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이동문서 삭제토론 독소전쟁 (문단 편집) === 결과 === [[파일:54s6uihiocx41.jpg]] 2차 세계대전 이전과 이후의 소련 영토 변화. 세계대전 이전에도 소련은 세계에서 가장 큰 나라였지만 전쟁 이후 아시아와 유럽 모두에서 영토를 더욱 확장하고[* 원래 만주도 전쟁 직후에는 소련이 점령했으나 이후 중국에 반환했다. 다만 다롄은 1950년 까지 계속 소련이 점유하고 있었다.] 전 세계적으로 여러 위성 국가들을 확보하며 명실상부한 [[초강대국]]으로 성장했다. 독소전쟁 초 [[윈스턴 처칠]]을 포함한 연합국 지도자와 추축국 지도자는 소련이 기껏해야 3개월 안에 나치 독일에게 패배한다고 예상했다. 사실, 나치 독일은 폴란드 침공 이후 승승장구했으며 특히 전통의 육군 강국 프랑스를 6주만에 굴복시켰기 때문에 독일군의 군사적 역량에 대한 평가가 매우 높았다. 그러나 쉽게 무너질 것처럼 보였던 소련은 나치 독일의 공격을 성공적으로 방어하였고 급기야 반격에 나서 유럽전선의 마침표를 찍으며 [[소련]]의 국력이 [[러시아 제국]] 시절과는 차원이 다르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특히 이 전쟁은 국가의 모든 기능을 투입한 [[총력전]]이라는 단어를 현실화한 전쟁이다. 그리고 냉전 시기 내내 미국과 서유럽은 소련의 불굴의 투쟁 정신과 무지막지한 기갑 웨이브에 공포심을 느꼈다. [[노르망디 상륙작전]] 전까지 한동안 유럽 본토에서는 서부전선은 섬에서 버티는 영국과 [[스위스]] 등의 [[중립국]]을 제외하고 추축군이 다 장악해 버렸고 북아프리카를 제외하면 동부전선만이 유일하게 지상전이 벌어지는 장소였다. 그래서 [[러시아인]]들은 일개 [[야전군]] 수준의 수만 명이 맞붙었던 서방의 [[엘 알라메인 전투]] 승리나 동부전선의 승패가 거의 결정된 후 벌어진 [[노르망디 상륙작전]]이 제2차 세계 대전의 전환점이었다는 서방 연합국 측 주장에 대해 코웃음을 친다.[* 단, 소련군이 승기를 잡을 수 있었던 주요 원인 중 하나는 미국이 지원한 막대한 [[랜드리스]]였으며 이는 훗날 흐루쇼프도 인정한 바 있다.] 주코프 회고록에도 전후 화기애애한 분위기의 연합국 지도자 간 회동에서 [[버나드 로 몽고메리]]가 소련의 [[스탈린그라드 전투]]와 함께 엘 알라메인 전투가 전쟁의 전환점이었다고 말하자 자기는 화가 나서 그것을 반박했다고 적혀 있다. 1980년대 한국에서 공식적으로 전쟁사를 연구하는 거의 유일한 기관인 [[육군사관학교]]가 펴낸 '세계전쟁사'에서는 냉전을 의식해 소련군을 의도적으로 깎아내리는 서술이 많이 보인다. 예를 들어 소련군의 승리는 [[동장군|추운 겨울]]이나 히틀러의 전략적 오판, 소련군의 [[인해전술]] 때문에 어부지리로 얻어졌다는 식이다. 물론 추운 겨울은 병력의 운용에 지장을 주지만 독일군만 추위를 타는게 아니라는걸 간과하고 있다. 결국 추위 때문에 졌다는건 상대는 거기에 대비했지만 자신들은 거기에 대비하지 않았다는 이야기일 뿐이다. 그리고 히틀러의 오판은 맞는 말이지만 독일군 내에서 히틀러만 오판을 저지른 것도 아니고 그런 식으로 따지면 독일의 초반 승전의 공로를 스탈린과 소련군의 트롤링으로 돌려야 한다. 이런 설명은 소련군의 기량 상승이나 3천만에 달하는 희생 등을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는 것.[* 독소전쟁의 인식이 특히 한국에서 영 안 좋을 수밖에 없는 게, 일본 제국의 동맹인 추축국 나치 독일과 [[남북분단]]을 획책해 [[북한]]의 독재정권을 탄생시킨 공산권의 수장 소련 사이의 전쟁이었고 또한 양국의 우두머리 히틀러와 스탈린 모두 인간쓰레기 학살자였기 때문이다. 괜히 '악과 악의 대결'이라는 말이 있는 게 아니다. 하지만 독소전은 헝가리, 루마니아, 핀란드, 이탈리아 등 제2선급으로 소련에 타격을 준 나라가 있을 정도로 단순히 독일 VS 소련으로만 나눌 수는 없는 노릇이다. 헝가리, 루마니아는 추축국에 가입하여 소련에서 나치 독일 못지 않은 학살을 했다.] 다만 무조건 그렇지만도 않은 게 소련군의 손실 부분은 오히려 현대 사가들이 주장하는 1천만 명 사상보다 좀 더 낮춰서 잡았고 1944년 이후로는 소련군에 대해 칭찬 일색이다.[* 소련이 자주 승리를 얻어낸 대전 후반부에도 소련의 손실은 연패를 거듭한 독일보다도 오히려 많았다. 전쟁 초반에 독일군과 소련군의 교환비는 무려 20 : 1이었다. 소련군은 [[바그라티온 작전]] 이후에 가서야 겨우 1.5 : 1 남짓으로 교환비를 좁힌다. 하지만 소련의 희생이 더 적었던 대전투는 바그라티온 작전과 베를린 전투밖에 없다.] 다만 독소전쟁 초반부에는 아무래도 소련군을 폄하하는 서술이 많다. 그러나 최근 조사에 따르면 나치 독일 전력 70%를 증발시킨 소련군의 기여를 인정하는 추세다. 어쨌든 제2차 세계 대전, 특히 유럽 전선 내 연합국의 승리에 소련이 큰 기여를 했다는 사실 자체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또한, [[그레이트 게임|기나긴 역사 동안 있었던 영국의 세력과 러시아 세력의 상호 견제가]] 종국에는 러시아 세력(소련)의 우세 및 영국의 국력 약화로 영국에서 미국으로의 바톤 터치로 이어지게 된 계기이기도 했다. 전간기 영국 총리 [[네빌 체임벌린]]의 대독 유화정책 배경의 주 요인에는 소련 견제가 있었을 정도로 20세기 이후에도 영국은 소련의 진출을 견제하기 위해 각별히 신경썼다. 영국의 보수파 각료들은 나치 독일을 키움으로써 소련의 부상을 저지하고 대영제국으로서의 자국의 위신을 지키고 싶어했다. 그러나 그들의 바람과 달리 나치 독일은 비이성적으로 호전적이고 잔인했으며 결국 그 화살은 영국에게도 돌아가게 되었다. 영국이 비록 해상전과 공중전에서 나치를 꺾어 버리고 다수의 지상군들을 독일 본토로 진격시키는 데 성공한 엄연한 승전국이었지만, 경제가 파탄나서 많은 사람들이 배급을 받아야 했고 [[대영제국]]의 식민지 체제들도 [[미국]]과 [[소련]]의 공통적인 외교 전략이었던 '''[[식민지]] 블록 경제의 해체'''로 인해 영국과 프랑스 양대 [[식민제국]] 모두 식민지들 중 그나마 호의적이었던 국가들을 추스리고 나머지 20세기를 보내야 했다, 특히 프랑스는 구 식민지들 절대 다수를 잃고 안 그래도 프랑스 침공으로 무너진 국가적 위신이 [[베트남 전쟁]]과 [[알제리 전쟁]]의 연이은 졸전과 깽판으로 완전히 추락했다. 반면 소련은 어마어마한 피해를 입었음에도 서구의 상상을 뛰어넘는 생산량과 동원력, 미국의 전폭적인 [[렌드리스]]에 힘입어 [[바르샤바 조약기구|독일 동부를 포함한 동유럽 전부를 자국의 세력권 안으로 편입하는 데]] 성공한 상황이었다. 전쟁 말기 영국은 [[언싱커블 작전]]을 구상하는 등 여전히 소련을 몰아내고 싶어했지만 이 시기의 소련군은 [[크림 전쟁]], [[러일전쟁]], [[제1차 세계 대전]] 시기의 허약한 구 [[러시아 제국군]]이 아니라 전선군 단위의 막대한 기갑군과 독소 전쟁 기간 중 습득한 경험을 바탕으로 체계적으로 짜인 제병합동술에 기반한 작전술, 그리고 대대 단위의 희생마저도 감수하는 정신전력으로 무장한, 거대한 스팀 롤러가 되었다. 더군다나 영국은 인도를 비롯한 여러 식민지들의 동요를 막는 것마저도 힘든 상태였다. 만약 언싱커블 작전이 실행되었더라도 이미 미국과 소련은 각별한 사이였고,[* 물론 미국이 소련과의 직접 충돌을 극도로 경계한 것과 별개로 2차 대전 말기에 특히 친소 성향의 루스벨트가 급사하고 반공 성향의 트루먼이 집권하면서 미소 간의 관계도 급변하게 되며 이는 2차 대전이 끝나자마자 곧바로 냉전에 돌입하는 원인이 되었다.] 미국은 영국이 제멋대로 날뛰어서 또 다시 유럽에 피가 흐르게 만드는 모습을 곱게 보지 않았을 것이며, 소련군은 더 이상 예전의 약한 군대가 아니었다. 결국 영국과 프랑스는 세계 질서를 주도하는 국가는 더 이상 자국이 아니라 [[미국]]과 [[소련]]임을 인정하고 [[파이브 아이즈]], [[NATO]]에 가맹한 뒤 미국 및 유럽, [[영연방]] 국가들과 협력해 자국의 안보를 지키는 방향으로 선회해야 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