하고 때로는 유대인 수용소와 같은 악질적인 전쟁범죄를 목격하였기 때문에 반독 정서가 없었다고는 할 수 없지만 [[U보트]]가 상선을 격침한 정도 외에는 독일에 의한 본토 위협 및 민간인 피해가 전무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정도가 약했다. 따라서 [[드레스덴 폭격]]을 비롯한 독일 본토 무차별 공습 당시 영국인들의 다수는 이를 정당하게 여겼으나 미국인들은 자국군의 민간인 폭격에 상당히 반감을 느꼈다. 반면 일본은 [[진주만 공습]]으로 미국 본토의 민간인에게 직접적인 피해를 준 만큼 미국인들은 독일 본토 폭격과 달리 [[도쿄 대공습]]을 비롯한 일본 본토 폭격에 대해서는 감정적으로 찬성하는 여론이 높았다. 하지만 어찌되었든 영국도 소련과 같이 궤멸적인 피해를 입은 정도는 아니었으며 영국군이 소련군에 비해 기강이 잡힌 민주주의 국가의 군대였기 때문에 점령지에서의 뚜렷한 악행은 없었다.] 소련군은 독일이 선제공격을 한 데다 훨씬 잔혹한 전쟁범죄를 저질렀기 때문에 개소리한다는 식의 반응이 많았다. 그럼에도 소련군의 전쟁범죄는 나치에 비해서 거의 조명되지 않았는데 이것은 양자 사이에 근본적인 차이가 있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나치 독일은 동유럽 지역의 [[슬라브인]]을 말살하겠다는 목표 아래 '''공식적인 명령체계 아래 조직적으로 학살과 약탈, 파괴를 자행'''하였다. 이런 전쟁범죄를 부추기고 옹호하는 군 상층부의 공식적인 명령도 반복적으로 내려졌다. 때문에 소련 측 감청자료에서는 이들이 입으로도 말하기 어려운 끔찍한 전쟁범죄를 '''즐거웠던 일처럼 추억하는''' 내용도 있다. 반면에 소련군의 전쟁범죄는 복수심에 불타는 병사들, 혹은 하급 장교들에 의해서 우발적으로 저질러진 경우가 대부분이었으며, 최소한 군 상층부는 약탈과 강간, 민간인 살해 등은 군법에 따라 엄중히 다스리겠다는 의지를 계속 보여주었고, [[정치장교]]들 같은 병사들의 통제 의무가 있는 이들은 전쟁범죄자들을 꾸준히 처벌했다. 물론 독일 진입 초기에는 상층부 역시 '자업자득'이자 '정당한 복수'라는 생각을 하였는지 전쟁범죄를 사실상 방관하였지만, 독일 점령 후 후술하는 전쟁범죄가 도를 넘었다고 판단하자 가해 병사들을 즉결처형하는 등 강경한 태도로 군기를 확립하였다.[* 물론 소련이 착해서만은 아니고 아무리 적국이었다 하더라도 훗날 위성국으로 만들 필요가 있는 동부 독일인들에게 지나친 대소 증오심을 심어 주어서는 안 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소련군의 보복 행위가 극심했던 나머지 많은 동독인들이 미국, 영국, 프랑스의 점령지로 탈출하였다.] 그럼에도 [[스탈린그라드]] 전역에서 항복한 9만 명 가량의 독일군 [[포로]]들은 [[굴라크|수용소]]로 끌려갔으며 포위 도중 질병, 굶주림에 시달리고 제대로 치료받지 못한 부상병들이 많았다. 상처 악화, 악화된 전시경제로 인한 배급 부실, 학대, 특히 1943년 봄 유행한 [[티푸스]]로 대부분이 사망했다. 이 포로들 가운데 살아서 독일로 돌아온 자는 6,000여 명에 불과했다.[* 2003년 [[독일 영화]] [[베른의 기적]]에서 주인공 꼬마 아버지도 이때 [[징집]]되어 소련 전선에 갔다가 포로가 되어 [[시베리아]]에서 10년 동안 강제노동을 하고 겨우 살아돌아왔지만 광부였던 아버지는 10년 동안의 트라우마로 독일에서 [[광부]] 일을 하려고 하자 발작을 일으켜 일도 그만두어야 했다.] 이외에도 독일 여성 200만 명이 소련군에 의해 강간당했다. [[베를린]]에서만 10만 명이 넘는 독일 여성들이 소련군에 강간당했고 동부 유럽 일대에서도 100만 이상의 독일 여성들이 소련군에 의한 조직적인 [[성폭행]]을 당했다. 1945년~1946년 사이 전시강간으로 태어난 독일-러시아 혼혈 신생아가 3.7% 수준일 정도였다. * [[바르샤바 봉기]] 당시의 학살 * 볼라 학살 - 독일군이 폴란드인 4만-10만여 명 학살한 사건 * 오호타 학살 - 독일군이 폴란드인 1만여 명 학살한 사건 * 리디체 학살 -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의 암살에 대한 보복으로 [[체코슬로바키아]] 리디체에서 체코 민간인을 학살한 사건 * [[제2차 세계 대전 중 독일의 벨라루스 점령]] * 코트부스 작전 - 1943년 당시 [[벨라루스]] 북부 [[비텝스크]]에서 독일군이 파르티잔 활동을 이유로 민간인 2만여 명을 학살한 사건 * [[슬로바키아 민족봉기]] 당시의 학살 * 볼히니아 학살 - 1943-45년에 걸쳐 친독 우크라이나계 조직이 폴란드계 민간인 10만여 명을 학살한 사건 * [[정치장교]] 지령 - 독일군에 붙잡힌 모든 [[소련군]] [[정치장교]]들의 즉결 처형 명령 * [[집시]] 대학살 - 포라이모스(Porajmos)라고 불리며, 유럽 전 지역에서 진행된 집시인 대량학살로, 약 30만 명[* 최대 추정치는 '''150만 명''']의 집시가 나치 독일과 그 동맹국([[우스타샤]], [[루마니아 왕국|루마니아]] 등)에 의해 학살된 사건. 유대인들은 학살 직후 관심이라도 받았지[* 희생자가 대충 500-600만 선으로 윤곽이라도 잡힌 홀로코스트와 달리 포라이모스의 사망자가 30만에서 150만까지 널뛰기 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집시는 전후에도 사회적 위치도 낮은데다 규모도 상대적으로 작아서 묻혀버렸다. * 나치 독일의 소련군 포로 학대 - 서방연합군 장병이 포로가 된 경우 [[제네바 조약]]에 따라 보호와 대우를 받았지만 소련군 포로는 소련 정부가 제네바 조약을 비준하지 않은 것을 명목으로 학대가 행해졌다. 러시아인용 수용소(Russenlager)의 대부분은 수용 시설 자체가 존재하지 않고 [[평야]]를 [[철조망]]과 감시탑으로 분할한 것이 전부였다. 비바람과 혹서, 혹한에 노출된 포로들은 구멍을 파고 견디는 수밖에 없었다. 경비병에 의한 폭력, 학대는 다반사였고, 하루 식량은 수백 [[칼로리]]에 불과했으며 모두 영양실조로 고통받았다. 최악의 경우 아예 학살되거나 강제 수용소와 절멸 수용소(특히 유대계)로 끌려갔다. 아직까지도 그 수치는 미상으로 남아 있지만 기본적으로 백만 단위 이상이 희생당한 것은 확실하다. [[https://www.youtube.com/watch?v=oGwZ0pakhHE|그 참상을 옆에서 보다 못한 미군 포로들이 위험을 무릅쓰고 몰래 이들을 돕기도 했다.]] * '''[[홀로코스트]]''' * [[아인자츠그루펜]]의 학살 * [[바르샤바 게토 봉기]] 당시의 학살 - 1만 3천여 명의 폴란드계 유대인들이 봉기 당시 독일군과 싸우다 전사하거나 학살되었으며, 이후 추가로 5만 6천여 명이 절멸수용소로 이송되어 학살되었다. * [[헤움노 절멸수용소]] *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 절멸수용소]] * [[마이다네크 강제수용소]] * 라인하르트 작전 - 1941-1943년에 걸쳐 독일 당국이 [[폴란드 총독부]]에 거주하는 유대인 200만 명을 절멸수용소로 이송하여 학살함 * [[베우제츠 절멸수용소]] * [[트레블링카 절멸수용소]] * [[소비보르 절멸수용소]] * 말리트로츠테네츠 절멸수용소 * [[르비우|리비우]] 포그롬 - 1941년 [[바르바로사 작전]] 당시 리비우 지역의 친독 우크라이나계 민간인과 독일군 부대가 자행한 [[유대인]] 포그롬 * [[오데사]] 대학살 - 1941년 [[바르바로사 작전]]의 일부인 뮌헨 작전 당시 루마니아군이 유대인들 10만여 명을 대랑학살한 사건. * [[카우나스]] 학살 - 1941년 바르바로사 작전 당시 리투아니아의 카우나스에서 친독 리투아니아인과 독일군이 자행한 유대인 [[포그롬]] * 야시 학살 - 1941년 [[바르바로사 작전]]의 일부인 뮌헨 작전 당시 루마니아군이 루마니아 북동부 야시 지역 유대인 1만 3천여 명을 학살한 사건 * [[바비야르 학살]] * 포나리 학살 - [[리투아니아]] [[빌뉴스]] 근방에서 1941-1944년에 걸쳐 독일군과 친독 리투아니아인 협력자들이 10만의 유대인과 폴란드인, 소련군 포로를 학살한 사건 * 수확제 작전 - 1944년 루블린 근교에서 독일군이 3,000명의 유대인들을 총살한 사건 * 페오도시야 학살 - 1941년 12월 29일 소련 해군 보병대가 [[크림 반도]] 페오도시야에 상륙해 독일군 병원을 점령, 포로 160명을 죽인 사건. 저체온증으로 죽을 때까지 중상자들에게 물을 쏟아붓거나, 창문으로 내던지고 심지어 성기를 훼손시키는 등 끔찍하게 죽였다. 1983년 서독 라디오에서 이 사건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방영하였다. [[헤르베르트 브루네거]]의 자서전에서도 이 사건을 목격한 장병의 증언담이 서술된다. * 네멜스도르프 학살 - 소련군이 독일로 진입하면서 동프로이센 국경에 있던 굼비넨 남서쪽의 네멜스도르프 마을 주민 72명, 프랑스 및 벨기에 포로 50명을 학살한 사건. 나중에 독일군이 마을을 탈환하면서 발견됐고, [[파울 요제프 괴벨스|괴벨스]]가 소련군의 악랄함을 선전하기 위해 [[프로파간다]]로 사용했다.[* 단, 후일 재조사에 따르면 네멜스도르프라고 선전된 학살 사진 상당수는 다른 [[동프로이센]] 마을에서 촬영됐다고 한다.] * 폴란드 주민 학살과 강간 - 독일과 소련 양국이 저지른 전쟁범죄. 독일이 점령기간 동안 적지 않은 수의 폴란드 주민들을 동원·학살했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으나, 소련 역시 초기 폴란드 침공 당시 [[카틴 학살]]이라는 만행을 벌였으며 독소전쟁 후반기 폴란드에 진주한 소련군이 현지 주민들을 강간하거나 약탈한 사건들도 많았다. 당연히 폴란드의 역사 교과서에서는 양측 모두의 범죄를 자세히 기술하며 규탄하고 있으나, 나치 관련 과거사를 철저히 청산한 독일과 달리 구 소련 및 현 러시아는 군인들의 일탈이라는 이유로 이에 침묵하는 중이다. * 부다페스트 약탈 - 부다페스트 공방전이 끝나고 소련군과 루마니아군이 저지른 약탈, 강간 사건. * 프라하 학살 - 1945년 5월 10일 [[프라하]]에서 체코인들이 독일 민간인들을 대상으로 벌인 보복 학살.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