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독소전쟁 (문단 편집) === 전쟁의 징조 === 그러나 1941년부터 독일의 소련 침략 징후가 서방 세계와 [[추축국]]의 곳곳에서 나타나기 시작했다. 영국에서는 [[에니그마(기계)|독일측 암호]]를 [[앨런 튜링|해독]]해 내서 [[윈스턴 처칠]] 당시 [[영국 총리]]가 [[이오시프 스탈린|스탈린]]에게 직접 경고하기도 했고, 1941년 봄에만 180건이 넘는 독일 항공기의 소련 영공 침범 사례도 있었으며, [[일본 제국]]에 상주하던 전설적인 [[간첩]] [[리하르트 조르게]]가 구체적인 수치까지 들어 가며 독일의 침공이 곧 개시될 것을 소련에 알렸지만, '''스탈린과 소련 방첩국, 정보국은 그것들을 모두 무시했다.''' 그리고 [[공산주의자]]였던 독일의 한 인쇄업자가 독일군에 납품한 숙어집을 소련 영사관에 보냈는데, 여기에는 "항복하라", "손들어", "집단농장 의장이 어디 있나", "공산주의자냐?", "발포한다" 따위의 [[러시아어]] 표현이 실려 있었다.[* 안토니 비버/피의 기록 스탈린그라드 31~32] 6월 16일 [[베를린]]에 파견된 소련 측 간첩들도 독일의 공격이 임박했음을 지속해서 알리고, 심지어 [[바르바로사 작전]] 개시 '''하루 전'''인 6월 21일 독일군 [[탈영]] 병사였던 알프레트 리스코프(Alfred Liskov)는 독일군 내 숨어 있던 공산주의자였는데, 그가 "독일이 내일 공격할 것이다"라고 털어놓기도 할 정도로 징후는 있었다. [* 리스코프는 독소전 개전 이후 대독 프로파간다에 동원되다 코민테른 조직에 배정되어 코민테른 요원으로서 활동하게 된다. 하지만 리스코프는 코민테른 지도자들과 지속적으로 충돌하였고 <코민테른은 무엇을 하고 있는가?>등의 글을 게시하며 코민테른 지도자들을 배신자라고 비판한 끝에 1942년 1월 NKVD에 체포된다.다행히 수사는 6개월만에 종결되었지만 리스코프는 당국에 의해 노보시비리스크로 옮겨졌고 이후 리스코프는 소련 붕괴 이후 공개된 기밀 문서에조차 43년 후반에서 44년 초 사이에 실종된것이 마지막 기록으로 나오는 등 그의 이후 운명은 알려져있지 않다.] 영공을 침범하는 독일 항공기에 대해서도 공격하지 말고 특별한 지시가 있기 전까지는 어떠한 행동도 하지 말라고 강력히 명령했으며, 이는 전쟁 초기 소련 공군이 [[루프트바페]]의 공습이 임박했음에도 손 놓고 있다가 이륙조차 해 보지 못한 채 대거 궤멸되는 참극을 초래했다. 물론 스탈린도 히틀러가 쳐들어 올 것에 대비를 하긴 했는지, 폴란드 점령 후 [[스탈린 선]]을 뜯어서 앞에 [[몰로토프 선]]을 짓기도 했다. 하지만 1937년쯤 스탈린의 [[대숙청]]으로 많은 장군들이 숙청되었고, [[미하일 투하쳅스키]] 등 유능한 장군들도 숙청의 칼날은 피하지 못했다. 이는 안 그래도 부족한 장교진의 인력난을 부추겼고, 살아남은 이들도 스탈린이 무서워 소극적인 태도로 일관하는 등 유무형의 피해는 독소전쟁 초기 소련의 발목을 잡는 요소였다. 참고로 소련은 독일이 서부에서 [[영국 본토 항공전|영국과 전쟁]]을 치르는 내내 독일에 물자를 제공했는데, 전쟁이 시작되기 불과 하루 전에도 물자를 가득 실은 열차가 독일 국경을 넘었다. 여담으로 물자를 실은 기차와 또 하나의 기차가 베를린-모스크바 선로를 왕복했는데 그 기차에는 독일, 소련 민간인이 타고 있었다. 이걸 보고 안토니 비버는 '평화와 전쟁은 정말 한 끗 차이다.'라고 생각했다고 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