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이동문서 삭제토론 독소전쟁 (문단 편집) ==== 그러나 스탈린에겐 나름 이유가 있었다 ==== 스탈린은 절대로 히틀러를 과소평가하지 않았다. 그는 히틀러가 단시간에 독일 민족들을 통합하고, 독일 내에서 상당한 세력을 유지하던 [[독일 공산당]]을 완전히 전멸시킴과 더불어 유럽의 거의 대부분을 순식간에 정복하는 광경을 보면서 히틀러를 결코 만만한 상대가 아니라고 판단하고 있었다. 게다가 히틀러도 자신과 비슷해서 남의 [[뒤통수]]를 후려갈겨도 전혀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 인물이라는 것 또한 알고 있었다. 원래 동족이 서로를 잘 파악하는 법,[* 사실 스탈린도 독일과 서유럽이 서로 전쟁을 벌여 둘 다 만신창이가 되었을 때 '''독일의 뒤통수를 쳐서 멸망시킨 뒤 그대로 유럽을 어부지리로 먹을 큰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그러나 [[프랑스 침공|프랑스가 독일한테 '''6주'''만에 털리고]](...) 히틀러가 [[바르바로사 작전|먼저 소련의 뒤통수를 갈겨버려]] 스탈린의 큰 그림은 산산조각나고 말았다.]스탈린도 정치판에서 구르고 구르다 못해 [[대숙청]]을 비롯한 각종 학살을 저지른 인간인 만큼, 히틀러에 대한 대비를 하긴 했다. 위에서 말한 '[[스탈린 선]]'이 바로 그것. [[바르바로사 작전]] 직전까지만 해도 (그리고 그 이후도 잠시 동안이나마) 독일에 대항할 만한 강력한 육군력을 보유한 적수는 없었으며[* 사실은 육군력이고 나발이고 당시 유럽상에 남아서 독일과 싸우던 국가 자체가 몇 없었다.], [[영국 본토 항공전]]에서 패배했다고 해도 영국이 딱히 상륙할 것도 아닌 이상 독일의 패권을 위협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즉, 독소전이 개시되어도 딱히 양면전쟁이라고 말하기 뭣하다.[* 그러나 이건 바다를 못건너는 육군에만 해당되는 사항이었고 바다를 자유롭게 넘나드는 공군에겐 그딴 거 없이 양면전선이었다.] 게다가 소련과 [[겨울전쟁]]으로 맞붙은 다음 이를 빠득빠득 갈고 있는 [[핀란드]]가 [[나치 독일]]한테 협력하면서[* 핀란드가 나치 독일과 협력은 했지만 나치 독일의 추축국 가입 요구에 핀란드는 거절했다.] 장기적으로 뭔 생각인지 아주 뻔히 보이는 상황. 유럽의 최강국이자 패권 국가가 된 독일을 앞에 두고, 또한 보여준 전쟁 실력을 보고, 거기에 핀란드 등의 움직임을 보고 그 의심 많은 스탈린이 전쟁이 터질 것이라는 생각을 하지 못한 것이나 전쟁에 대한 준비를 안 하는 것이 오히려 이상하다. 그래서 스탈린은 자신의 이름을 직접 딴 스탈린 선을 독일 앞에다 구축하려 했다. 그런데 '[[스탈린 선]]'은 독소전 최대의 오산 중 하나로 꼽힌다. 일단 폴란드 함락 이후에 만들어졌으니 만들 시간이 부족해서 미완성이었다. 또한 원래 폴란드 국경에 짓고 있는 방어선을 포기하고 새로 만들게 되면서 [[대숙청]] 이후의 빈약한 [[장교단]]으로 새로운 방어 작전을 짜야 했다. 뿐만 아니라 여기에 주둔하게 된 소련군들은 그동안 훈련하던 지역이 아니라 새로운 곳으로 오게 되었으니 당연히 역량이 감소했다. 만약 스탈린 선이 계획대로 완성되었다면 독일이 맞닥뜨릴 소련은 대숙청 이후로 시간이 흘러 어느 정도 복구된 군대와 스탈린 자신의 이름을 딴 강력한 방어선과 그곳에 있는 패권 국가인 독일에 대응할 만한 (나름 정예) 병력이었을 것이다. 여기에 원래 짓던 폴란드의 방어선까지 탄탄하게 2중으로 갖추었을 수도 있다. 스탈린 또한 전쟁을 싫어하는 인물도 아니며, 독소 불가침 조약은 누구나 있을 수 없는 조약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학자들 중에서는 독소전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오히려 '준비된 소련의 선제 공격'이 발생했을 가능성이 크다고 보는 사람도 있다. 이 경우에는 [[서부전선]]에서 [[미국]]과 영국에 털리는 와중에 양면전쟁이 개시된다.[* 이 경우 [[나치 독일|독일]]이 다시 연합군을 바다로 몰아냈을 가능성이 크다는 견해도 있는 모양이지만 결과는 원래의 역사와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연합군이 머저리가 아닌 이상에야 소련이 독일과 언제든 한 판 붙으려고 한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을 것이고, 소련이 독일로 진공하는 것과 발맞춰서 상륙을 개시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연합군 측에서 손실이 좀 더 나왔을 가능성은 크지만 본격적으로 미국의 군수공장 라인이 돌아가면서 확충되는/영국 스스로도 덩케르크 철수 이후 수년의 시간 동안 전시 체제로 찍어낼 물량은 영국이 유럽에 방기하고 철수한 물자의 양 정도는 우습게 쌈싸먹을 정도였기 때문에 고작 그 정도 노획했다고 해서 독일군이 연합군의 상륙을 막았을 것으로 보기는 어렵다.] 당연히 소련 입장에선 대 독일 전쟁 계획이 없다고 하면 약화된 군과 없다시피 한 방어벽을 가진 채 떠오르는 태양인 독일과의 전쟁은 극구 피해야 할 것이다. 대 독일 전쟁 계획이 있다면 이쪽도 당연히 시간을 끌어야 한다. 이건 많은 시간도 아니고, 겨우 3~5년 정도만 있으면 [[대숙청]]의 여파에서 벗어나 안정을 찾을 가능성이 크다. 실제로 [[뱌체슬라프 몰로토프|몰로토프]]가 회상한 바에 따르면 스탈린은 전쟁 준비를 하고 있었으며 "1943년에는 전쟁을 할 준비가 마련된다."--그리고 정확히 맞았다--라는 스탈린의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스탈린이 독일에 선제 공격 가능성을 내 주는 한이 있더라도 최대한 전쟁을 피한 것은 이러한 까닭일 것이다. 소련에게는 좀 더 시간이 필요했던 것이다. 전쟁을 피하고 어떻게든 장기적인 계획을 가지고 가는 수 밖에 없는 상황이니 스탈린 입장에서도 별 수 없었다. 물론 이런 상황 자체가 대숙청을 벌여서 어쩔 수 없었다. 그리고 말 그대로 소련은 군수산업이 1943년부터 정점을 찍기 시작하면서 독일군을 압도적인 물량으로 파쇄시키기 시작한다.[* 독일 또한 원래 계획대로라면 1945년에 모든 군수산업 시설이 완공되어서 총력전을 충분히 수행할 환경이 되는데 문제는 독소전쟁은 1941년에 시작되었다는 점이었으며 실질적으로 나치 독일이 가장 많은 군수물자를 생산한 해는 1944년이다.] 다만 예상치 못한 변수가 생겼는데 독일군이 동유럽에서 저지른 학살로 그 장비들을 이용할 군인 수 자체가 감소해버렸다. 스탈린이 보여준 우유부단함에 대해서는 또 다른 이유들도 있다. 우선 스탈린은 '''독일과 서유럽의 전쟁을 부추켜서''' 둘 다 기진맥진한 상태로 만든 뒤 '''독일의 뒤통수를 쳐서 고꾸라진 유럽의 과실을 [[어부지리|공짜로 챙기려는]]''' 큰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즉 둘 다 처음부터 배신 때릴 생각이었다. 그놈이 그놈-- 때문에 독일의 침략 징후에 대한 보고가 들어오자 스탈린은 독일의 다른 적인 영국과 프랑스의 [[레지스탕스]], 그 외에 폴란드 저항세력들 같은 저항 조직들이 '''소련을 전쟁에 끌어들이려 거짓된 정보를 제공한다고 우려했다.''' 게다가 [[대숙청]]으로 인해서 소련의 중요 인재들이 쓸려나가서 소련의 정보 작전 능력은 굉장히 축소되었으며, 소련의 정보 장교들은 만약에 스탈린의 생각에 거슬리는 보고를 하게 될 경우에는 죽을 것이 빤히 보였다. 거기다 보고가 스탈린이나 히틀러를 자극할 것을 지나치게 우려했기 때문에 '''전쟁 발발 가능성을 담은 보고서들을 [[주작]]질로 왜곡시켜 스탈린에게 보고'''했다. 한마디로 스탈린이 원하는 보고서만을 보낸 것이다. 이는 독재정권의 고질적인 문제로 스탈린뿐만 아니라 히틀러와 역사적인 독재자들이 모두 그랬으며, 중요한 상황에서 패착을 맺는 요인이 된다. 게다가 독일 측의 기만책도 스탈린의 결정을 주저하는 데 상당한 영향을 끼쳤다. 우선 [[바다사자 작전]]이라는 영국 침공 계획은 [[바르바로사 작전]]을 가리는 바람잡이 역할로 사용되었는데, 독일 국방군 총사령부가 동부에서 창설된 부대는 사실은 영국의 정보부를 기만하기 위한 것이며, 독일은 바다사자 작전을 실행하기 위해 영국 폭격기와 정찰기가 닿지 않는 공간이 필요하다는 내용의 정보를 소련 측에 보란 듯이 알렸다. 특히 1941년 6월의 신문 기사에는 선전 장관이었던 [[파울 요제프 괴벨스]]가 영국 침공이 임박했다는 거짓 정보를 흘렸다. 물론 괴벨스는 배포된 신문을 바로 마치 소련이 보란 듯이 회수해 버렸는데, 이 행동의 목적은 이것으로 자신들이 정말로 영국을 공격하려 한다는 역정보를 흘리기 위해서 이러한 행동을 했던 것이다. 그리고 괴벨스는 자신이 저지른 일을 중요 군사 정보를 실수로 흘린 것처럼 위장하여 나치당 내에서 불명예를 얻은 것처럼 행동하였다. 한편 [[유고슬라비아 침공]]과 [[그리스 침공]] 또한 스탈린의 오판에 기여했다. 그리스의 경우, 히틀러도 의도치 않은 이탈리아의 트롤링인지라 이를 교란이라 생각할 수 없었다. 이는 그 동안 동부에서 독일의 새로운 부대가 편성된 이유를 그럴 듯하게 설명해 주었을 뿐만 아니라, [[바르바로사 작전]] 자체를 연기시킨 원인이 되었다. 그래서 원래 독일의 계획이었던 1941년 5월 15일에 독일이 침공할 것이라는 올바른 정보를 제공했던 정보원들이 이야기했던 날에 공격을 감지할 만한 어떤 낌새도 없이 그냥 지나가 버렸다. 그러자 스탈린은 제대로 낚여서 정보원들을 신뢰하지 못하였다. 이전부터 스탈린은 크고 작은 독일 침공 징후 보고가 계속되자 히틀러한테 전보를 보냈다. 대표적으로 1941년 3월 8일 "귀국이 소련을 친다고 하는 첩보가 들어오고 있고, 귀국 군대가 자꾸 동쪽으로 오는데 우리가 뭘 잘못했습니까?"하고 스탈린이 히틀러한테 전보를 보냈다. 히틀러는 3월 10일 보낸 답신에서 "우리가 동쪽으로 군대를 보내는 것은 그리스 및 유고슬라비아 쪽을 ‘정리'하기 위함이며 소련이 우리의 계획을 도와준다면 발칸 반도에서 소련의 영향력이 될만한 장소를 제공하겠다."며 역으로 스탈린 입이 귀에 걸릴 [[페이크]]를 쳤다. 그리고 4월에 히틀러가 유고슬라비아-그리스 침공을 감행했고, 문제의 5월 15일은 아무 일도 없이 지나갔다. 그러자 스탈린은 히틀러의 말을 믿어버리게 됐다. 게다가 스탈린이 받은 모든 독일 침공 징후 보고서들에서 '''독일군의 동계 준비에 대한 어떤 내용도 찾아볼 수 없는 것'''도 스탈린의 오판에 큰 기여를 했다. [[나폴레옹 보나파르트|희대의 군사천재]]가 [[러시아 원정|러시아 땅에 쳐들어갔다가 동장군 때문에 망했는데]] 동계준비를 안하고 러시아 땅에 쳐들어가는 것은 애들도 다 아는 '''자살행위'''다. 스탈린의 입장에서 상식적으로 생각해보면 그런 '''자살행위'''를 '''[[프랑스 침공|6주만에 프랑스를 굴복시킨]]''' 독일의 유능한 지도자인 히틀러가 할 리가 없었고[* 물론 히틀러는 군사적으로 유능한 인물이 '''절대''' 아니었으나 그 당시에는 저 6주 업적 덕에 모든 이들이 히틀러를 군사천재라고 오인하고 있었다.] 동유럽에 집결한 독일군은 유고슬라비아-그리스 침공'''만'''을 위한 것이라고 결론을 내릴 수 밖에 없었다. 설령 그 '''자살행위'''를 할거면 어떻게든 겨울이 오기 전 드넓은 소련 땅을 먹을 최대한의 시간을 벌기 위해 위에 '''반드시''' 라스푸티차가 끝나자마자 '''바로''' 쳐들어와야만 했다. 히틀러도 바보가 아니라 당연히 이를 알고 있어서 독일군은 그 때 쳐들어가려 했는데 [[그리스 침공|이탈리아의 트롤링(...)]]으로 그러지 못했다. 이러니 '독일군이 이번 해에 쳐들어오지 않는다.'는 스탈린의 판단은 ''''지금 그 상태로 쳐들어오면 반드시 패망한다''''는 [[모스크바 공방전|진실]]에 기반한 현실적이고 합리적인 판단이었으나 히틀러는 스탈린의 생각과 달리 희대의 군사천재가 아닌 희대의 또라이였고 상식적으로 하면 안되는 자살행위를 진짜로 저질러버렸다.--그리고 저 자살행위를 저지른 히틀러는 진짜 저것이 원인이 되어 자살했다.-- 굳이 [[유고슬라비아 침공]]이나 [[그리스 침공]]이 아니더라도 전황이 스탈린이 그렇게 판단할 수 밖에 없게끔 흘러갔다. 프랑스 점령 후에 각성한 영국군과 자유 프랑스 연합군은 빠르게 비시 프랑스의 아프리카 식민지를 점령하기 시작했고 이탈리아군은 북아프리카 전선에서 영국군에게 그야말로 영혼까지 깨지며 참패하고 있었다. 또한 역시 비시 프랑스의 식민지였던 지중해의 시리아-레바논까지 잃어버리는 상황까지 당면한다. 물론 비시 프랑스의 아프리카 식민지는 독일군이 피땀 흘려 점령한 정복지도 아니고, 북아프리카 전선은 독일군이 전혀 관심도 두지 않은 전선이었고, 지중해 전선도 그리스를 점령한 이후에는 연합국의 위협이 크게 도사리고 있지는 않았지만 이탈리아 왕국이 이탈 내지는 연합국에 항복할 가능성, 지중해 전선에서도 열세에 놓이게 되어 연합군에게 반격을 당할 상황이 되니 독일군은 결국 아프리카와 지중해에도 군대를 파견하기 시작한다.[* 모두가 알다시피 이 북아프리카 전선에서 활약한 독일군 장군이 그 유명한 [[에르빈 롬멜]]이다.] 이탈리아 왕국군 지원을 나간 에르빈 롬멜은 상부의 지시를 따르지 않고 빠른 기동전을 펼쳐 이탈리아군의 실지를 회복하기 시작하며 영국의 이집트까지 압박하기 시작했고, 영국군도 이에 맞서는 등 치열하고 팽팽한 공방전이 지속되었다. 다 죽어가는 중인 줄만 알았던 영국군이 점령지를 점점 늘려가기 시작하고, 유럽 추축국의 서열 2위 이탈리아 왕국을 무참히 패퇴시키며 독일군을 상대로도 밀리지 않는 선전을 하게 되자 스탈린의 입장에서는 대영제국은 역시 아직까지 죽지 않았고 본격적인 전쟁은 이제부터 시작이라고 생각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정도였다. 6월 하순이 되자 그 동안 보고되었던 수많은 위험 징후가 거짓으로 판명되면서 정보원들은 더 이상 스탈린과 그의 [[참모]]들에게 영향력을 발휘할 수 없게 되었다. 이러한 정황을 보면 스탈린이 전략적 관점에서 허를 찔렸다는 사실이 보다 확실하게 이해가 된다. 그리고 1년 전부터 [[리하르트 조르게]]를 비롯한 스파이들이 정보를 보내왔다는 것 때문에 스탈린이 고집이 세고 무식한 지도자로 보이지만 저 말은 다르게 생각해보면 스파이들이 1년 동안 보내왔던 정보들은 거의 대부분 틀렸다는 이야기가 된다. 사실 엄청나게 많고 어지러운 징후들 사이에서 눈앞에 닥친 위험을 가려내는 것은 말이 쉽지 실제로는 굉장히 어려운 일이다. 그리고 [[나폴레옹]]의 [[러시아 원정]]에서 알 수 있듯이, 러시아는 광활한 영토와 막장스런 기후 덕분에 공격자에게 매우 불리하다. 물론 안하는게 최고지만, 어쩔 수 없이 침공하려고 했을 때에는 러시아의 [[라스푸티차]]와 [[동장군]]을 우려하여 봄, 아니면 아무리 늦어도 초여름에 침공해야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하지만 독일군이 [[유고슬라비아 침공]]으로 [[발칸 반도]]에서 이미 시간을 허비해서 봄과 초여름이 지나 한여름이 되어 버리면 독일군이 들어오지 못한다는 것으로 판단하였다. 마침 1941년 이 해의 봄에는 유난히 비가 많이 오는 등 라스푸티차가 오래 지속되었다. 이 때문에 스탈린을 비롯한 소련군도 '만약 독일이 침공한다면 라스푸티차가 끝나는 즉시 공격을 행할 것'이라고 예상할 수 있었다. 그러나 앞서 말한 유고슬라비아-그리스 침공 등으로 인해 소련 침공 자체가 연기되고, 곧바로 여름이 되자 스탈린은 '''"적어도 이번 해에는 들어오지 않겠지"'''라는 생각으로 독일군이 소련 내로 들어오지 못할 것이라고 안심해서 마음을 놓아 버렸다. 게다가 1941년의 소련의 육군과 공군은 이제 막 전환기를 맞고 있었다. 조직과 지휘부, 장비, 훈련 병력 배치, 방어 계획 모두가 바뀌던 중이었다. 특히 [[대숙청]]을 통해서 기존 [[군부]]중에서 흔히 말하는 [[똥별]], 횡령범, 혹은 군 내 사조직 등의 군대 내부에 있는 '인민의 적'들을 잡아내는 과정에서 교리 그 자체가 바뀌었던 시기였다. 특히 이미 [[할힌골 전투]]나 흔히 대숙청으로 인해 빈약해진 소련군을 보여줬다고 말하는 [[겨울 전쟁]] 등의 여러 전쟁들에서 [[소련]]은 대숙청을 멈춰야하는 것이 아니라 최대한 빨리 끝내야한다는 것으로 결론내렸고, [[군부]]의 체계를 더 확실하게 바꿔야 함을 느꼈다. 하지만 문제는 이 바꾸는 작업이란게 시간이 매우 오래 걸리는 것이었고, 독일은 딱 그 시기에 쳐들어왔다. 이런 점들을 생각하면 오히려 독일의 선제공격은 비교적 탁월한 [[선견지명]]이었다. 언젠가 한 판 붙어야 할 적이 최고의 상황을 스스로 마련해 준 것이다. 요약하자면 스탈린이 [[대숙청]]이라는 희대의 뻘짓으로 소련의 군사력 역량을 잔뜩 날려먹긴 했지만 뒤늦게나마 정신을 차린 스탈린은 언젠가 한판 붙을 것을 예상은 했고 나름 대응하려 했다.[* 하지만 반대로 이러한 [[대숙청]]은 [[소련]]이 이후에 대규모 반격전을 실행할 힘을 넣어줬다. 제멋대로 움직이며 마치 [[장교]]들의 [[사병]]화가 되었던 군인들을 확실히 국가의 군대 아래로 넣었고 흔히 [[미하일 투하쳅스키|붉은 보나파르트]]로 대표되는 군부내의 군국주의, 독선적 장교들의 해임과 신임장교들의 채용은 소련이 다시 체계를 잡고 공격을 감행할 동기가 되었다.] 그러나 독일의 노련한 교란 작전에 속아넘어갔고 독일군이 [[라스푸티차]]와 [[동장군]]을 우려하여 겨울에는 오지 못할 것이라 여겼기에[* 이미 [[나폴레옹]]의 러시아 전쟁과 [[제1차 세계 대전]]에서 러시아의 겨울 위력이 입증되었기 때문에, 과거의 선례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서는 여름을 노리는 게 일반적인 전략이다.] 1941년 가을에 쳐들어올 것을 예상하는 데 실패했다. 또한 대숙청의 여파에서 벗어나기 위해 스탈린은 시간이 필요했고 이 때문에 독일에게 최대한 배려하는 길을 택했으나 이는 커다란 재앙이 되었다. 만약 전쟁이 터지지 않거나 몇 년 늦게 터졌다면 스탈린의 도박은 성공했을 것이다. 그러나 히틀러는 독소전쟁을 1941년이라는 이른 시기에 시작해 버렸고, 스탈린에게 시간이 필요했다는 약점을 놓치지 않았다. 전쟁 초기 소련의 도박은 실패했고, 독일의 도박은 성공하는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소련은 한 방에 나가떨어지게 만들 수 있는 나라가 아니었다.''' 결국 모스크바 앞에서 전투가 지지부진 늘어졌고, 아무런 준비도 없이 겨울을 맞이하게 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