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독일군/외인부대 (문단 편집) ==== [[인도]] ==== [[파일:/pds/200811/30/91/b0041991_4932a9bba593b.jpg|width=200]] 독일은 독일 내에 있는 인도인들로 군대를 편성해서 연합군과 싸우게 하려고 했는데, 이것이 바로 자유 인도 군단(Legion Freies Indien)이었다. 사실 이 부대는 정말 제대로 된 전투부대라기보다는 정치선전을 위한 선전도구로서의 역할이 강했다고 할 수 있다. 유학생이나 기타 이유로 체류하고 있던 인도인들이 입대했지만 제대로 부대를 구성할 숫자는 당연히 되지 못했다. 이에 독일군 당국은 북아프리카 전선에서 포로로 잡은 영국군 소속의 인도 병사들을 상대로 모병을 한다. 일단 선발된 27명의 장교가 베를린으로 불려갔고, 그 뒤에 포로들 중 자원자들을 중심으로 해서 6000명 규모로 부대가 편성되었다. 영국군 소속 인도인 부대가 인도인들의 분열을 조장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종족별/종교별로 단위부대를 편성한 데 비해서 자유인도군단은 모슬렘, 힌두, 자트, 마라타, 라지푸트 등 제민족을 혼합편성했다. 이는 인도 독립운동에서 무투파의 영도자였던 [[찬드라 보스|수바스 찬드라 보스]]의 강력한 주장에 의한 것으로, 이렇게 함으로써만 전 인도인의 단결이 실제로 이루어질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부대원의 2/3는 무슬림이었고, 나머지가 힌두교도 및 기타 소수민족이었으며 [[시크교]]도의 비중이 꽤 컸다. 이들 인도인 부대는 실제 전투임무에는 거의 투입되지 않았다. 일부 분견대(보병 2대대 소속의 제9중대)가 이탈리아에서 [[파르티잔]] 소탕에 투입되어 종전시까지 버티다가 항복한 것 외에 주력은 노르망디 상륙 이전에는 [[독일 국방군]] 육군 소속으로 [[대서양 방벽]]을 지키는 요새선 구축작업에 주로 동원되었고, 미영 연합군이 상륙한 후에는 [[무장친위대]]로 전속(44년 8월)된 후 약간의 전투를 겪으면서 내륙으로 후퇴하여 1944년 겨울에는 독일 본토로 들어간다. 사실 본래 예정되어 있던 이들의 임무 중에는 동부 이란에 낙하산으로 강하하여 지금의 [[파키스탄]]인 [[발루치스탄]]에 잠입, 선동과 테러, 사보타주를 벌이는 것이 포함되어 있었지만 이것 역시 제대로 되진 않았다. 하지만 다음해 5월, 독일이 항복하면서 이들은 갈 곳이 없어진다. 자유인도군단의 장병들은 논의 끝에 2.6km의 알프스 산길을 돌파하여 중립국인 스위스로 탈출하려고 했지만, 미군과 프랑스군에게 잡혀 영국군에게 넘겨졌다. 이 과정에서 [[구미에|프랑스군 소속 모로코 병사들]]이 포로가 된 상당수의 자유 인도 군단 병사들을 학살했는데 그 숫자는 확실하지 않다고 하며, 이후 영국군에 인수된 장병들은 인도로 송환, 반역죄로서 재판에 회부된다. [[인도국민군]] 장병들도 이들과 함께 재판에 회부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