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독소전쟁/경과 (문단 편집) === 1941년 === || [[파일:external/96ad826197090acd5e124054c6b35ca2c56d2d8de23857f3f7bb4c089038277c.jpg|width=100%]] || || 독일 육군 최고사령부(OKH)의 [[바르바로사 작전]] 계획도. || ||[youtube(wu3p7dxrhl8)]|| || 1941년 동부전선 흐름 || 침공 당시 [[소련군]]은 많은 면에서 열악했으며 특히 군대의 [[사기]], [[전술]] 체계, 명령 체계, 지휘 통신 체계, [[보급]], 장비, 심지어 병력 숫자까지도 모든 면에서 [[독일 국방군|독일군]]에 비해 후진적이었다. 게다가 개전 직전의 상황은 그 이전의 소련에 비해서도 막장이었는데 [[대숙청]] 이전까지만 해도 [[이오시프 스탈린]]은 종심 작전 이론을 창안한 [[미하일 투하쳅스키]]와 신진 장성들을 지원했으며 발전된 기계화 부대를 만드는 데 힘을 기울였다. 이는 [[영국]]의 리델 하트, 퓰러, [[프랑스]]의 [[샤를 드골]]이 [[기갑]] 부대의 집중 운용을 주장해도 번번이 무시당하고 [[아돌프 히틀러]]도 [[전차]]를 대외 과시용 이상으로 생각하지 않던 때라 붉은 군대가 큰 발전을 이룩했음을 알려준다. 그러나 스탈린의 대숙청 때 투하쳅스키가 처형되면서 소련군의 발달하던 작전 교리라든가 기계화되던 부대 구조 등이 말 그대로 전부 도로아미타불이 되어 버렸다. 특히 전쟁 직전까지 스탈린이 독일군의 침입 내지 도발에 반응하지 말라고 강력히 지시했기 때문에, [[굴라크]]에 끌려가고 싶지 않았던 많은 소련군 [[병사]]와 [[장교]]들이 초기 독일의 침공에 매우 수동적으로 반응했고 그 결과 손 써볼 틈도 없이 궤멸당해야 했다. 물론 이 명령은 개전 수 시간 만에 철회되었다. 애시당초 소련군의 전략이 현지 사수 및 축차소모 등의 비현실적인 전략이었던 만큼 달라질 것은 없었을 것이다. 사정은 [[공군]]도 마찬가지였다. 대숙청 기간에 유능한 장교들이 피해를 입어 마치 척수가 뽑혀 나간 상황이나 진배없었던 것이다. 공군 [[사령관]] [[https://en.wikipedia.org/wiki/Yakov_Smushkevich|야코프 블라디미로비치 스무시케비치]][* 리투아니아인이었다. 리투아니아식 이름은 야코바스 스무슈케비추스.] [[중장]]을 위시한 [[스페인 내전]]의 베테랑들 상당수가 투옥되거나 [[사형]]당한 것이 시작이었다. 스무시케비치의 후임자인 [[https://en.wikipedia.org/wiki/Pavel_Rychagov|파벨 바실례비치 뤼차고프]] 중장은 신기술 도입과 선진 교리 숙달에 적극적이었고 개전 시 선제권 획득을 위한 상시 준비 태세 수립을 주장했으나, 결국 대숙청의 희생양이 되어 독립 항공전대장으로 [[소령]] 계급이던 아내와 함께 재판 없이 처형당했다. 그는 [[스페인 내전]]에 자원한 에이스이며 창의적인 관리자로서 29세의 젊은 나이에 공군 사령관에 발탁되었으나, 결함이 많은 기종에 대해 '''"우리 조종사들은 관을 타고 비행하고 있다!"'''고 일갈할 만큼 깐깐하며 지도층과 타협할 줄 모르는 성격으로 목숨을 잃은 것이다. 그 외에도 젊고 실력 있는 장성들과 실전 경험이 풍부한 조종 장교들 상당수가 개전을 전후하여 처형되었다. [[설계국]]도 예외는 아니라서 뛰어난 기술자들도 사소한 결함이나 사고로 문책을 당해 처형되거나 감방 신세를 면치 못했다. 유명한 안드레이 니콜라예비치 투폴레프가 투옥된 것은 1937년이다. 그는 10년형을 받고 복역하던 중 1944년 석방되었다. 게다가 공군은 조종사나 기술자 등 인적 자원의 의존도가 육군보다 오히려 높으면 높았지 낮지 않았고, 이러한 대숙청은 공군 전력에는 엄청난 타격을 입혔다. 그 결과 소련 공군은 육군과 다름없는 상황에서 독일군의 공격을 기다리는 신세가 되었다. 그나마 [[소련 해군]]의 경우엔 육-공군에 비해 타격이 크지 않은 것처럼 보여서 이를 두고 "[[러시아 혁명]] 당시 해군 수병들이 혁명에 적극 가담해서 숙청의 칼날을 피할 수 있었다"는 의견도 있지만 해군도 인적 자원 측면에서 큰 피해를 입었다. 한 예로, [[잠수함]] 설계를 담당하던 설계 기사인 [[http://blog.naver.com/naljava69/220471912367|알렉세이 아사포프]]의 경우 [[M급 잠수함(소련)|말류트카급 잠수함]]을 설계할 당시 공산당에서 설계에 대해 이것저것 자기들이 원하는 요소들을 넣을 것을 지시했다. 처음에 아사포프는 잠수함의 성능을 떨어트린다며 반대했으나 결국 기존의 설계에 공산당에서 원하는 요소 중 일부를 강제로 집어넣었으며 결국 기존 예상 성능을 한참 밑도는 한심한 성능의 잠수함이 탄생했다. 이후 잦은 설계 변경에도 불구하고 성능은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아 알렉세이 아사포프는 책임을 물어 숙청당하고 만다. 물론 예조프시나 이전부터 독일과 소련의 해군 전력은 듣보잡 수준이었고, 독소전쟁 때 소련 해군의 존재감이 매우 미미하다 보니 육군이나 공군에 비해 그 참상이 돋보이지 않은 것뿐이다.[* 소련 해군, 특히 수상 함대의 전력 및 존재감이 [[미 해군]]을 상대할 수 있을 정도로 팽창한 것은 독소전쟁이 끝나고도 한참 뒤인 [[냉전]] 시기, 1960년대 이후다.] 당시 태평양함대 사령관 [[니콜라이 쿠즈네초프]] [[제독]]과 같이 부하들의 공훈을 확인하고 신원 보증을 서 주며 대숙청에 용감히 저항한 지휘관들도 있지만, 이들의 힘만으로 해군 [[장교단]]의 약체화를 막을 수는 없었다. 결국, 6월 22일 전쟁이 시작되자마자 [[루프트바페]]는 미리 다 파악해 둔 소련 공군 기지를 공습해 항공기들을 대파했고 불과 며칠 만에 1,200여 기의 항공기를 파괴해 제공권을 장악해 버렸다.[* [[바르바로사 작전]]동안 소련은 2만여 기의 항공기를 손실하는데 이는 소련이 독소전 전기간에 상실한 항공기의 40%에 달하는 수준이다.] 이는 해군도 마찬가지였는데, 한술 더 떠 "[[크릭스마리네]]를 자극하지 말라"는 스탈린의 명령까지 있어서 소련 해군은 사실상 손을 놓고 있던 것이나 다름없었다. 이 때문에 소련 해군의 대다수 함정들은 항구 내에서 루프트바페의 공습 등으로 격침당하거나 손상을 입고, 심할 경우 항구 내에서 아예 버려지거나 건조 중이었던 함선들 역시 독일군의 폭격이나 공격 등으로 완전 박살이 나거나 독일군에게 노획당했다. 물론 소련 해군도 완전히 손을 놓고 있지는 않아 [[키로프급 순양함]]과 [[프로젝트 7형 구축함|그녜브니급]] [[구축함]] 등을 동원해 독일 해군을 압박하려는 시도를 했지만 하필이면 독일군이 부설한 [[기뢰]]원으로 돌입하는 바람에 기함인 막심 고리키가 손상을 입었고 구축함 1척이 가라앉고 말았다. 그나마 전비 태세는 잘 갖추어 두어 피해는 삼군 중 가장 적었고, 그간 육성해 둔 [[해군 항공대]]는 개전 초에 전멸한 공군이 [[우랄 산맥]] 너머에서 재건될 때까지 버텨 주었다. 더구나 [[전격전]]의 논리에 따라 시작된 300만 명이 넘는 독일 육군 3개 집단군의 대대적인 공격은 수동적 대응에 익숙했던 소련 육군에게 사형 선고나 다름없었다. 소련군은 선진 이론과 추진력을 겸비한 뛰어난 지휘관들에 의해 양성될 기회를 놓친 채, 그렇게 독일군의 파상 공세에 직면했다. ||[include(틀:영상 정렬, url=KKxj3DEuk-c)]|| || 1941년 6월 소련 영내로 쇄도하는 독일군.[br]점령지 주민들이 독일군에게 꽃을 주며 환영하는 모습이 보이는데, 독일의 무자비한 탄압이 시작되면서부터는 이러한 화기애애한 모습은 사라졌다. || ||[include(틀:영상 정렬, url=15KePf6PoaU)]|| || 1941년, 전쟁 초반 승승장구하는 독일군의 모습.[br]진격하는 독일군과 불타는 소련 마을들, 격파당한 소련 기갑병기의 잔해들, 수많은 소련군 포로들, 대공포 공격을 받고 추락하는 소련 전투기의 모습이 담겼다. || ||[include(틀:영상 정렬, url=uiE1hW-Ogvw)]|| || 1941년, 독일 침공군에 맞서 반격하는 소련군. || 독일군은 제공권을 순조롭게 수중에 넣고 폭발적인 속도로 진군하여 불과 한 달 만에 수십개의 소련군 사단을 섬멸하고 서부 우크라이나와 벨로루시, 발트 3국 대부분을 장악했다. 제일 먼저 소련의 가장 강력한 전선군이 배치되어 있던 남부 지역에서는 독일군의 선봉 부대와 맞닥뜨린 소련군이 반격을 시도했다가 거의 모든 전차를 잃어 제대로 저항하지도 못하고 [[드니프로 강|드네프르 강]]까지 철수해야 했다. 북부의 상황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소련군은 독일군을 막는데 실패했고 다우가브 강까지 후퇴해 방어선을 구축하려 했으나 독일군의 진격이 소련군의 후퇴 속도보다 빨라 방어선 구축에 실패하고 만다. 6월 25일 갑작스러운 소련의 공격을 받은 핀란드도[* 히틀러가 일방적으로 핀란드도 독소전쟁에 참전한다고 선언했기 때문이었다.] 결국 [[계속전쟁|소련에 선전포고를 했고]][* 핀란드는 선전포고 전까지 소련에게 자신들은 전쟁에 참여할 생각이 없고 참전은 히틀러의 일방적 주장일 뿐이니 공격하지 말라고 애원했지만 [[겨울전쟁]] 때의 굴욕(어쨌든 이기긴 했지만)으로 눈이 뒤집힌 소련은 이를 무시했다.] 겨울전쟁에서 잃어버린 땅들을 모두 되찾았다. 더 북쪽에서는 독일군이 중요한 항구였던 무르만스크를 점령하려고 했으나 자연 환경에 의해 실패했고, 이후 소련은 무르만스크를 통해 미국에게 보급품을 지원 받을 수 있게 된다. 중부 지역에서는 공세 첫날부터 대부분의 소련군 병력이 비아위스토크에서 포위당해 30만의 소련군이 포로로 잡힌다. 독일의 기갑부대는 별다른 저항도 받지 않고 민스크를 점령하고 벨로루시를 장악했으며 소련은 급하게 예비군을 배치했지만 전선에 생긴 구멍을 메꾸기엔 부족했다. 독일군의 기갑 사단은 소련군의 전선을 무너뜨렸고 스몰렌스크 근방에서 다시 한번 30만명의 소련군이 포위되었다. 소련군은 급조한 예비 사단들로 포위된 병력들을 구출하려 시도했지만 실패했고 포위된 소련군은 전멸하였다. 그러는 사이 6월 27일, 헝가리 왕국이 소련에 선전포고를 하며 독소전쟁에 참전한다. 1941년 9월까지 2백만 명 이상의 소련군이 전사하였고, 이 시기 소련과 독일의 병력 손실비는 20:1에 달했다. 소련은 중요한 곡창 지대와 산업 중심지들을 상실했다. 이때에는 천하의 스탈린과 소련 지도부조차도 너무도 당황한 나머지 정신을 차리지 못할 정도였다.[* 소련 지도부의 침공 당시의 상황은 [[이오시프 스탈린]] 항목의 [[이오시프 스탈린/생애#s-6|제2차 세계대전과 독소전쟁]] 부분 참조.] 이 시점에서 소비에트 연방의 붕괴는 자명해 보였으며 작전 당시에 OKW가 목표하였던 A-A선[* [[아르한겔스크]]-[[아스트라한]]을 잇는 선으로 [[바르바로사 작전]]의 최종 도달 목표였다.]의 확보는 현실로 다가온 듯하였다. [[영국]]과 [[미국]]의 지도자들도 소련이 몇 달 버티지 못하고 붕괴할 거라고 예측했으며 독일의 히틀러도 그렇게 예상했다. 히틀러는 겨울이 오기 전까지 [[우랄 산맥]]까지 정복할 수 있을 거라고 낙관했다. 그러나... >"우리가 적 12개 사단을 섬멸하면 적은 그냥 12개 사단을 새로 편성한다." >"아군이 진격할수록 우리는 우리의 거점에서 멀어지고 적은 적들의 거점에 가까워진다. 그러니 아군 전선은 유류도 보급도 부족한 채 파도에 휩쓸리는 난파선처럼 이리저리 흔들리고 있다."- [[프란츠 할더]] >"우리 정보국은 나에게 소련에는 160개 사단과 3000대의 전차가 있다고 말했다. 우리는 지금까지 400개 사단과 2만 대의 전차를 파괴했으며, 이제 우리 앞에는 '''500개의 사단과 3만 대의 전차가 있다.'''" - [[아돌프 히틀러]] 소련은 수백만의 예비 병력을 끌어 모아 궤멸당한 사단과 군단들을 대체했다.[* D. 글랜츠의 <독소전쟁사>에 따르면 소련군에는 한때 96번 [[야전군]] 단대호가 있었다고 한다. 서방 기준으로는 누적 960만, 소련 기준으로는 누적 320만인데 서방기준으로 보인다.] 원래 개전 초 독일은 소련이 약 180여 사단을 동원할 수 있다고 보고 있었고 개전 초 이 사단들 대부분이 전멸 상태가 되자 진격을 막을 병력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소련의 병력 동원 능력과 물자 생산 능력은 그들의 예상을 훨씬 뛰어넘어 있어서 180여 개의 사단을 뚫어내니 이번에는 '''360여 개의 사단'''이 독일군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만큼 독소전에서 서로가 끝장이 날 때까지 모든 인구와 자원을 쏟아 부었다는 이야기다. 정말로 소련은 2만 대의 전차가 파괴되자 그냥 2만 5천 대를 새로 출고하는 것으로 대응했다. 여기에 더해서 모든 산업을 후방으로 옮기는 엄청난 사업을 단행했다. 이는 특히 무기와 탄약과 장비를 생산하는 중공업 시설이 대부분 이동이 불가능한 것을 전제로 만들어진 것을 생각하면 대단한 것이다. 당장 용광로 같은 것은 평시에도 이동이 불가능해서 용광로 건물을 지을 때 함께 현지에 건설된다. 게다가 소련의 교통시설은 빈약하기 이를 데 없었고, 그나마 [[루프트바페]]의 공습을 받는 상황이었다. 이런 상황에서도 소련 공장과 제철소들, 노동자들은 독일군이 지척까지 닥쳐와서도 무기를 생산하거나 공장 기재를 분해해 이송하는 작업에 열중했으며 몇몇은 너무 늦어서 독일군이 들이닥쳐서도 그 일을 계속했다. 말이 쉽지 몇마디로는 절대 설명할 수 없는 정말 황당하고 엄청난 일이다. [[대한민국]]으로 비유하면 [[울산]]과 [[포항]]을 불과 몇 주 만에 통째로 수백, 수천 킬로미터 떨어진 지역으로 몽땅 뜯어서 옮긴다는 것. 이런 대사업의 성공은 보즈네센스키를 필두로 한 국가계획위원회와 소련 산업 관료들이 5개년 계획으로 대규모 산업단지를 이리 저리 뜯어서 붙여본 경험이 풍부했던 것이 주요했다. ||[include(틀:영상 정렬, url=fJ5FK5SUgA0)]|| || 1943년 소련 탄약공장의 모습 || 소련은 서부의 공업 도시 수십 군데의 모든 설비와 수백 만 노동자를 모두 열차에 싣고 수천km 떨어진 우랄 산맥 근처의 황무지로 이전했다. 심지어 그 가족들까지, 아무런 인프라가 없는 황무지 한복판에 내팽개쳐진 이들은 오로지 열차를 통해 공급되는 얼마 안 되는 식량에만 의지한 채 공장을 다시 조립하고, 아무런 장비도 없이 스스로 도시를 건설했다. 심지어는 아예 식량조차 주어지지 않아서 노동자들이 스스로 [[텃밭]]을 가꾸어 식량을 얻어야 하는 경우도 존재했다. 전선의 장병들에 대한 식량 공급에도 허덕이는 판에 후방의 노동자들에게 제대로 식량 공급이 되기는 글러먹었으니. 다른 문제점도 있었다. 전쟁 초기 히틀러는 [[모스크바]]는 별 가치가 없다고 보고 [[레닌그라드]]와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우크라이나]]의 [[청색 작전|곡창 지대를 차지하길 원했는데 이 조치로 모스크바는 최소한의 방어력을 강화할 시간을 벌었다.]] 각지의 소련군은 궤멸당하면서도 대부분 격렬히 저항했고 [[라스푸티차]]로 대표되는 열악한 소련의 도로 상황도 독일군의 발목을 잡았다. 게다가 [[프랑스]]와는 비교도 안 되게 거대한 소련의 영토와 빈약한 교통망은 1940년 5월의 [[전격전]]을 고려하고 있던 독일 군부를 난감하게 만들었다. 한편 1941년 8월, 중부 집단군이 소련군을 압도하고 폭발적인 속도로 진군하는 동안 북부 집단군과 남부 집단군은 낙후된 기반 시설과 소련군의 저항으로 인해 점차 진격이 더뎌지고 있었다. 특히 남부 집단군은 소련군이 드네프르 강을 따라 강력한 방어선을 형성함으로 인해 상당한 고전을 면치 못했다. 이에 히틀러와 독일 수뇌부는 모스크바를 공격하기 전에 중부 집단군의 측면을 먼저 점령해야 한다고 판단했고, 중부 집단군의 기갑 사단에게 북부 집단군과 남부 집단군을 지원할 것을 명령했다. 북부 지역에서는 북부 집단군이 중부 집단군의 지원에 힘입어 발트 3국을 완전히 점령하고 레닌그라드 근방까지 진격했다. 한편 소련군 수뇌부는 중부 집단군이 계속해서 모스크바로 진격할 것이라고 예상했으나, 중부 집단군 남쪽으로 공세를 가하자 당황한 소련군은 패퇴했고, 소련군은 프리피야티 방면으로 구축해두었던 방어선을 포기할 수밖에 없게되었다. 이것은 견고했던 드네프르 방어선을 위태로워지게 하고만다. 중부 집단군의 기갑 사단이 전선을 돌파하려고 시도했지만 소련군 지도부는 기갑 사단이 돌파에 실패할 것이라고 오판했고, 중부 집단군의 공격에 발 맞춰 남부 집단군 기갑 사단이 전선을 돌파하자 남부 집단군의 돌출부와 북부 집단군의 돌출부가 연결되어 버린다. 결국 우크라이나의 소련군 대부분인 75만명에 달하는 병력들이 키예프에서 포위 섬멸당했다. 그러나 이 일련의 작전들로 인해 중부 집단군의 측면은 확보되었지만 모스크바의 방비는 더욱 더 견고해졌고, 겨울은 눈 앞에 다가온 상황이였다. 시간이 촉박해지자 독일군은 전방면에서 총공세를 감행하였다. 우크라이나의 소련군 잔당은 오합지졸이였고, 독일군은 순조롭게 진격하여 풍부한 자원을 가진 동부 우크라이나의 통제권을 얻을 수 있었다. 그 후 독일군은 크림 반도로 진격하여 세바스토폴을 제외한 크림 반도 전체를 장악했다. 동시에 북부에서도 공세가 시작되었다. 공세 목표는 레닌그라드로 향하는 보급망을 차단하고 핀란드군과 합류하는 것이였다. 초기 공세는 성공적이었고 [[레닌그라드 포위전|레닌그라드는 포위되었다]]. 하지만 소련군은 강력히 저항했고 독일군은 더 이상 진군할 수 없었다. 한편 여전히 독일군의 주요 목표는 모스크바 점령이었다. 이를 예상한 소련은 병력을 최대한 긁어모아 125만 명의 병력을 모스크바 방위에 투입했다. 9월 말 중부로 복귀한 구데리안의 기갑 사단은 새로운 공세를 시작했다. 다시 한번 소련군은 뱌지마,브랸스크 방면에서 크게 포위당해 60만이 넘는 병력을 잃었다. 독일군은 모스크바 근방까지 진격했고 양갈래로 나뉘어져 모스크바를 포위할 계획이였다. 모스크바의 상황도 암담했지만 스탈린은 도시를 포기하지 않았고 수백만의 시민을 동원해 방어 설비를 축조하고 병력을 아낌없이 쏟아 부었다. 또한 그 당시 독일이나 서방에서는 거의 무명이었던 [[할힌골 전투]]의 영웅, [[게오르기 주코프]] 대장[* 주코프의 당시 계급은 'генерал армии'인데, 이것은 상장(미국이나 영국 계급으로 환산시 중장)의 위이고 소련 원수 아래의 계급이다. 즉 대장으로 스탈린그라드 전투가 끝난 후 원수로 승진하였다.]이 급히 레닌그라드 방면에서 전임해 와서 방위전을 지휘했다. ||[include(틀:영상 정렬, url=_snl__VqHSg)]|| || '''모스크바 전선'''[br]1941년 말에서 1942년 초까지 모스크바 외곽 지역과 툴라에서 벌어진 소련군의 반격을 촬영한 영상. 포격을 퍼붓는 각종 포대들과 장갑열차들, 폭격하는 소련 공군, 돌격하는 소련 기병대와 보병대의 모습이 담겼다. || 게다가 그해 겨울이 조금 일찍 찾아오자 동계 준비를 소홀히 해 왔던 독일군은 작전에 애로사항이 꽃피고 말았다. 필사적으로 저항하는 소련군에 의해 모스크바 공격이 좌절되고, 물자가 얼어붙기 시작하자 독일군은 모스크바 공략을 포기했다. 그러는 동안 [[리하르트 조르게|소련은 일본이 참전하지 않는다는 첩보를 받았고]], 엄청나게 많은 예비 병력을 극동에서 소집해 훈련하고 배치했으며 공장과 산업 설비들의 후방 배치가 끝나면서 곧바로 소련이 전쟁 중 내내 드러내었던 막대한 물량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물론 시설 이동과 재배치는 막대한 혼란을 일으켰고 정부의 강제에 엄청난 반발과 저항이 있었지만 소련 정부는 '조국 어머니 러시아'를 지키기 위한 논리로 절대 물러서지 않았다. [[모스크바 공방전]] 때 소련군의 반격으로 밀리면서 독일군의 전선이 붕괴 위기에 처하자 독일군 수뇌부는 [[화학무기]] 사용을 진지하게 검토했다고 한다. 그러나 본격적으로 화학 무기가 사용되면 적도 당연히 보복으로 쓸 것이고, 기동전을 장기로 하는 독일군의 주요 수송 수단인 [[말(동물)|말]][* 독일군 하면 대부분 기계화 부대가 연상되지만, 실제로 기갑 부대나 장갑 척탄병을 제외한 [[보병]]이나 [[포병]]의 수송력은 말에 의존했다.]을 보호할 수 없어서 화학 무기를 사용하지 않기로 했다. 1941년 6월 소련이 처음 침공당했을 때 [[크렘린]]의 억압에 짓눌려 있던 많은 국가와 사람들이 독일군을 환영했다. 당장 1년 전까지 엄연히 독립국이었던 [[발트 3국]]과 [[우크라이나 대기근]]으로 최소 300만 명이 굶어죽은 우크라이나 주민들, 스탈린이 자치권을 주겠다는 약속을 저버린 [[체첸]][* 체첸은 독일군이 진입하지는 않았지만, 나름대로 [[게릴라]] 활동을 벌여 소련을 애먹였다.]은 크렘린에 대항해 침략자들을 도울 것이라는 견해가 팽배했다. 실제로 소련 당국도 부분적으로는 그렇게 예상했다. 그리고 실제로 독일군이 침공하자마자 이 지역들은 반소 게릴라 운동이 일어나면서 독일군을 대대적으로 환영했다. 그러나 히틀러는 전쟁 전에 열등 인종인 [[슬라브족]]에게 관용과 용서를 베풀 필요가 없으며 승자가 정의이며 진실이라는 논리에 충실하라고 지시했다. 문제는 히틀러가 외치는 슬라브족은 [[러시아인]]뿐 아니라 소련 치하의 민족들을 모두 싸잡은 개념이라는 것. 이런 상황은 전쟁이라는 극한 상황에서 적대자에게 증오를 품고 이를 폭력적으로 해소하려고 들기 쉬운 병사들을 통제하기 어렵게 만들었다. 당장 총통이 공언했는데 어느 장교가 쉽게 말릴 수 있었겠는가? 게다가 부분적으로는 역시 나치의 이념에 빠진 간부들이 이런 상황을 조장하고 방치하기도 했다. [[히틀러 암살 미수 사건]]의 주인공인 [[클라우스 폰 슈타우펜베르크|슈타우펜베르크]]가 반 나치주의자로 전향한 계기 또한 [[독소전쟁]]에서 저지른 독일군의 학살을 목격한 것이었다. 게다가 독일군을 뒤따라 들어온 [[슈츠슈타펠|나치 친위대]]와 인종 청소 부대인 [[아인자츠그루펜]]이 자행한 인종 학살과 약탈, 강간, 학살, 촌락 파괴와 같은 각종 만행은 침략자들을 환영하던 피억압 민족들의 마음에 도리어 적개심만 품어주며 종전까지 독일의 골칫거리가 되는 [[파르티잔]]들을 대거 양성했다. 1941년 우크라이나에서는 전쟁과 설비 이동, 독일군의 방치와 학살로 또다시 무수한 우크라이나인들이 떼죽음을 당했으며 발트 3국이나 벨로루시라고 상황이 좋지는 않았다. 이 지역에서는 독일군의 대량 파괴와 학살, 인종 청소로 [[제3제국]]의 이데올로기가 만든 그늘이 짙게 드리웠다. 어쨌거나 그 결과 1941년 하반기가 되면 대부분의 점령지 주민들이 [[독일 국방군|독일군]]에 비협조적으로 변했고 독일군의 학살은 독일에 열광적으로 환영하고 전적으로 협조하려 했던 점령지 주민이 급격히 독일군을 증오하도록 만들었고 많은 주민들을 [[파르티잔]]으로 만들어 버렸다. 여전히 독일에 협조하려는, 혹은 둘 다 싫다며 양쪽과 적대한 세력도 있었으나 그들이 대세가 될 순 없었다. 우크라이나 독립주의자들의 게릴라는 1950년대까지 살아남아서 소련군이 이들의 소탕전을 했다고 한다.[* 1944년 소련군에서 가장 창조성 있는 지휘관의 하나인 [[니콜라이 바투틴]]도 독일군이 아니라 이들의 습격에 의해 전사했다.] 결국 '''독일군은 이데올로기에 충실한 나머지 이념적으로는 '[[학살|청소]]'를 통해 성공했을지 몰라도 전략적으로는 대실패의 기반을 닦았던 셈이었다.'''[* 2차대전 당시 [[핀란드]]와 [[태국]]을 제외한 추축국 진영은 '''예외없이''' 수많은 피점령민들을 학살하거나 학살에 일조했다. 독일군뿐만 아니라 헝가리군과 루마니아군도 우크라이나에서 절멸전쟁을 벌였고, 유대인을 도왔다는 [[불가리아]]도 그리스 점령지의 유대인들을 [[트레블링카 절멸수용소]]로 보냈다. 지구 반대편의 [[일본군]]도 [[중일전쟁]]과 [[태평양 전쟁]]에서 중국인에게 적대적으로 행동해 많은 반감을 샀고, 그나마 덜 나쁘게 행동하던 [[연합군]]이 그들의 도움을 받아 전쟁을 조금 더 쉽게 풀어나갈 수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모스크바 공략에 실패한 1941년 12월이 지나면서 대사건이 잇따라 일어나 소련의 기세를 올려주었다. 하나는 [[일본 제국]]이 소련 공격은 하지 않고 미국에 [[진주만 공습]]을 감행하여 [[태평양 전쟁]]이 터진 것이었고[* 독일이 일본의 적성국가인 소련과 [[독소 불가침조약]]을 맺은 것 때문에 일본은 내각이 총사퇴할 정도로 발칵 뒤집혔었는데, 이제 와서 그걸 파기하고 소련을 공격한다고 하는 상황이라서 일본 입장에선 매우 어이없는 상황이었기에 애초에 일본이 대소 선전포고를 할 가능성은 매우 낮았다.], 또 하나는 독일이 미국에 먼저 [[선전포고]]하여 [[아시아]]-[[태평양]] 지역과 [[유럽]]-[[아프리카]]의 전쟁이 하나로 연결되었다는 점이다. 그 결과 소련도 이제 공공연히 미국에게 물자 지원을 요청하고 받을 수 있게 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