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독일군/역사 (문단 편집) === 제2차 세계대전 ===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Second_world_war_europe_1941-1942_map_de.png]] 어쨌든 [[아돌프 히틀러]]와 [[나치]]집권후 독일군의 군비를 제한하던 베르사유 조약이 철폐되고 재군비가 이루어지면서 독일 [[육군]] 및 [[공군]]은 대대적인 팽창이 이루어졌고, 육군은 흔히 전격전이라고 알려진 기갑 전력을 활용한 기동전술과 슈투카를 중심으로 한 막강한 전술공군의 힘으로 [[제2차 세계대전]]초에 독일은 서부 전선에서의 수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폴란드]]를 점령하고 [[덴마크]], [[노르웨이]] 등의 북구 약소 국가들을 차례차례 석권하더니 결국 5월 10일 시작된 황색 계획에 의해 [[네덜란드]], [[벨기에]], [[룩셈부르크]]를 점령하고 프랑스의 항복마저 받아내며 사실상 유럽의 절반을 장악했다. 여기에 이어 원하지는 않았지만 그리스를 비롯한 발칸 반도 침공에서 영국군과 그리스군을 상대로 속전속결로 승리를 거두었으며 북아프리카에서 역시 롬멜은 기갑 전력을 활용한 과감한 기동으로 영국군을 이집트 국경까지 밀어내는데 성공했다. 한편으로 독일 해군의 경우 빈약한 전력에도 불구하고 노르웨이에서 구축함들을 상실하는 대가로 영국 해군에게 타격을 주어 독일의 북해 재해권을 보호하는데 성공한다. 하지만 [[영국 본토 항공전]]이 실패로 돌아가 영국 침공은 물건너 가고,[* 이는 영국측의 효과적인 대응과 독일 공군의 중전투기 성능 열세, 최고 사령부와 괴링의 전략적 식견 부족이 원인이었다. 독일은 초기에는 영국 공군을 상대로 승리를 거두고 있었지만 영국이 기습적으로 베를린을 폭격하자 열받은 히틀러와 괴링이 기존의 공군 기지와 군수 공장을 공격하던 것에서 민간인에 대한 보복 공격을 지시하였고 덕분에 가장 위험한 시기 영국 공군은 한숨을 돌리고 독일 공군에 반격을 가해 전세를 뒤집는데 성공한다.] 노르웨이에서 안그래도 빈약한 수상함 전력이 크게 약화되면서 히틀러가 프랑스 항복이후 계획하였던 [[바다사자 작전]]을 취소하고 독일 해군은 강제적으로 1차 세계 대전때 활용했던 U보트를 주축으로한 통상파괴 작전으로 회귀하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 [[소련]]과 북[[아프리카]]로 전선이 확대되면서 서서히 몰락의 길을 걷게 된다. 해군의 [[유보트]] 전단은 전쟁 초기에 영국에게 상당한 타격을 주었고 육군 또한 [[소련군]]을 맘껏 유린하며 [[모스크바]] 코앞까지 도달하며 거의 전쟁에서 승리를 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독일군 수뇌부는 최고사령부부터 참모사령부까지 전부 지나치게 자만한 나머지 보급의 중요성을 무시하고 만다. 바르바로사 작전 발동 초기 독일군 수뇌부는 10월이면 소련을 굴복시킬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정작 1941년 10월 독일군은 앞선 우만 전투와 키예프 전투로 전력 재보강이 필요했으며 여기에 소련의 라스투티차까지 찾아오며 전혀 대비가 되지 않은 진격 속도는 크게 돈좌된다. 결국 이 자만으로 독일군은 1941년 12월 모스크바에서 소련군의 역습을 받았며 모스크바 일대에서 르제프 지역까지 밀려나게 된다. 한편 지중해에서는 크레타에서 독일 공군은 폭격 이후 한참이 지나서야 공수부대를 투입하는 실수를 범하는데 이 때문에 권총외 개인화기 없이 강하하던 공수부대원들은 영국군뿐만 아니라 분노한 크레타섬 주민들에게 학살당하게 된다. 그래도 독일군 최정예라는 명성이 아깝지 않게 이 모든 악수를 극복하고 크레타섬을 점령하는데 성공했지만 2만명에 가까운 공수부대원들을 상실하였고 이에 충격을 받은 히틀러는 공수 작전을 일체 금지하는 악수를 두었다. 여기에 이어 히틀러가 멍청하게도 미국에 먼저 선전포고를 날리면서 미국을 전쟁에 끌여들이는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한다.[* 물론 미국이 진주만에서 일본에게 선빵을 맞은 이상 독일에게 선전포고 하는 것은 시간문제이긴 했다. 하지만 그 시간은 1941년 12월 시점에서 미국이 독일에게 선전포고할 구실을 찾고 국민들을 설득할 시간은 독일군에게 매우 소중한 시간이었다. 하지만 히틀러가 친절히 먼저 선전포고를 날리며 미국의 수고를 덜어준 것이다.] 그 덕에 소련이 미국의 군사적 원조를 받고, 영국이 본격적으로 대잠전력을 확충하면서 귀중한 전술적 승리를 공수표로 날려 먹었다. 이후 몰락은 북아프리카에서 부터 시작되었다. 롬멜은 과감한 기동전술로 영국군을 농락했지만 지중해 통제권이 영국군에게 있는 이상 보급라인이 취약할 수 밖에 없었다. 게다가 영국이 미국으로 부터 받은 물자들을 아프리카로 집중적으로 배치하고 잘 짜인 방어선에 롬멜이 들이박도록 강요하면서 병력을 소모시킨 이후 대규모 반격을 가해 1943년 봄 북아프리카에서 독일군을 몰아낸다.[* 바로 이 부분이 롬멜이 과연 원수급 지휘관인가에 대한 논쟁에서 롬멜이 뛰어난 지휘관인 것은 맞지만 한개의 전역을 담당하는 야전군 사령관으로서는 부적합하다는 근거가 되고 있다. 발터 모델이나 에리히 만슈타인, 클루게, 클라이스트와 같은 뛰어난 야전군 지휘관들과 달리 롬멜은 보급을 간과하고 자신의 군단을 지나치게 몰아붙힌 나머지 영국군의 소모전에 속절없이 당했기 때문이다.] 이어 1942년 소련군이 모스크바에서 승리를 거둔 이후 기세를 몰아 독일군을 쳤다가 막힌 이후 청색 작전으로 소련의 곡창지대인 캅카스로 진군하여 크림 반도를 비롯해 큰 성과를 거두었지만 스탈린그라드에서 독일 남부 집단군의 핵심인 제 6군을 통째로 날려먹으면서 전세의 주도권을 소련에게 헌납했다. 이후 북아프리카를 기점으로한 연합군의 공세로 남부전선이 위험에 빠지게 되고 영국 본토항공전에서 살아남은 영국 공군기지들을 중심으로 영국 공군과 미국 육군항공대의 전략폭격을 당하기 시작한다. 1943년 3월 북아프리카 전역의 패배가 확실시 되었을 때 만슈타인의 신들린 기동 방어 전술로 제 3차 하르코프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면서 전세를 뒤집나 싶더니 그대로 그 전력을 [[쿠르스크 전투]]에서 말아먹고야 만다. 한편 영국을 말려죽이는가 싶었던 독일 해군의 U보트들은 영국의 해치 호그로 확충된 대잠 전력에 미 해군의 대잠 전력과 해상 전력이 가담하면서 차차 격침되게 된다. 그 이후를 기점으로 연합군의 시칠리아 상륙을 허용하고 1944년 초 우크라이나를 넘어 소련군이 루마니아 일대로 진입하면서 동맹국들이 하나 둘 떨어져나갔으며 1944년 2월 기점으로 연합군이 머스탱에 추가 연료탱크를 부착하여 전략폭격기들을 호위하기 시작하자 그 이전까지 꼬박꼬박 8~9% 대의 손실을 안겨주던 독일 공군이 무너지기 시작한다. 결국 1944년 6월 동부 전선에서의 [[소련]]의 대반격과 연합군의 [[노르망디 상륙작전]]으로 독일군의 전력은 크게 약화, 이후 [[아르덴 대공세]]와 [[봄의 새싹 작전]] 실패로 전선이 붕괴되며 소련군에게 베를린을 함락당하며 독일은 1945년 5월 8일 항복, 사회주의 진영의 동독과 서구 진영의 서독으로 분할된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시기 독일에는 개개의 전술적이거나 기술적인 능력에서는 거의 각 분야별 에이스들이 다 있다고 할 정도로 '''천재적인 인재들'''이 정말로 많았다. 이 시기 독일군의 활약상은 아예 전쟁 당시 연합군에도, 종전 후 군사학적으로도, 영향을 많이 미쳤다. 이 시기 독일군이 세운 공을 가장 잘 표현하는 통계 자료 중 하나가 미군과의 1:1.4 교환비이다. 미국 전사상 미군이 적군에게 교환비가 밀렸던 것은 미국 독립전쟁이 유일한데 독일군은 순수히 육군간의 전투에서는 평균 교환비를 1:0.8로 살짝 앞섰으며 공군까지 끼어도 1:1.4로 매우 선전했고 이후 미국이 치룬 수많은 전쟁에서 그 어느 적국도 독일군의 교환비 기록을 깨지 못하고 있다. 전차 격파수 1, 2위 모두 국방군 출신의 [[쿠르트 크니스펠]]과 [[오토 카리우스]]가 각각 공인 168대와 150대로 차지하고 있으며 공군의 경우에도 비록 허접했던 소련 공군을 상대로 세운 기록이라지만 352기를 격추시킨 [[에리히 하르트만]]부터 세계 121위까지를 독점하고 있는 루프트바페의 에이스, 혼자서 소련군 기갑사단 2개를 전멸시킨 [[한스 울리히 루델]] 등 2차 대전기 육공군에서 수많은 기록을 세웠다. 전술적인 면에서도 독일 육군이 선보인 무전기가 설치되어 보병과 대등한 협동 작전이 가능한 기갑 전력을 활용한 기동 공세와 전선을 살짝 후퇴시켜 적의 공세 종말점을 유도한 이후 치고 나가는 기동 방어 전술은 전격전이라고도 불리며 현대 육군 전술에 큰 족적을 남기었고 공군 연략 장교를 배치하여 급강하 폭격기와 연계한 합동 작전 전개, 에반-에마엘 요새와 크레타 섬을 굴복시킨 공수 작전, 3인 1편대를 이루던 당대 공군 편대 전술을 깨뜨리는 4인 1개 편대 전술인 로테-슈밤 대형 도입 등 전쟁 중기 까지 연합군보다 앞서가는 다양한 전술을 구사했다. 또한 대공포를 대전차포와 곡사포, 심지어 전차포로 까지 사용하는 기행부터[* 물론 이쪽은 워낙 대전차포가 구려서 궁여지책으로 가져다 쓴 대공포가 '''얼래 효과가 더 좋다!!!!'''가 되어서 그런 것이긴 하다.] Stg 44라고 불리는 최초의 돌격 소총 개발, V1, V2 로켓과 같은 전략 미사일, 비록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연합군의 장난감 취급 받았지만 최초의 무선 자폭 드론 개발까지 나치가 외계인하고 손을 잡은 것이 분명하다는 농담까지 나올 정도로 무기 역시 뛰어났다. 전술적인 수준에서는 연합군 통틀어도 비슷한 수준의 군재들이 많았음에도 태초에 국가적 한계[* 사실 총력전은 장기적으로는 국가의 산업능력, 경제력과 직결된다. 그런 면에서 미소를 둘다 적으로 둔 시점에 독일의 패배는 예정된 것과 다름 없었다.]와 대전략적 차원에서의 오판이 상당했기에 실패하고 말았다. 또한 앞선 프리드리히 대왕의 양면 전쟁을 절대하면 안되는 이유를 보고서도 양면전쟁을 벌였으며 독일군 장교단 역시 1차 세계 대전 당시 독일 장교들이 그랬듯이 전술적 식견을 뛰어났을지 몰라도 전략적 식견을 부족하다는 한계점을 보여주었으며 티거를 비롯한 중장비들의 경우 독일이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단가가 비싸 위력은 강력했을지는 모르지만 생산성이 미국의 셔먼이나 소련의 T-34 시리즈에 비해 현저히 떨어졌다. 또한 시가전 분대 전술이 기갑 전술과 달리 구식적이었는데 이 덕분에 볼트액션 소총인 Kar 98K가 대부분이던 독일군 보병 분대들은 시가전에서 파파샤 소총으로 무장한 소련군이나 M1 개런드 반자동 소총으로 떡칠을 한 미군에게 밀렸다. 하지만 전쟁 기간 내내 독일군이 보여주었던 전술과 기술력은 적국들에게도 매우 높게 평가받았는데 오죽했으면 2차대전 직후 냉전 체제로 접어들자 [[에리히 폰 만슈타인]] 같은 전범도 소련과 자유진영 양측에서 포섭하려고 접선한 사례까지 있었을 정도. 하지만 2차 대전기 독일군은 [[히틀러]]의 침략전쟁의 주축으로 수많은 전쟁 범죄에 직접적 혹은 간접적으로 가담하였다. 특히 [[슈츠슈타펠]]의 경우 아리아인의 혈통을 보호하고 열등민족을 제거한다는 명목으로 나치 집권이후 강제 수용소 운영과 유대인 권리 박탈에 앞장섰으며 이들로부터 뻗어나온 [[무장 친위대]] 역시 심각한 수준의 전쟁범죄를 저질렀다. 문제는 이러한 전쟁범죄가 친위대에 국한되었던 것이 아니라 국방군도 포함이 되어있다는 것이다. 일부 2차 대전기 독일을 높게 평가하는 밀덕 들 중 이러한 사실을 간과하고 [[국방군 무오설]]을 주장하기도 하지만 폴란드 침공 시기부터 독소전쟁기 까지 국방군 육해공군 모두 가리지 않고 포로 학살, 민간인 및 병원 폭격, [[홀로코스트]]에 가담하였다는 것이 사료적으로 밝혀지면서 현재는 정면 부인당하고 있다. 이러한 흑역사 때문에 프로이센으로부터 내려온 독일군의 전통은 그 이후 서독, 동독 그리고 독일 연방군 모두 이때의 역사를 부정하면서 단절되게 되며[* 이 때문에 크롬웰 시기부터 역사를 이어오고 있는 여러 영국군 부대들이나 프랑스군과 달리 현재 독일군 부대들의 경우 역사의 시작을 전쟁 이후 시점으로 잡고 있다. 흔히 바이마르 공화국 시기 베를린 근위 연대로 창설되어 우리가 잘 아는 그로스도이칠란트 기갑척탄병사단의 경우 아예 해산되었으며 구 제국군의 역사를 계승하던 국방군 육군 1사단과 3사단의 역사도 현재 그 어느 연방군 부대에서 계승하고 있지 않다.] 무장 친위대 복무자들의 경우 전적을 인정받지 못하고[* 대표적으로 우리가 흔히 아는 [[미하엘 비트만]]의 경우 현재 독일 연방군은 그 전적을 일체 인정하지 않고 있다.] 강제 수용소에 복무했거나 포로 학살 행위에 참가한 정황이 잡히면 전범재판에 기소되는 운명을 겪게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