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독소전쟁/경과 (문단 편집) === 1943년 === ||[youtube(VA9QBHDtfCQ)]|| || 1943년 동부전선 흐름. 다음 해까지 이어진 소련군 동계공세와 [[코르순-체르카시 포위전]], [[카메네츠-포돌츠크 포위전]]을 함께 다루고 있다. || ||[youtube(Ps7PA_qZRMY)]|| || '''진격하는 붉은 군대'''[br]1943년 초의 모습이 담겼다. 진격하는 소련 전차부대와 폭격기들, 독일군이 버리고 달아난 각종 포대와 격파당한 독일군 전차들, 후방으로 이송되는 수많은 독일군 포로들이 보인다. || 1943년 초, 소련은 스탈린그라드의 승리에 힘입어 대규모 반격을 꾀하며 중부에서 '별 작전'을, 남부 일대에서 '갈로프 작전'을 시행하는 대공세를 펼치며 독일군을 몰아붙였다. 전선안정화 차원에서 독일군은 [[모스크바]]를 위협할 수 있는 강력한 돌출부인 르제프를 결국 내주고 물러나야 했다. 그러나 상황을 지나치게 낙관적으로 본 무리한 공세의 한계점과 [[에리히 폰 만슈타인|에리히 폰 만슈타인]]이 이끄는 독일군의 뛰어난 대처로 인해 [[제3차 하르코프 공방전]]에서 대패하여 더 이상의 공세 지속 능력을 상실했다. 이때 소련군의 실패한 공세로 인해 돌출 지역으로 쿠르스크 전역(戰域)이 남았는데 그 돌출부는 1943년 독일-소련 지휘부의 관심을 집중시켰다. 독일은 쿠르스크의 돌출부를 제거하고 전선을 교착시켜 태세를 정비한다는 전략을 세웠다. 반면 소련은 쿠르스크를 지켜내어 독일군을 소모시키고 대규모 반격으로 실지(失地)를 만회한다는 전략을 세웠다. 이 상태에서 소련은 쿠르스크에 [[참호]]와 [[벙커]]를 비롯한 엄청난 방어 설비를 구축했고 스탈린그라드 못잖은 대규모의 병력을 집결했다. 엄청난 포병 부대의 배치는 1943~45년 독일-소련 전역의 특징이 되었다. 독일군은 병력을 보충하기 위해 예정된 작전 개시 일을 자꾸 늦춘 끝에 1943년 7월 [[쿠르스크 전투|쿠르스크에 대한 공격]]을 개시했다. 남북에서 돌출부에 대한 공격이 이어졌으나 소련군의 강력한 방어설비로 인해 실패로 돌아갔다. 독일군의 쿠르스크 점령 실패는 그 자체로 1943년 전략의 무효화를 의미했다. 소련군은 이내 태세를 정비했다. 소련군은 계획된 대로 쿠르스크 돌출부 북쪽에서 '쿠투조프 작전'을, 남쪽에서 '류먄체프 작전'을 실시하여 독일군에게 심대한 타격을 가하고 돌출부를 없앴다. 이후 중부에서 펼쳐진 '수보로프 작전'은 실패했지만 남부인 우크라이나에서의 공세는 효과가 있었다. 소련군은 독일 남부집단군과 혈투를 벌이며 미우스 강을 넘어서 제4차 하르코프 공방전 끝에 하르코프를 탈환하고 우크라이나로 쏟아졌다. 치열한 전투 끝에 소련군은 드네프르 강 좌안으로 독일군을 몰아내고 [[키이우|키예프]]를 탈환했다. 쿠르스크 전투 이후 독일군이 이렇게 형편없이 밀리게 된 데에는 물론 쿠르스크 전투로 야기된 기갑 전력의 공백도 있었지만, 히틀러가 [[이탈리아 전선]]에 너무 집착해서 동부전선의 알토란 같은 기갑 전력 상당수를 이탈리아로 돌리는 바람에 동부전선에 더 커진 전력 공백으로, 천연 해자인 [[드니프로 강|드네프르 강]]을 제대로 활용 못하고 뚫려 버렸기 때문이다. 드네프르 강은 호수처럼 되어 강의 너비가 10km에서 20km로 엄청나게 큰 곳이 많아서 [[파일:external/www.transistanbul.com/ukrania-thumb.jpg]] (축척에 보이듯이 강 폭이 매우 큰 곳이 많다.) 독일군이 제대로 방어를 할 경우 소련군이 강을 뚫으려면 엄청난 희생을 무릅쓰고 강폭이 좁은 지점으로 축차 투입을 하는 수밖에 없는곳이었다. 이탈리아로 빼고 남은 동부전선 병력이라도 제때 드네프르 강 서안으로 후퇴해서 요새화시켰으면 어떻게든 강을 끼고 버틸 수 있었지만 히틀러는 '강 건너에 요새를 구축해 두면 병사들이 열심히 싸울 마음이 떨어진다' 라는 미친 소리로 제대로 된 방어선 구축을 허가하지 않았다. 1943년 8월이 되어서야 마지못해 방어선 구축을 허락하는데 촉박한 시간으로 [[콘크리트]]를 치기는커녕 대충 참호나 판 엉성한 방어선이 되었다. 그럼에도 드네프르 강 자체의 방어력은 어디 가지 않아서 이런 엉성한 방어선에도 소련군은 강을 도하하기까지 적지 않은 사상자를 내야만 했다. [* 여담이지만 스탈린은 처음으로 강을 건너는 병사에게 최고의 상을 주겠다고 선언했다.] 그리고 강 건너로 후퇴를 원하는 [[에리히 폰 만슈타인|만슈타인]]등 독일군 장성들의 청원을 계속 씹고, 히스테리적인 고집을 부리면서 전선 사수를 명령하다가 9월 15일이 되어서야 강 건너로 후퇴를 시작한다. 후퇴의 시기를 놓치고 현지 사수를 하다가 소모된 만신창이 병력으로 방어가 제대로 될 리가 없었던것. 게다가 소련군은 이 틈을 놓치지 않고 현지 [[파르티잔]] 등의 협조로 재빨리 9월 21일 드네프르 강 첫 교두보를 확보하였고 12월 말까지 좌안 우크라이나 대부분을 탈환한 후 드네프르 강 우안에 폭 300km, 종심이 80km에 달하는 교두보까지 확보하여 독일군을 더욱 손쉽게 밀어붙일 수 있게 되었다. 드네프르 강 우안의 교두보까지 내준 독일군은 천혜의 방어선인 드네프르 강에서 소련군을 저지할 기회를 잃고 말았다. 이처럼 군사적인 측면만을 고려한다면 __동부전선 >>>> 이탈리아__처럼 보이기는 한다. 그러나 연합군이 상륙한 직후 이탈리아 정부가 내분을 일으켜서 붕괴되고 무솔리니가 체포되었으며 이를 가까스로 수습한 것이 이탈리아에 주둔해 있던, [[알베르트 케셀링]]이 지휘하는 독일군이었다. 만약 이탈리아를 내버려 두었다면 이미 붕괴한 이탈리아는 손쉽게 연합군이 점령하게 되어서 군사적으로도 손해다. 비록 연합군이 이탈리아에서 전진을 거의 못하고 종전 직전에야 대대적인 진격이 가능했다고 하지만 이는 철저히 결과론적인 이야기이고 그게 가능했던 게 히틀러가 파견한 독일군이 있었기에 가능한 점이라는 걸 생각해야 한다. 뿐만 아니라 노르망디 상륙 이후 주력을 서유럽에 쏟아부으면서 이탈리아 전선의 병력까지 차출되어 나가서 양측의 병력비가 1:1까지 떨어지게 된다. 게다가 이탈리아는 삽질을 많이 하기는 했어도 추축국에서 그래도 강력한 나라 중 하나였다. 이런 나라가 추축국의 대열에서 탈락한다면 다른 나라에 미치는 정치적 여파 또한 엄청날 것이다. 이런 점을 살피지 않고 이탈리아로 전력을 파견한 것이 실수라는 것은 정치적, 전략적인 면을 충분히 살피지 않은 근시안적인 견해다. 1943년 이후 소련군과 독일군의 상황은 완전히 뒤바뀌었다. 전쟁이 계속되며 [[게오르기 주코프]]와 [[알렉산드르 바실렙스키]]를 비롯한 붉은 군대의 수뇌들은 비록 대놓고 내세우지는 않았지만 실질적으로는 붉은 군대가 초기의 '종심 작전'으로 회귀하도록 힘을 써서 소련군이 현대전에 걸맞은 기동과 화력을 갖추도록 했다. 그 결과 소련군의 돌파력은 증대되고 대규모 포격은 훨씬 정밀해졌으며 특히 기만술 측면에서는 독일군의 허를 찌를 정도로 크게 발전했다. 여기에 더불어 미국의 [[렌드리스]]로 비전투 분야의 생산은 신경 쓸 필요가 없게 되자 남은 역량이 죄다 무기로 집중되어 소련은 경이적일 정도의 무기 생산을 기록했다. 반면 독일군은 소련군에 비해 대량 생산 체제가 제대로 갖춰지지 않은데다가 [[독일 본토 항공전]], [[드레스덴 폭격]] 등 서방 연합군의 끊임없는 폭격에 시달려 소련군을 압도할 만할 무장을 갖추지 못하게 되고 말았다. 또한 소련에 비해 인구가 적은 편인 독일은 병력이 소실될 때마다 신병들을 불러오고 그 경험 없는 신병들이 제일 먼저 전사해 또 신병을 불러올 수밖에 없는 악순환의 상황이 소련군보다 컸으며 더욱이 이민족에 대한 잔혹한 탄압으로 인해 이들을 전장에서 쓸 수 없는 건 물론 오히려 독일인 병력을 이민족 억압에 배정하여 가뜩이나 부족한 병력을 더 낭비하게 되었다. 또 흥미로운 부분은 히틀러와 스탈린의 태도 변화다. 스탈린은 [[청색 작전]] 이후 자신의 군사적 무지를 깨닫고 주코프를 총군부사령으로 임명해 실질적 군사 지휘권을 이양했으며, [[쿠르스크 전투]] 이후에는 완벽히 휘하 장군들을 신뢰하게 되어 스탈린 자신은 그저 최고 결정권자 이상으로 붉은 군대의 작전에 관여하지 않으려 하고 [[정치장교]]의 권한을 대폭 축소시키는 등 2년 전에 비해 엄청나게 개념화된 모습을 보여줬다. 그 결과 재량권을 확보한 소련군은 스탈린과 정치권의 눈치를 보지 않고 얼마든지 효율적으로 작전을 진행시킬 수 있게 되었다.[* 다만 이 시기에 스탈린이 직속 기관으로 만든 방첩기관 [[스메르쉬]]의 존재를 고려하면, 그가 군에 대한 당의 권한을 축소시켰을 뿐, 실제로 군에 대한 감시와 간섭을 푼 것은 아니었다. 게다가 독소전의 본좌 [[데이비드 글랜츠]] 예비역 [[대령]]의 [[http://bit.ly/vt7wrP|인터뷰]]에 따르면 이러한 견해조차 오류였다고 한다. 스탈린은 전쟁 끝까지 통제권을 놓은 적이 없었으며, 1942년 초 [[모스크바 전투]] 후에는 스탈린과 주코프 모두 견해가 다르지 않았다는 것이다. 현재로서 내릴 수 있는 결론은 스탈린이 현대전에 대한 개념을 새로 공부하여 이해할 능력을 늦게나마 갖추는 데 성공했고 그 결과 통제력을 유지하면서도 현대전에 걸맞는 군대를 운용할 능력을 갖게 되었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 반면 히틀러는 해가 갈수록 장군들을 믿지 못하고 작전 입안과 수행에 사사건건 간섭하여 지휘관들의 재량권을 크게 떨어트렸다. 히틀러는 상황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기동 방어를 위한 후퇴조차 허용하지 않는 현지 사수 명령을 남발하여 지휘관들의 손발을 묶어 버리는 꼴을 만들고 말았다. 게다가 현대전에 걸맞는 능력을 갖출 생각 따위는 하지도 않아 전쟁 기간 내내 바보 같은 지시가 계속 내려지고 그 결과 독일의 패망은 더 빨라지게 되었다. 한편 스탈린은 집요하게 제2전선의 구축을 요구했다. 이는 어떤 의미에서 본다면 지극히 당연한 일인데 그 때까지 유럽지역의 주요 전선은 동부전선밖에 없었고, 본질적으로 [[북아프리카 전역]]은 규모가 작은 데다가 부차적일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미-영 연합군은 1943년 7~9월 [[이탈리아]]에 제2전선을 구축했다. 이것이 [[이탈리아 전선]]. 이는 일시적으로 이탈리아를 이탈시켰으나 [[알베르트 케셀링]]이 지휘하는 독일군은 지형을 잘 이용해서 시간을 효과적으로 벌었고 독일 [[특수부대]]가 무솔리니를 구출하여 다시 괴뢰국을 세우면서 전선은 교착 상태에 빠져들었기에 더 이상 독일에게 큰 위협이 아니었다. 결국 영-미는 1944년 [[프랑스]]에 제2전선을 다시 구축하기로 했고 이것이 1944년 6월의 [[노르망디 상륙작전]]과 프랑스 진공으로 이어지게 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