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독소전쟁/경과 (문단 편집) === 1944년 === ||[include(틀:영상 정렬, url=zT5TLBYcnmE)]|| || 1944년 독일을 향해 진격하는 소련군. 해방을 목전에 두고 함포와 화포 사격을 가하는 레닌그라드 수비대 및 프리피야트[* 후에 [[체르노빌|체르노빌 원전]]이 지어진 그 도시 맞다.] 근처에서 폴란드 방향으로 공세를 가하는 제1 우크라이나 전선군의 모습이 담겼다. || ||[include(틀:영상 정렬, url=-AUdP-QVEKA)]|| || 1944년 동부전선 흐름. [[바그라티온 작전]]부터 종전시까지의 상황을 다루고 있다. || 1944년 겨울에 소련군은 다시 대공세를 펼쳤다. 독소 양군의 관심에서 멀어졌던 북부 전선에서의 공세로 소련군은 [[레닌그라드 공방전]]에서 승리하여 포위 900여 일만에 해방시켰다. [[레닌그라드]]는 이 엄청난 포위를 감당한 대가로 '영웅 도시'의 칭호를 받았지만 300만 시민 중 100만 명 이상이 기아와 폭격, 전투로 사망했다. 남부에서도 공세가 이어졌다. 작년 12월 말부터 드네프르강 좌안 우크라이나 지역에 대한 공세를 개시한 소련군은 재빠른 기동을 통해 1월에 [[코르순-체르카시 포위전|체르카시와 코르순에 대한 포위망을 구축하는 데 성공하면서]] 독일 남부집단군을 더욱 어렵게 만들었다. 독일군의 기민한 대처로 코르순-체르카시 포위망은 기대했던 것보다 성과를 보지 못하도록 만들었지만 독일군이 기동 전력을 포위망 분쇄에 투입하느라 다른 전선에 투입하는 것을 막음으로서 소련군의 이어진 공세를 막아내지 못하게 만들었다. 2월 중순에 소련군은 [[카메네츠-포돌츠크 포위전|카메네츠-포돌츠크 지역에 대한 포위]]를 통해 독일 제1기갑군을 포위하는 데 성공했다. 역시 독일군의 기민한 대처로 완전한 포위 섬멸에는 이르지 못했지만 독일군 전력에 큰 타격을 입히는 데 성공했다. 20만에 달하는 기갑군은 몸만 빠져나왔지 기갑장비와 차량은 죄다 버리고 도망쳐야 했다. 결국 소련군은 우크라이나 전체에서 독일군을 몰아내는 데 성공하고 [[크림 반도]]를 탈환했다. 독일군 17군과 루마니아군은 제 때에 철수해야 했지만, 캅카스의 유전지대에 대한 집착을 못버리는 히틀러의 야욕 덕에 현 위치를 고수하다가 크림 반도에서 포위 된 채 큰 피해를 입으며 해상 탈출로 겨우 몸만 빠져나올 수 있었다. 16만에 달하던 17군은 철수 작전 과정에서 3만여명의 전사자와 그 이상의 부상자가 발생하며 전멸당했고, 루마니아군도 2만 5000여명의 전사자가 발생하는 큰 피해를 입었다. 이 결과로 [[루마니아 왕국]]은 추축국 탈퇴를 고려하며 서방 연합군과 비밀리에 협상을 벌이는 등 전략적인 효과를 낳은 것은 물론이고 남부 전선에서의 독일의 누적된 피해가 심각해지는 결과로 나타났다. 한편 독일군의 관심사가 우크라이나에 집중된 사이 소련군은 벨로루시의 중부집단군을 한 방에 날려 버릴 또 다른 대공세를 준비하고 있었다. 소련군은 치밀하고 철저한 준비 끝에 [[노르망디 상륙작전]]에서 제2전선이 실현된 지 얼마 안 되어 벨로루시를 비롯한 전쟁 이전 소련의 영토를 죄다 되찾는 [[바그라티온 작전]]을 실행시켜 독일 중부집단군을 문자 그대로 믹서기로 갈아 버리고 뒤따른 3번의 공세를 성공시켜 독일군을 [[폴란드]]까지 밀어내고 [[핀란드]]를 추축국 대열에서 이탈시켰다. 거기다 히틀러의 간섭이 상황을 더 악화시켰는데 넓은 방어선에 부족한 병력들에게 기동 방어를 위한 후퇴를 불허하고 무조건 전선 사수를 명령했다. 당시 중부집단군은 약 85만 명이었고, 공격하는 소련군은 233만 명 정도로 약 2.75배에 달하는 병력차가 있었는데 소련군은 거대한 규모의 부대로 여러 곳을 집중 공격하고 중부집단군은 히틀러 때문에 안 그래도 적은 병력으로 흩어져 있는 데다가 후퇴까지 불허되니 쌈싸먹히고 각개격파당했다.[* 15만 명 정도가 제대로 싸우지도 못하고 포로로 잡히고 사상자는 35만 명 발생. 거의 50만 명이 날라갔다.] 물론 저 당시 독일군의 상황을 고려하면 기동방어를 펼칠 역량이나 있었나 의심스럽기는 하다. 그렇지 않아도 장비가 부족한 상황에서 소련군의 기만책에 걸리는 바람에 일부 기갑장비를 다른 부대에게 넘겨주었으니.[* 가령 제3기갑군은 이름과는 달리 기갑 부대를 전혀 편제하지 못한 상황이었으며 거기다 제56기갑군단을 북우크라이나 집단군에게 넘겨주었다.] 게다가 전차의 전략적 기동성은 소련군 장비가 독일 장비보다 한 수 위였다. 바그라티온 작전이 끝나고 교환비를 보면 독일군 대략 25만 명이 전사하거나 실종된 반면에 소련군 18만 명 정도가 전사하거나 실종되었다.[* 단 부상자는 소련이 더 많아서 부상자 및 포로까지 집계하면 독일이 60만 명 소련이 77만 명이다. 하지만 소련군이 공세, 독일군이 수비였다는 점을 감안해야 하고, 소련군이 거둔 전략적 전술적 승리에 비하면 이정도 손실비는 아주 싸게 먹힌 것이다.] 그리고 우크라이나에서 그랬던 것처럼 벨로루시를 탈환하고 나니 소련은 인구 1,000만 명을 다시 되찾게 되었고 여기서 또다시 병력을 보충할 수 있었다. 여하튼 독일군으로서는 중부집단군 괴멸 + 탈환한 지역에서 보충된 소련군 병력이라는 결과가 나온 것이다. 그런데 히틀러는 이 와중에도 정신을 못차리고 치명적인 미스를 하게 되는데, 노르망디 상륙을 애초에 막았으면 모를까, 일단 상륙이 된 이상 병력을 보존해서 프랑스 동북부 삼림지대로 후퇴하고 제트기 생산을 [[폭격기]]가 아닌 [[전투기]]로 몰빵시키고, 서부전선의 기갑 병력 상당수를 동부전선으로 돌려서 나치 독일의 생명줄인 [[루마니아]] 플로이에슈티 유전을 어떻게든 보전하는 것이 그나마 버티기라도 하는 수였다. 그러나 히틀러는 실현 불가능한 망상인 '[[대서양]]으로 연합군을 쓸어 버린다'에 집착해서 무려 1,400대나 되는 전차를 동원해서 8월 중순에 서부전선에서 공세에 나섰다가 [[팔레즈 포위전]]에서 연합군의 포위와 폭격에 1,300대가 넘는 되는 전차가 무의미하게 녹아내렸다. 애초에 이 공세 자체가 그야말로 망상에서 나온 황당한 짓거리였는데 노르망디에 상륙한 연합군의 머릿수는 145만명 이상으로 해당 지역에 배치된 독일군 38만명의 4배나 되는 상황이었다. 즉 애초에 성공할 가능성이 없었다. [* 쿠르스크 전투에서 독일이 동원한 전차가 2,938대였고 손실이 720대 정도였던 것을 감안한다면 이 무의미한 1,300대 이상의 소모는 엄청난 타격이었다.] 전차뿐만 아니라 이 무모한 공세로 후퇴 시기를 놓쳐서 인적 고갈로 1명의 군인이 아쉬운 상황에서 20만 명이 추가로 포로가 되었고 5만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사실 1944년 4월에 도입된 제트기 메서슈미트 [[Me 262]]를 원래 계획대로 전부 전투기로 생산했으면 1944년 서부전선처럼 제공권에서 완전히 밀려서 독일군 기갑 부대가 영미 연합군 폭격기의 밥이 되는 일은 어느 정도 줄일 수 있었다. 하지만 1943년 11월 26일 히틀러 눈앞에서 한 시제 비행 때, 완전히 삘이 꽂힌 히틀러가 메서슈미트 Me262를 전부 폭격기로 생산하도록 명령했다. 물론 이를 무시하고 상당수를 전투기로 생산하였으며 야전 부대에서는 어렵지 않게 이를 전투기로 개조해서 날렸다. 그 와중에 소련은 9월 초부터 루마니아 영내에 대대적으로 침입하여 곧 루마니아 플로이에슈티 유전을 확보하게 된다. 플로이에슈티 유전을 잃고 나니 독일은 극심한 석유난에 시달리게 되어, 플로이에슈티보다 생산량이 적은 [[헝가리 왕국(1920~1946)|헝가리]]의 너지커니저 유전과 독일 내의 액화 [[석탄]]으로 근근히 버텨야 할 상황으로 몰리게 되는데, 얼마나 석유가 없었으면 800대 가량의 전차를 동원한 [[벌지 전투|아르덴 대공세]]에서, 800대의 탱크를 120~130km 진격시킬 기름도 없어서 [[임팔 작전|연합군의 석유를 노획해서 전진할 계획을 짤 정도로]] 난감하게 된다. 이것도 보면 가관인 게 공세 목표인 앤트워프를 확보하려면 120~130km를 진격해야 하는데 최대 진격 가능 거리가 60km인 기갑 부대도 있었다. 애초에 불가능한 작전을 했던 셈. 중부집단군이 심각한 피해를 입자 소련의 북서전선군은 측면의 안전이 확보되어 더이상 거리낄 것이 없었고, 레닌그라드의 포위를 풀고 물러나있던 독일의 북부집단군을 향해 맹렬한 공격을 퍼부었다. 소련군은 리가 부근을 확보하여 북부집단군을 고립시킨 뒤 이를 궤멸시키고자 했으나, 아직 50만에 달하는 병력을 유지하고 있던 독일 북부집단군의 저항은 만만치 않았고, 소련군이 진출했던 지역을 탈환함으로서 북부집단군은 일단 포위망을 벗어나 쿠를란트 지역으로 퇴각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소련군의 진격속도는 독일군의 상상을 아득히 초월할 정도로 빨랐고, 결국 약 40만의 북부집단군은 중부집단군과 연결이 완전히 끊어져 쿠를란트 지역에 고립되고 만다. 독일군은 이들을 수송해 독일로 데려오자는 방안을 고려하기도 했지만, 히틀러는 연합군을 아르덴 대공세에서 박살낸 다음 소련군을 공격할 때 북부집단군을 이용해 소련군을 크게 포위해 박살내겠다는 망상에 가까운 전략을 세우며 이를 기각한다. 이런 처참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프랑스 동북부~독일 국경에 퍼져있는 넓은 삼림 지형을 이용한 방어의 사자 [[발터 모델]]의 눈부신 방어로 [[휘르트겐 숲 전투]]가 벌어지던 1944년 9월~12월 초까지 서부전선은 상대적으로 잘 버티고 있었다. 그러나 [[발터 모델]]을 위시한 독일군 장군들이 반대한 [[벌지 전투|아르덴 대공세]]가 히틀러의 고집으로 개시되었고[* 이 당시 독일군은 플로이에슈티 유전 상실로 비롯된 기름 부족으로, 공세에 동원한 전차들이 목표지점인 앤트워프까지(약 130km) 도달할 기름도 없는 상태로, 연합군의 기름을 노획해서 전진한다는 한심한 작전 계획을 짰다.] 작전 초반엔 그나마 악천후를 바탕으로 전진하다가 날씨가 개자 제공권을 장악한 연합군의 폭격으로 독일군은 800대 이상의 전차를 상실한다. 이 기 갑전력들은 상당수가 동부전선에서 빼온 것이었고, 8만 명 정도의 병력 손실까지 보게되니 안 그래도 부족했던 인력은 더 부족해졌다. 그런데도 [[https://www.youtube.com/watch?v=WOVEy1tC7nk]]를 보면 1945년 3월 20일경까진 서부전선을 그럭저럭 막아내고 있던게 신기하다. 아르덴 대공세라는 뻘짓을 안 했다면 서부전선은 삼림지대를 이용해서 몇 달 정도는 더 버틸 수 있었을 터이다. 이런 상황에서 1945년 1월 중순부터 소련군의 공세가 시작되자 동부전선은 말 그대로 쭉쭉 밀리기 시작한다. 그러잖아도 바그라티온 작전으로 인해 동부전선의 독일군 전력이 절단났는데 여기서 또 서부전선으로 병력을 빼고 상대하는 소련군은 더 늘어났으니 엎친 데 덮친 격이었다. 독일이 서부전선의 연합군을 상대하기 위해 동부전선에서 군대를 빼내자, 소련군의 대규모 공세를 독일군이 막기는 더 어려워진 게 자명한 사실. 이후 소련군은 차례차례 루마니아, [[불가리아 왕국]], [[헝가리 왕국(1920~1946)|헝가리 왕국]], [[유고슬라비아]] 등 [[중유럽]]과 [[발칸 반도]] 국가들에 진격하면서 그 지역 [[파르티잔]]과 합류하거나 몇몇 나라에는 새 정권을 세웠다. 소련군이 점령한 국가는 소련군에 의해 신정권이 세워지고 이들은 즉각 독일군에 대해 총을 겨누었다. 소련군은 이후에도 [[폴란드]]의 [[바르샤바]]를 점령하고 계속 서진하여 1945년에 이르렀으며, 1945년 2월 미-영 지도자들과 스탈린이 [[얄타 회담]]을 개최했을 때 소련군은 순조롭게 진격하여 동프로이센까지 진격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